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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
12. 새로운 인연(因緣)
20분쯤 기다리자 레이첼이 문을 두드려 음식이 준비됐음을 알려줬다. 레이첼을 따라 1층 식당에 내려가자 20가지가 넘는 요리가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가볍게 허기를 달랠 생각으로 음식을 주문했는데,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밤 10시를 넘어 출출하다고 하면 가볍게 먹을 정도만 준비할 줄 알았다. 시녀가 영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잠시 잊은 내 잘못으로 레이첼을 탓할 수 없었다.
레이첼이 꺼내놓은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식탁에는 20명이 먹어도 배가 부를 만큼 많은 음식이 있었지만, 먹는 사람은 달랑 나 혼자였다.
먹는 사람은 혼잔데 심부름을 위해 옆에 서 있는 레이첼과 서빙 하는 시녀 2명, 음식을 만든 주방장 2명 등 5명이 나를 위해 공손히 서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 가정부 아줌마가 밥을 차려줘 대접받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밥을 차려주면 자리를 비워 쳐다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밥을 먹진 않았다.
다섯 명이 나만 바라보자 어색함을 넘어 불편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 먹다 남기면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도 있었다.
“레이첼.”
“네 영주님.”
“내가 먹다가 남기면 어떻게 해?”
“돼지에게 줍니다.”
“사람 먹는 음식을 왜 돼지에게 주는데?”
“조르주 준 남작님은 음식이 남으면 모두 돼지에게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저희는 돼지보다 못한 농노니까요.”
“미친 새끼.”
조르주 준 남작은 농노를 가축보다 못하게 여겨 자기가 먹다 남은 음식도 돼지에게 줬다.
농노가 가축보다 못한 세상이지만, 자기가 먹다 남은 음식을 농노들이 먹는 것도 싫어해 돼지에게 주는 건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었다.
평민 출신 조르주는 수도 크라쿠푸스의 황립 행정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로 15년 동안 수도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준 남작에 봉해지며 이곳을 맡게 됐다.
12살에 입학해 20살에 졸업하는 아카데미는 현대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을 합쳐 놓은 것으로 행정, 검술, 마법 세 가지를 나누어 가르쳤다.
수도 크라쿠푸스를 비롯해 10대 도시에 하나씩 있었고, 이중 수도에 있는 황립 아카데미는 아틸라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만 모이는 영재들의 집합소였다.
황립 아카데미의 한 해 졸업생은 500명 정도로, 이들 중 평민은 10명이 안 됐다. 평민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비싼 학비로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고, 귀족들의 심한 텃세로 졸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이 때문에 아카데미를 졸업한 평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에 비례해 신분에서 오는 트라우마도 엄청나 기사와 준 남작에 오른 아카데미 출신 학생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평민과 농노를 더욱 가혹하게 다뤘다.
조르주도 이런 유형으로 준 남작이 되자 자신은 평민, 농노들과는 다른 인종, 다른 피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민인 다니엘 집사와 조나단 경비대장을 하인 부리듯 부렸고, 온갖 이유로 농노를 괴롭히고 죽이며 3년 동안 레오 영지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레이첼. 나는 이거면 충분해. 나머지는 시녀와 일꾼들에게 가져다줘.”
“이 음식은 영주님을 위한 거예요. 안 돼요.”
“어차피 다 못 먹어. 버리면 너무 아깝잖아.”
“그래도...”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많이 만들지 마. 먹을 만큼만 만들어. 알았어?”
“그건 영주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에요. 최소 20가지는 식탁에 올려야 해요.”
“먹지도 못할 만큼 음식을 잔뜩 만드는 건 품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낭비야. 내일 아침 집사에게 내가 말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갓 구운 빵 3개와 수프 한 그릇, 닭고기 샐러드 한 접시만 내 앞에 끌어다 놓고 나머지는 시녀와 일꾼들이 나눠 먹게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레이첼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시험하는 걸로 생각했는지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시험하는 하는 거 아니니까 어서 가져가.”
“저.정말요?”
“어.”
“하지만...”
“오늘 일로 혼나거나 벌 받는 사람 절대 없어. 그러니 식기 전에 가져가.”
