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의 시대-2화 (2/320)

0002 / 0310 ----------------------------------------------

행운

2.

“성우야, 너 The Age of Hero에 있는 가상 강의실 가봤어?”

“네. 학교 합격하고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몇 번 가봤어요. 형은 아직 안 가보셨어요?”

“아르바이트하느라 시간이 없었어.”

“캐릭터는 만드셨어요?”

“어.”

“직업이 뭔데요?”

“직업도 있어?”

“직업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사용하는 주문과 무기에 따라 전사, 기사, 마법사, 도적, 궁수 등으로 나뉘어요.”

“제대하고 바빠서 캐릭터만 만들고 아직 못 해봤어.”

“가상현실 게임 학과에 지원하신 분이 The Age of Hero를 캐릭터만 만들어 놓고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게 말이다.”

제대하고 곧바로 어깨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하며 입시공부를 병행해 게임을 할 시간이 없었다.

재활치료가 끝나자 낮에는 입시학원을 다녔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해 1분 1초도 한눈팔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두 달 전 고등학교 친구가 술 한 잔 사주고 억지로 잡아끌어 엉겁결에 캡슐 게임방에 들어가 캐릭터는 만들었다.

그러나 캡슐에 들어가 캐릭터를 생성하고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아까운 게임비만 잔뜩 물고 나와 내가 만든 캐릭터가 어떤 이름인지도 몰랐다.

“형 게임 규칙은 아세요?”

“TV와 잡지에서 봤어.”

“책과 TV로 보는 것은 직접 해보는 것과 차이가 아주 커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겠지.”

성우 말이 맞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번 보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했고, 백번 보는 것은 한 번 해보는 것보다 못했다.

군대에서 똑같은 훈련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 이 때문으로 머리로 아는 것은 사고가 터졌을 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고, 심할 경우 움직이지도 못해 몸이 알아서 움직이도록 채득할 때까지 훈련하는 것이었다.

“형, 저랑 학교 앞에 있는 캡슐 게임방에 같이 가실래요? 저도 The Age of Hero 시작한 지 6개월밖에 안 돼 아는 게 많진 않지만, 기본적인 건 알려드릴 수 있어요.”

“고맙지만, 다음에 알려줘. 지금은 아르바이트 가야 해서 안 되겠다.”

“무슨 아르바이트 하시는데요?”

“야간에 할 수 있는 게 뻔하잖아.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있어.”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The Age of Hero에서 앵벌이 하는 게 훨씬 돈 많이 벌어요. 고급 아이템 하나만 주워도 최소 100만 원이에요.”

“100만 원?”

“고급템이 자주 나오는 건 아니지만, 재료템만 팔아도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단 100배 낫죠. 그런데 캡슐은 있으세요?”

“없어.”

“그러면 요금 때문에 어렵겠네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 많이 번다는 성우의 말에 솔깃했다. 시간당 8,000원 하는 아르바이트론 하루에 많이 벌어도 5~6만 원이 한계였다.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면 160~170만 원을 벌 수 있어 먹고 살 순 있지만, 학비를 마련하려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육체노동을 하기에는 왼팔이 따라주질 않아 구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게임에서 어떻게 앵벌이를 해? 앵벌이면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는 거잖아.”

“게임에선 몬스터를 잡아 돈 버는 걸 앵벌이라고 해요. 형 정말 게임 안 해봤어요? 어떻게 앵벌이를 모를 수가 있어요.”

“해볼 시간이 없었어.”

“게임도 안 해보고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에 지원하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XX대학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를 지원한 건 불편한 왼팔을 쓰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 때문이었다.

가상현실 공간은 우리가 꿈꾸던 일, 바라던 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기사와 전사가 되어 몬스터를 때려잡고, 화염구와 얼음송곳을 날리며 하늘을 나는 마법사가 되는 것은 기본이었고, 현실처럼 먹고 마시며 쇼핑하고 수다를 떠는 일까지 가능했다.

