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 / 0310 ----------------------------------------------
영지
11.
“나는 중학교 때까지 풍족한 집에서 살았어. 그렇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밥을 굶었다는 말은 아니야. 부모가 떠나며 고등학교 때부터 먹고 사는 걸 모두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해 힘들었지만, 굶어 죽을 만큼 가난하진 않았어. 그러나 배고픔이 무엇인지, 희망 없는 삶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내가 이들에게 현대인과 같은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가축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진 않아.”
“좋은 생각이세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예요.”
“노력해야지.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아질 거야.”
“모모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고마워.”
영주성을 빠져나와 농노들이 사는 마을과 평민들이 사는 마을을 둘러봤다. 다니엘 집사가 말을 대령했지만, 특전사도 승마를 가르쳐주진 않아 두 발로 걸어 다녀야 했다.
전날 비가 왔는지 진창으로 변한 흙바닥 길은 오물까지 뒤범벅이 돼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아란이 준 멋진 검은 부츠에 오물이 가득 묻었지만, 피할 곳이 없어 발목까지 빠지는 오물 진창을 묵묵히 걸어야 했다.
푹푹 빠지는 진창과 악취에 짜증이 났지만, 가는 곳마다 헐벗은 농노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진창에 머리를 박고 조아려대 신발에 오물이 묻었다고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런 기습적인 시찰은 돌아다니는 사람도 불편했지만, 일하다 말고 뛰어나와 진창에 머리를 박아야 하는 농노들은 더욱 불편했다.
그러나 내 눈으로 영지의 실상을 확인해야 사정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있어 영주성 인근에 있는 시설물은 빠짐없이 돌아보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클린.”
“마법도 사용할 수 있어?”
“네.”
아란이 짧게 마법 주문을 외우자 몸에 묻어있던 진흙과 오물, 분뇨가 냄새와 함께 깨끗이 사라졌다.
“일주일 후에는 무조건 돌아가야 하는 거야?”
“네.”
“더 있을 수는 없어?”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정한 규칙이 아니에요. 환인님이 정한 규칙이라 어길 수 없어요.”
일곱 가지 혜택에 관한 내용을 듣고, 저주받은 스켈레톤과 듀라한 쿠티티르를 사냥하고 영지까지 돌아보자 8시간이 흘렀다.
아란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 168시간밖에 안 됐다. 현실 시간으로 하면 42시간으로 이틀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안에 영주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배우는 건 불가능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란을 평생 옆에 두고 많은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란은 NPC가 아닌 이벤트 도우미로 내가 영주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게 임무였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배려로 슈퍼에고 컴퓨터 환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욕심이 생겼다.
아란에게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조언도 구하고 싶어서 옆에 있으면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건 아란을 보고 있으면 유모와 떠나간 여자 친구 생각이 나서였다. 진짜 엄마보다 더 엄마 같던 유모는 남편과 자식을 사고로 잃은 가여운 분이셨다.
사고 1년 후 핏덩이인 나를 품에 안은 유모는 내가 엄마라 부르며 따르자 죽은 자식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는지 친자식 이상으로 아껴주셨다.
내가 집에 있기 싫어 칭얼대고 울면 잠들 때까지 등에 업고 동네를 도셨고, 해가 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아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자기 자식이 그래도 귀찮고 짜증나는 일인데도 유모는 언제나 나를 사랑으로 감싸줬다.
그런 유모가 갑자기 사라지자 진짜 엄마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어 평생 처음으로 부모에게 대들며 유모를 돌려달라고 화냈다.
그러나 자식을 자식으로 보지 않는 부모는 콧방귀를 뀌며 내 얘기를 들은 척도 안 했다.
어떻게든 유모를 찾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대 있을 때 유모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이름만 알뿐 어디에 살았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친척은 있는지 아는 것이 없어 결국 찾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난 첫사랑 은하를 만날 때까지 가깝게 지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밥 먹었냐는 일상적인 말조차 묻지 않는 부모는 서로 얼굴만 마주쳐도 싸웠고, 그 화를 가정부 아줌마에게 풀어대 10명 중 9명은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수시로 바뀌어 친해질 겨를도 없었다.