이 일로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는다고 세 번이나 말하자 그제야 주섬주섬 음식을 쟁반에 담아 주방으로 가져갔다.
음식을 나르는 시녀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보였다. 고개를 푹 숙여 마음을 감추려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이 온몸에서 아른아른 퍼져 나왔다.
시녀들과 일꾼, 병사들이 먹는 음식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보지 않아도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 두 끼 먹기도 힘든 농노들에 비교하면 영주성에서 일하는 농노들은 잘 먹는 편이었지만, 가축보다 못하게 여기는 농노에게 신선한 재료에 각종 조미료를 잔뜩 넣은 요리를 제공할 턱이 없었다.
귀리 가루로 죽을 쑤어 소금을 넣어 먹는 오트밀과 거친 빵, 채소 등이 전부일 것으로 매일 깔깔한 음식만 먹다가 기름기가 잘잘 도는 음식을 먹게 생겼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집사는?”
“내일 아침 영주님께 드릴 서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나도 자야겠다. 너도 먹고 얼른 자.”
“저는 오늘 밤 영주님 침실을 지켜야 해요.”
“왜?”
“주무시다가 필요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심심할 수도 있으니까요.”
“침실에 마실 물 있지?”
“네.”
“그럼 됐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도 네 방 가서 쉬어.”
“그럴 수 없어요. 그러면 혼나요.”
“누구에게 혼나?”
“집사님요.”
“집사에겐 내일 아침에 내가 괜찮다고 했다고 말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어.”
“그래도...”
“내가 누구야?”
“영지의 주인이세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내가 괜찮다는데.”
“알겠습니다.”
심심할 수도 있다는 레이첼의 말은 잠자리 시중을 들겠다는 말이었다. 매일 밤 여자를 끼고 잔 조르주의 영향도 있었고, 평소 귀족들이 반반한 농노를 데리고 자는 것도 오랜 전통(?)이라 다니엘이 그렇게 조치한 것이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는 The Age of Hero에선 남녀 간의 은밀한 행위 섹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단, 20살 미만의 아동·청소년은 법적인 문제로 환인이 원천적으로 봉쇄해 성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성년은 유저든 NPC든 원하는 상대와 마음껏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NPC 중에는 성매매하는 NPC도 있었고, 여성 유저와 NPC를 강간하는 남성 유저도 있었다.
그러나 유저가 유저를 강간하면 계정이 영구히 삭제됐고, 여성 유저가 위험 신호를 보내면 환인이 곧바로 조처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진 않았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실제와 다름없는 성행위를 할 수 있어 대한민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많은 국가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다행스러운 건 음란행위는 캡처와 동영상 촬영이 안 돼 개인 생활이 밖으로 유출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The Age of Hero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는 슈퍼에고 컴퓨터 환인이 철저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아직 큰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20평 크기의 침실에는 다섯 명이 뒹굴어도 될 만큼 큰 침대가 놓여있었다. 조르주가 쓰던 침대를 버리고 새로 만든 침대로 시트와 덮는 이불도 모두 새것으로 새것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로그아웃했을 때 누가 공격하면 어떻게 돼?”
“로그아웃하면 캐릭터가 사라져 공격할 수 없어요. 하지만 모모님은 영지를 갖고 계셔 캐릭터가 사라지지 않아요. 대신 이방은 시간이 멈춰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공격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돼요. 단, 공격받는 중에는 로그아웃이 안 돼요. 이점 잊지 마세요.”
“알았어. 내일 아침에 보자.”
“네.”
‘로그아웃!’
[전형필님, 꿈과 희망이 가득한 The Age of Hero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로그아웃이라고 속으로 외치자 The Age of Hero를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게임인지 구분이 안 되네.”
캡슐을 빠져나와 몸을 활짝 피며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결릴 거란 예상을 깨고 한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3주년 기념 이벤트로 받은 캡슐은 최고 사양으로 게임을 하는 동안 산소공급이 원활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이 신속해 피로를 최소화했다.
또한, 온도를 자동으로 맞춰주어 덥거나 춥지 않았고, 안마 기능도 있어 실시간으로 몸 상태를 체크해 결리는 곳을 풀어줬다.
