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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
13.
충분히 몸을 푼 다음 여학생과 반 바퀴를 차이를 두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두 바퀴를 천천히 돌며 몸을 적응시킨 다음 세 바퀴부터는 속도를 냈다.
육상선수는 아니지만, 운동신경은 타고났고 1공수 특전여단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준족이라 달리기는 자신 있었다.
속도를 내자 여학생과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수작을 걸 생각은 없어 바깥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앞질렀다.
빠르게 치고 나가자 뒤에서 바빠진 발걸음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않아도 여학생이 속도를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치고 나가자 기분이 상해 다시 나를 추월하려 속도를 낸 것이었다. 모르는 척 속도를 더 내자 여학생도 피치를 올려 따라붙었다.
순간 호승심이 생겨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러자 여학생도 이를 악물고 따라왔다. 200m 트랙을 빠르게 세 바퀴 돌자 여학생도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겨우 이런 일에 승부욕을 불태우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만두면 일부러 져주는 꼴이 돼 상황이 더 이상해진다는 생각에 전속력으로 달렸다.
있는 힘껏 달리자 여학생과의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다섯 바퀴를 돌자 한 바퀴를 앞서나갔다.
거리가 점점 벌어지자 정말 화가 났는지 여학생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눈을 마주치면 싸우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못 본 척 앞만 보고 달렸다.
열 받은 여학생을 두 바퀴 앞지른 다음 트랙을 벗어나 수돗가로 이동했다. 거친 호흡을 정리하며 가볍게 몸을 푼 다음 땀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물 한 모금을 마시자 여학생이 헉헉대며 다가왔다.
따라 잡힌 두 바퀴를 끝까지 채우고 온 것으로 모자를 벗자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헉헉헉헉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해.”
“네?”
“잠시 쉬었다가 정식으로 다시 붙자고.”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정식으로 달리기 시합하자는 말이잖아. 정말 못 알아듣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저는 충분히 달렸습니다. 더는 달릴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한참 뛰어 힘이 빠진 상태에서 이겨놓고 부끄럽지도 않아?”
“저는 운동하러 온 것이지 누굴 이기러 온 것이 아닙니다.”
“보란 듯이 추월하고 따라붙으니까 속도 내서 두 바퀴나 추월하고 빠져 놓고 이기러 온 것이 아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놀리거나 이기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사과 따위 필요 없어. 정식으로 붙어.”
정윤희를 닮은 같은 여학생은 화가 많이 났는지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며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졸랐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대드는 모습조차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지만, 나이도 어린 게 말끝마다 말은 놓자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정 원하시면 그렇게 하죠. 그런데 언제 봤다고 계속 반말이십니까?”
“은근슬쩍 이기는 것도 모자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까지 하네. 너 양아치니?”
“네에?”
“너 아까 학교에서 나 봤잖아. 너 나랑 같은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 신입생이잖아. 아니야?”
“.......”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학생은 눈썰미가 나만큼 뛰어났는지 단박에 나를 알아봤다.
이러자 무안해 할 말이 없었다. 모른다는 전제하에 행동했는데, 상대는 진작부터 나를 알고 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 얼굴 빨개진 거 보면.”
“죄송합니다.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너 내가 반말한다고 기분 나빴지?”
“그게...”
“그냥 봐도 나보다 나이 많은 거 알겠네. 하지만 우린 같은 학번 동기야. 반말해도 억울해할 일은 아니야. 그래도 억울하면 너도 반말해.”
나이 몇 살 많다고 사회에서 어른 대접받기를 원하는 건 매우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어른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나이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했다. 그래야 나이 어린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뛸 거야 말 거야?”
“몇 바퀴 뛸 건데?”
“너 장거리 선수야? 단거리야?”
“나 육상선수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잘 달려?”
“군대에서 한 일이 밥 먹고 총 쏘고 달리는 일이었으니까.”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이나라 군발이가 모두 너처럼 빨리 달리면 우리나라 옛날에 통일했겠다. 어디서 사기를 치고 지랄이야. 내가 여자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깔보는 거지?”
“그런 거 아니야. 육상선수였는지 아닌지 속일 이유가 없잖아. 속인다고 뭐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 혹시... 국군체육부대 소속이었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달릴 수 있지?”
“나 공수특전여단 중사 제대했어.”
“나이가 몇인데 중사야?”
“25살.”
“생각보다 연식이 오래됐네. 어쨌든 특전사 중사라고 잘 달린다는 건 말이 안 돼. 그건 한국 사람은 모두 태권도를 잘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과 같은 이치야.”
“여단에서 잘 달리는 축에 속했어.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도 잘했고.”
“나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육상선수였어. 개인적인 일로 그만뒀지만, 전국체육대회에서 메달까지 땄어. 어디서 구라 질이야.”
“진짠데...”
“헛소리 그만하고 달릴 준비나 해. 이번에는 아까와 다를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이빨을 앙다문 채 눈을 크게 뜨고 작은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살벌하긴커녕 귀엽기만 했다.
TV에서 아름다운 요정이 튀어나온 것처럼 귀엽고 깜찍한 모습에 살짝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진지한 눈빛을 보자 장난으로 대할 수 없어 미소를 감추고 심각한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몇 바퀴나 돌 건데?”
“으음... 스무 바퀴.”
정윤희를 닮은 여학생은 장거리가 특기인지 스무 바퀴를 달려 승부를 가리자고 했다.