같은 반 친구들도 강남 8학군이라 학교가 끝나면 밤 10시 넘게까지 이 학원 저 학원 끌려다녀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모 같지 않은 부모는 내가 공부를 못하면 자기들 얼굴에 먹칠한다고 생각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밤늦게까지 학원에 보냈고, 주말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을 돌렸다.
혼자 살게 된 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이때부터는 아르바이트에 쫓겨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이외에는 반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초 내 인생의 첫사랑이자 첫 여자인 은하를 만났다. 고작 6개월 밖에 사귀지 못했지만, 은하는 유모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였다. 그래서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란 나이는 사랑하기에는 너무 빠른 나이였는지 첫 사랑은 아픈 기억만 남기고 사라졌다.
[스태미나가 10 남았습니다. 스태미나가 0이 되면 생명력이 줄어듭니다. 음식물을 섭취하고 휴식을 취하십시오.]
집무실에 앉아 다니엘이 가져온 영지에 관련된 서류들을 뒤적이고 있자 경고 메시지가 떴다.
The Age of Hero는 장시간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스태미나가 0이 됐고, 계속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력이 줄어들어 죽게 된다.
죽는다고 캐릭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죽을 때마다 스탯과 생명력, 마나가 10%씩 영구히 사라졌고, 24시간 동안 능력치도 50%나 감소했다.
또한, 죽게 되면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 중 1개를 무조건 바닥에 떨어뜨려 유저들은 죽는 걸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이를 악용해 전문적으로 사람들을 죽여 아이템을 빼앗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인자가 되면 최소 30일간 도시와 성에 출입할 수 없었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현상금까지 걸려 현상금 사냥꾼의 추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다른 유저의 아이템을 뺏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유저는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갔다.
빼앗은 물건을 팔아주고, 먹을 것과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주는 일당이 있기 때문으로 전문적으로 아이템을 강탈하는 길드도 있었다.
그리고 대형 길드 중에는 PK를 유도해 길드가 없는 유저의 아이템을 강탈하는 일도 잦았다.
“아란, 배고픈데 어떻게 해야 하지?”
“시녀를 불러 음식을 내오라고 하세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괜찮을까?”
벽시계를 바라보자 저녁 10시가 넘었다. 밤 10시에 밥 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모모님은 레오 영지의 주인이세요. 레오 영지에 있는 것은 모두 모모님의 것이에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영주답게 행동하세요.”
“알았어.”
딸랑딸랑
아란의 말에 힘을 얻어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종을 흔들자 앳돼 보이는 시녀가 메이드 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일부러 그렇게 디자인한 것인지 메이드 복은 가슴이 깊게 파여 있어 봉긋한 가슴이 일부 드러났고, 치마도 매우 짧아 하얀 허벅지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런 복장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자 가슴이 절반 넘게 보였고, 치마도 더욱 짧아져 등 너머로 하얀 팬티까지 보였다.
“여.영주님께 추.충성을! 피.필요한 게 이.있으세요?”
“배가 고픈데 음식 좀 먹을 수 있을까?”
“그.그럼요. 그.그런데 바.바로는 어렵고, 30분은 기다리셔야 해요.”
“30분?”
“2. 20분 이내로 준비하겠습니다. 그.그러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달라니 무슨 말이야?”
“존귀하신 영주님을 20분이나 기다리게 해서 그렇습니다.”
“음식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저.전임 영주 대리였던 조르주 준 남작님은 음식을 바로 내오지 않으면 시녀와 요리사를 때리셨어요.”
“미친놈.”
전임 대리 영주 조르주 준 남작처럼 음식을 바로 가져오지 않았다고 내가 때릴까 봐 어린 시녀가 겁이 잔뜩 질려 바들바들 떨며 잘못을 빌었다.
어제까지 이곳은 황제 직영지로 황제가 파견한 조르주 준 남작이 책임자였다. 조르주 준 남작은 3년 동안 영지에 머물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녀와 일꾼을 두들겨 팼고, 심할 때는 때려서 죽이기도 했다.