그리고 액체 영양제를 용기에 주입해 놓으면 알아서 주기적으로 영양제를 주사해 주는 기능도 있어 최대 열흘 동안 게임을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 피로가 매우 높아 12시간 연속으로 게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고, 정신적·육체적 문제가 있을 때는 캡슐이 강제로 접속을 종료하기도 했다.
냄비에 물을 얹어놓고 캡슐에 부착된 액정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캡슐은 The Age of Hero 접속은 물론 인터넷과 TV도 볼 수 있어 더는 구형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The Age of Hero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올라온 아이템을 검색했다. 대부분 일반과 고급 아이템으로 에픽 아이템은 찾아볼 수 없었고, 레어 아이템도 올라온 게 30개도 안 됐다.
어느 게임이나 그렇듯 무기가 방어구보다 비쌌고, 옵션과 공격력, 방어력 수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매우 심했다.
“레어 무기가 8,000만 원이 넘네. 방패도 7,000만 원이 넘고. 이벤트로 받은 무기와 방패를 팔 수 있다면 얼마쯤 받을 수 있을까?”
“공격력, 방어력 모두 최고고, 악마와 언데드, 유령형 몬스터를 상대로 공격 데미지 50% 증가, 받는 데미지 50% 감소니까 100억 원은 기본으로 받겠다. 그러면 뭐해. 판매 불가인데. 아쉽다.”
레이첼이 차려준 음식과 비교도 안 되는 물에 퉁퉁 불은 라면을 먹고 은행 계좌를 The Age of Hero에 등록했다.
이렇게 계좌를 등록해야 경매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경매장은 수도를 비롯해 10대 도시에 하나씩 있었다.
경매장을 통해 아이템을 판매하는 방법은 원하는 금액을 정해놓고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더 많은 금액을 받기 위해 경쟁 입찰을 붙이는 것이었다.
거래가 완료되면 판매수수료 0.1%와 세금 10%가 빠져나가고 통장으로 자동 입금됐다.
또한, 아이템이 판매되면 문자로 알려줘 언제 팔렸는지, 얼마에 팔렸는지도 바로바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종일 캡슐 속에 있어야 하는데, 이러면 근육이 줄어들어 몸이 약해질 수도 있겠네. 팔 병신 되지 않으려면 시간 날 때마다 운동해야겠다.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겠어. 말 나온 김에 지금하고 와야겠다.”
캡슐이 몸 상태를 최고로 유지해줘도 장시간 게임만 하면 근육을 쓰지 않아 몸이 약해졌다. 그리고 게임에서 강해진다고 현실에서도 강해지는 건 아니라서 운동은 필수였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원룸을 빠져나와 10분쯤 걷자 공원이 나왔다. 원룸으로 이사 온 지 2주일이 넘었지만, 먹고살기 바빠 공원에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곳에 원룸을 얻은 건 근처에 공원이 있어서였다. 근력 운동을 한다고 왼팔이 정상으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꾸준히 운동해야 지금의 근력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리와 오른팔 근육까지 약해지면 그땐 진짜 팔 병신으로 살아야 할 수도 있어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어! 저 여자애 아까 학교에서 봤던 정윤희 닮은 여자애네. 이 근처 사나?’
공원에 도착하자 정윤희를 빼다 박은 예쁜 여학생이 헐렁한 체육복에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트랙을 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헐렁한 옷과 모자에 몸매와 얼굴이 가려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뜀박질을 아주 잘해 쳐다본 것뿐이다.
그러나 한 번 눈여겨본 상대는 누군지 기억해내는 훈련을 수도 없이 반복해 여학생이 누군지 금세 알아차렸다.
배우 정윤희를 닮은 여학생은 신장 172~173cm, 날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 눈처럼 하얀 피부, 유난히 반짝이는 커다란 눈, 앵두 같은 입술, 오뚝한 코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균형 잡힌 몸매와 하얀 피부의 목을 보는 순간 어디선가 본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트랙을 돌다 내 앞에 오자 모자에 가린 옆모습이 살짝 보여 강의실에서 본 정윤희 닮은 여학생이란 걸 알아봤다.
미인과 같이 운동하는 건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지만, 아는 체해봐야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거고, 관심도 두지 않을 게 확실해 눈길을 거두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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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어보신 후 작품서평란에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난번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지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