군대 있을 때 부대 대표로 나가면 100m 단거리부터 5,000m 장거리까지 가리지 않고 뛰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 내기라도 걸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아주 자신만만하네.”
“자신만만한 게 아니라 군대에선 이럴 때 과자나 음료수 내기를 하거든. 그래야 승부욕이 발동하니까.”
“좋아. 뭘 걸고 싶은데?”
“군대도 아니니 과자와 음료수는 좀 그렇고... 이긴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모두 사주기. 어때?”
“좋아.”
내기가 정해지자 출발선에 섰다. 여자와 남자가 동일한 출발선에, 그것도 같은 거리를 뛰는 건 치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 있어 하는 여학생의 태도와 전국체전에서 메달까지 땄다면 여자라고 내가 패널티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불리한 게임으로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좀 달리는 것과 정식으로 달리기를 배운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 통성명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노골적으로 치근댄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언제?”
“같이 밥 먹는 거로 모자라 이름까지 알려달라는 게 치근대는 게 아니면 뭐야?”
“달리기 하자고 해서 내기 건 건데, 그게 치근댄 거야?”
“내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
“네가 예쁘다는 건 인정해. 살면서 너처럼 예쁜 애는 단연코 본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모든 남자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병이야. 세상 모든 남자가 겉모습만 보고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얼굴보다 마음을 보는 남자도 있어.”
이건 잘생긴 남자보다 성격 좋은 남자가 좋다고 카메라에 떠드는 여자 연예인의 허무맹랑한 거짓말과 다를 것이 없는 아주 심한 거짓말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예쁘면 모든 걸 용서하는 미친 동물이었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아무리 재미있는 얘기를 해도 관심도 갖지 않다가 미녀가 썰렁한 얘기를 해도 포복절도하는 것이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얼굴보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거짓말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억지를 부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소녀에게 치근대게 된 게 된다는 생각에 오기가 발동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했다.
병이라는 말에 예쁜 소녀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창피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그런 것으로 소녀는 당장 연예인으로 데뷔해도 될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소녀를 남자들이 떠받들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로 살면서 병이라는 소리를 들은 건 어쩌면 오늘이 처음일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예쁘다는 평을 듣는 정윤희를 닮은 소녀에게 병이라고 말할 남자는 단연코 없었다.
미치지 않고선!
“이름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이름 모른다고 달리지 못하는 거 아니니까.”
“송하린이야. 너는?”
“전형필.”
하린은 머리가 텅텅 빈 얼굴만 예쁜 인형은 아니었는지 기분 나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자기 이름을 말했다.
“시작!”
재빨리 시작을 외친 송하린이 쏜살같이 출발선을 튀어나갔다. 얌체 같은 행동이었지만, 다섯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에게 반칙이라고 따지고 싶지 않아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리고 펑퍼짐한 운동복을 입어 몸매가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작고 통통한 엉덩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불만 따윈 있지도 않았다.
체력 안배와 눈요기를 동시에 하며 3m 거리를 유지한 채 다섯 바퀴를 달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육상선수로 활동했다는 하린이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달리는 자세가 안정돼 있었다.
그러나 열 바퀴를 돌자 숨이 거칠어지며 자세가 빠르게 흐트러졌다. 고1때 운동을 관둔 후 오랫동안 쉬었는지 조금 전 달리기 여파가 벌써 나타났다.
하지만 하린만 그런 게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로 열다섯 바퀴를 돌자 아까와 달리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수술 후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고, 3개월간은 통근하며 재활치료를 받아 몸이 많이 굳어졌다.
치료가 끝난 후에도 입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운동할 시간이 많지 않아 체력이 군대 있을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하린이 피치를 올렸다. 역시 스퍼트는 육상선수인 하린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이미 예측하던 상황으로 앞지르지 않고 바짝 따라간 이유가 하린이의 스퍼트를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떨어지지 않고 한 바퀴를 따라가자 하린이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참고 속도를 냈다.
지쳤을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떨어지지도 않고 오히려 앞으로 치고 나가자 많이 당황했는지 발이 꼬인 하린이가 넘어질 듯 비틀댔다.
비틀대는 사이 거리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단번에 50m를 앞서가자 하린이 이를 악물고 따라붙었다.
그러나 역전시키기엔 체력소모가 커 따라오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경기는 반 바퀴 차이가 난 채 끝났다.
거리를 더 벌릴 수 있었지만, 철천지원수도 아닌데 무참하게 이길 이유가 없어 속도를 늦춰 경기를 마쳤다.
“헉헉헉헉.”
트랙에 누워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자 결승점을 통과한 하린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괜찮아?”
“헉헉헉헉.”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트랙에 누워 거친 숨만 토해냈다. 넘어지며 단단한 트랙에 무릎을 심하게 찧었는지 찢어진 운동복 밖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무릎에서 피 난다. 벤치로 가자.”
“괜. 헉헉. 찮아. 헉헉헉헉.”
튕기는 하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멋대로 팔을 잡고 일으키자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 창피함, 당황스러움이 눈 속에 가득했다. 그러나 조금은 나를 다르게 보는 눈빛도 그 속에 담겨있었다.
내가 달리기를 잘해서 그런 것인지, 자신을 끝까지 이긴 이기적인(?) 남자가 내가 처음이라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에 대한 호기심이 눈에 담겼다는 건 확실했다.
============================ 작품 후기 ============================
글을 읽어보신 후 작품서평란에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난번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지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교통사고를 당해 밤에 글을 못 올릴 것 같아 내일 올릴 거 미리 올립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