또한, 시녀들을 20명도 넘게 건드려 애도 12명이나 낳는 등 농노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루다가 어제 수도 크라쿠푸스로 훌쩍 떠났다.
애를 12명이나 싸질러 놓고 달아나면 서울에선 엄청난 문제가 됐지만, The Age of Hero는 봉건사회라 농노를 건드리는 건 문제가 안 됐다.
오늘부터는 내 재산이라 내 허락 없어 건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어제까지는 황제의 것으로 전권을 위임받은 조르주 준 남작이 어떻게 다루든 관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귀족이 농노와 노예 여자를 건드려 애를 낳는 일은 흔해도 너무 흔해 이야깃거리도 안 됐고, 농노는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남의 농노를 건드려 애를 낳았다고 해도 재산상의 불이익을 준 것밖에 안 돼 돈 몇 푼 쥐어주면 그걸로 끝이었다.
결국, 놈에게 버림받은 아이들만 불쌍한 게 된 것으로 귀족과 농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귀족이 거두지 않는 한 모두 농노로 살아야 했다.
재미있는 건 조르주 준 남작에게 몸을 뺏긴 20명의 여성 중 절반은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몸을 바쳤다.
이들은 조르주가 자신들을 수도 크라쿠푸스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말에 몸을 허락했고... 하기 싫어도 시키면 해야 하는 처지지만... 아이까지 낳으며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이와 함께 모두 영지에 버려졌다. 귀족은 혈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농노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귀족 마누라와 첩이 자식을 낳지 못해 대가 끊어지는 경우로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농노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을 정실이 입양해 대를 잇게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농노에서 태어난 귀족의 씨는 100% 농노가 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천천히 해도 되니까 준비되면 말해.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로 때리는 일 없으니까 겁먹지 말고.”
“저.정말요?”
“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름이 뭐야?”
“레이첼이요.”
“나이는?”
“20살이요.”
이름 : 레이첼
나이 : 20살
종족 : NPC
계급 : 농노
직책 : 시녀
특기 : 시중 및 청소
충성심 : 33
성격 : 순종적이며 쾌활함
근력 1 순발력 1 체력 2 지력 2
유저인 인간과 달리 NPC는 노동과 훈련, 사냥을 통해 스탯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상용화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NPC의 수준이 유저보다 월등히 앞섰다.
특히, 수도와 10대 도시, 공작령, 후작령, 백작령 등 규모가 큰 도시와 성의 기사와 영주는 최상급 유저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전투력을 보유해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다.
이로 인해 3년이 지난 지금도 영주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아 3주년 이벤트로 영주를 선발하게 됐다.
영주성에서 일하는 시녀는 50명이 넘었다. 절반은 주방과 빨래를 담당하는 여성들로 조르주 준 남작이 있을 때부터 일하던 나이 많은 여성들이었고, 침실과 욕실, 집무실을 청소하며 시중드는 여성 23명은 오늘 아침 새롭게 선발한 젊은 시녀들이었다.
젊은 시녀들은 나이가 20살에서 25살 사이로 전에 청소하고 시중들던 시녀들은 조르주 준 남작이 모두 건드려 집으로 돌려보냈다.
중세 시대에는 15~16세부터는 성인 여자로 취급해 시집가 애 낳는 일이 아주 흔했다.
중세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The Age of Hero도 이를 따라야 했지만, 아동·청소년 보호법에 걸려 20세 미만은 성행위를 할 수 없어 성적 학대에 시달렸던 시녀는 20살부터 선발하게 했다.
재미있는 건 선발된 시녀들이 모두 인물이 반반하고 몸매가 아주 예술이라는 것이었다.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하며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여자 농노가 S라인 몸매에 얼굴도 예쁘고 피부까지 곱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로 유저들의 욕망을 슈퍼에고 컴퓨터 환인이 채워주기 위해 그런 것으로 게임이 아니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글을 읽어보신 후 작품서평란에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난번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지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