움직임은 물론 미세한 감정까지 그대로 표현할 수 있어 연애와 격렬한 섹스, 알콩달콩한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또한, The Age of Hero 공간 내에선 몸이 불편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정상인과 똑같이 움직이며 일할 수 있었고, 노인도 나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남녀노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현실과 시간 차이가 4:1로 실제 시간보다 4배나 많은 시간을 현실처럼 사용할 수 있어 사람들을 더욱 열광케 했다.

이런 놀라운 일을 누구나 할 수 있자 오픈한 지 1년 만에 1억 5,000만 명이 넘는 유저를 끌어 모았다.

그러자 관공서와 학교, 은행, 백화점, 쇼핑몰, 대기업들까지 가상현실 공간에 사무실을 차렸다.

덕분에 관공서에 가지 않아도 The Age of Hero에 접속하면 원하는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은행 역시 현금을 찾는 것 빼고는 빠르게 업무를 볼 수 있었다.

백화점과 쇼핑몰은 Eye Contact만으로 옷을 입어보고, 신발을 신어볼 수 있는 등 현실에선 번거로운 일도 1~2초면 가능했다.

기업 역시 업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고, 대학도 꿈에 그리던 멋진 캠퍼스와 강의실을 만들 수 있어 오픈한 지 3년도 안 돼 세계적인 대기업과 대학들이 The Age of Hero에 건물을 짓고 간판을 내걸었다.

이 때문에 현실 세계보다 가상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며 나 같이 육체가 불편한 사람도 벌어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를 지원하게 됐다.

“The Age of Hero에서 돈 버는 게 쉬워?”

“처음에는 어렵지만, 빵빵한 장비만 있다면 얼마든지 벌 수 있어요.”

“너는 얼마나 버는데?”

“지난주에만 50만 원 넘게 벌었어요. 장비가 워낙에 구려 장비 맞추느라 지금은 돈이 더 들지만, 장비를 고급아이템으로 다 맞추면 한 달에 300~400만 원은 벌 수 있어요.”

“300~400만 원. 그렇게 많이 벌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게임 채널 보면 빌딩 산 사람도 나와요.”

“게임해서 건물을 사?”

“오픈할 때 시작한 초창기 유저들 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강만두라고 아주 유명한 유저 있는데, 그 사람 이태원에 10층짜리 건물도 샀어요.”

“멋지네.”

“그러니 형님도 아르바이트 때려치우고 캡슐 사서 앵벌이 하세요. 어차피 공부하려면 캡슐은 있어야 하잖아요. 그걸로 학비도 벌고 스트레스도 풀고 좋잖아요.”

“캡슐은 얼마나 하는데?”

“보급형이 3,000만 원 정도하고, 고급형이 5,000만 원, 최고급 사양은 1억 원도 넘는다고 들었어요.”

“1억?”

The Age of Hero에 접속하기 위해선 컴퓨터가 아닌 캡슐이 필요했다. 캡슐은 영화 아바타(Avatar)에서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 나비(Na’vi) 인간에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하는 장치와 아주 흡사한 모습으로 전용 캡슐을 통해서만 The Age of Hero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 나처럼 가난한 사람은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The Age of Hero 전용 캡슐 게임방이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이곳도 캡슐 가격이 워낙 비싸 시간당 5,000원, 비싼 곳은 10,000원이 넘어 가난한 영세민은 가볼 엄두도 못 냈다.

“그러면 다음 주 수도 크라쿠푸스에서 봬요.”

“조심해서 들어가.”

“형님도 고생하세요.”

“그래.”

성우와 헤어지고 학교 도서관에 들러 The Age of Hero에 관한 자료를 찾은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성우에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가야 해 캡슐 게임방에 갈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게임비가 너무 비싸 아르바이트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어제저녁 30대 초반의 젊은 편의점 사장이 아르바이트생을 여고생으로 바꾼다며 그만 나오라고 해 오늘부터 백수였다.

전날 예쁜 여학생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오자 어떻게 해볼 생각으로 나를 자른 것이었다.

일을 못 해서 잘린 게 아니라서 억울했지만, 사장이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둬야 하는 게 아르바이트 운명이라 아무 말 않고 조용히 가게를 나왔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팔이 이래서 힘쓰는 일을 할 수가 없으니 큰일이네. 성우 말처럼 캡슐 한 대 사서 그걸로 앵벌이나 할까? 하긴 수업 들으려면 한 대 있긴 있어야 하는데, 가장 싼 것도 3,000만 원이 넘으니...”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 나오면 몸으로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말에 선택했는데, 목돈이 들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어깨를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쪼들리진 않았을 텐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팔 병신이 돼 쫓겨난 군대를 생각하자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직업군인을 선택한 건 5년 동안 복무하면 대학 나올 학비는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10kg도 들기 힘든 나약한 팔과 조국이라 믿었던 나라가 사실은 국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쓰다 버리는 부품이자 노예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 1학년 부모님이 이혼하며 그때부터 쭉 혼자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지도 않지만... 둘 다 잘 나가는 현직 대학교수였다.

부모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명문대 교수로 학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나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 머리는 좋았는지 3년 만에 나란히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연구원으로 있다가 30대 중반에 현재 재직 중인 XX대학교에서 교수로 초빙해 국내로 돌아왔다.

최연소라고 해도 될 만큼 어린 나이에 나란히 명문대 교수에 임용되자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등 유명인이었다.

그렇게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잉꼬부부는 부와 명성을 얻자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급기야 양쪽 모두 외박과 출장이 잦아지더니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별거에 들어갔다.

사람들 눈 때문에 3년 동안 별거한 부모는 충분한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남남으로 갈라섰다.

밖에서 보기엔 아주 쿨한 이혼이었지만, 별거하는 동안 만나기만 하면 재산문제로 싸우며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내게 너무나도 많이 보여준 진상이었다.

이혼 후 어머니는 3개월도 안 돼 돈 많은 사학 재벌과 재혼했고, 아버지도 5개월 후 자신의 제자였던 돈 많은 재벌 이혼녀와 재혼했다.

그렇게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서류에는 부모가 있지만, 실질적으론 부모가 없는 고아로 살게 됐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낡은 18평 아파트 한 채를 내 명의로 해줘 살게 했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각각 30만 원씩 생활비도 대줬다.

그러나 그게 전부로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알아서 살라는 냉정한 말을 남긴 채 남남처럼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하루아침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나는 밥 해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공과금도 내가 직접 내야 하는 등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됐다.

고등학교 1학년이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혼자서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이로 아직은 부모의 손이 필요한 나이었다.

그러나 나는 괜찮았다. 나를 낳은 건 부모가 맞지만, 나를 기른 건 유모로 부모의 정을 느껴보지 못해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산부인과를 나와 곧바로 유모 손에 맡겨진 나는 유치원도 유모 손을 잡고 다녔고, 학교에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 손 대신 유모 손을 잡고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그것도 사치였는지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하자 유모마저 쫓겨나 가정부 아줌마가 차려준 밥을 혼자 먹어야 했다.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은 부모가 유명한 교수라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부모가 교수인 게 자랑스럽지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번 잠시 스치듯 얼굴을 보는 부모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항상 바빠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방에 들어가거나 가방을 챙겨 휑하니 나갔고, 어쩌다 집에 있으면 술에 취해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감사한 것으로 술에 취하면 소리소리 지르며 물건을 집어 던지며 싸우는 모습만 보여줬다.

내가 부모에게 바란 것은 멋진 선물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같이 여행 다니며 맛난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다 같이 모여 밥 한 끼 먹는 것, 대화 없이 TV만 봐도 온 가족이 모여 밥 먹는 거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치였는지 내 생일날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잦아 유모와 단 둘이 촛불을 꺼야 했다.

그리고 유모가 사라진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론 가정부가 가져다준 케이크를 혼자 조용히 먹는 것으로 생일을 대신해야 했다.

그렇게 삭막한 어린 시절을 보내자 아버지가 집을 나갔을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고, 허름한 아파트 한 채를 대단한 선물인 것처럼 안겨주고 떠날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라곤 온통 나쁜 것밖에 없는데, 눈물이 날래야 날 수도 없었고,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이 커 잘됐다는 생각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