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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신-178화 (178/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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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오늘의 마지막 씬이 바뀌었다.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났고, 배우들이 모두 남아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따라 스태프들은 수술 장면이 끝나는 즉시 복도와 휴게실로 장비를 나눠 옮겼다.

카메라가 여러 대 동원된 풍족한 제작 환경이었기에 장소 이동이 있더라도 끊지 않고 촬영하는 것이 가능했다.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롱테이크 촬영은 일견 배우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주위에 배치된 카메라 구도를 계산에 넣고 NG 없이 연기를 펼쳐야 했기에 경우에 따라선 더 고난도의 연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점을 감안한 앤 로버츠가 물었다.

“아무리 도원이라도 계속된 촬영으로 지친 상태에서, 십 분에 이르는 롱테이크 촬영은 무리 아닐까요?”

“아니.”

제임스 윌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도원이라면 가능해. 난 그를 보며 현장을 완전히 꿰고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했네.”

이는 감독이 배우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깜짝 놀라서 눈을 치켜뜨고 있는 앤 로버츠를 보며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빙그레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카메라 뒤에 있는 것처럼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정확히 알고 있지.”

“촬영 경험이 쌓일수록 저절로 짐작할 수 있다지만… 연기 경험도 부족하고 연출도 경험도 없는 이십 대의 젊은 배우가 그걸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 건가요?”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지. 하지만 상식이란 언젠가 깨지는 법이야.”

“현장을 꿰고 있는 배우…….”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중얼거린 앤 로버츠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시선을 좇아 이도원을 바라보았다.

한편 정작 당사자인 이도원은 두 사람의 감격스러운 심경을 전혀 모르는 표정으로 대본에 몰두하고 있었다.

‘현장을 내 집처럼 만들어야 돼.’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장비가 세팅돼 있는 현장을 슥 보았다. 복도에서 휴게실 안까지 배치된 카메라 위치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눈을 감고도 수십 년 동안 살았던 집안 구조를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았다.

‘다음은 내 감각을 믿는다.’

대본을 숙지하고 동선을 짜두었다. 또한 촬영 장비의 위치를 각인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자신을 믿고 편안하게 연기하는 일뿐이었다.

“후…….”

이도원은 날숨을 길게 내뱉으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맥주 거품을 부드럽게 걸러내듯 넘치는 긴장을 덜고 현장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적당한 긴장과 두려움은 감정이 급격히 오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때마침 스태프가 모두 자리를 잡자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이도원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준비됐나?”

이도원은 집중력이 깨질 것 같아 대답하지 않았다.

바짝 열이 오른 그 표정을 바라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그의 상태를 단번에 눈치채고 자리로 돌아갔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레디.”

각 분야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신호로 지시가 떨어졌다.

“액션!”

이도원이 수술복을 벗으며 수술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에는 메이슨 카메론이 심각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어두운 표정을 마주한 이도원은 눈가를 움찔 떨었다.

“설마…….”

메이슨 카메론은 어떤 한동안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를 응시하던 이도원의 눈가에 격랑(激浪)이 일었다. 순식간에 수막이 씌며 붉게 충혈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동공도 바르르 떨렸다.

‘어떻게 저런 연기가…….’

메이슨 카메론은 소름이 좍 끼쳤다.

이도원의 눈에서 시작된 파동이 얼굴 전체로 번져 가고 있었다. 석고상처럼 딱딱했던 표정이 점차 흔들렸다. 그리고 마치 들키지 않으려는 듯, 손바닥을 펼쳐 눈을 가리며 물었다.

“방법이… 없었던 겁니까?”

납덩이같은 한마디를 듣는 순간 메이슨 카메론은 심장이 내려앉으며 상황에 빨려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이도원의 연기력에 감탄해 딴 생각을 했는데, 대사를 접하자 단단히 붙잡힌 듯 꼼짝없이 감정이입이 돼버린 것이다.

감정 전이가 이루어지자 메이슨 카메론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돼서 유감입니다.”

상대방을 강제로 몰입시킨 이도원이 감정을 고스란히 이어가며 손을 뻗었다. 그는 메이슨 카메론이 더 이상 입을 여는 것을 제지하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먼저 실례하죠.”

메이슨 카메론은 슬픔에 떠밀린 것처럼 비켜섰다.

그를 지나친 이도원이 휴게실로 향했다. 중간중간 병원 유니폼을 입은 보조 출연자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원은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복도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에 표정이 드러나도록 신경을 썼다.

‘카메라가 감각 안에 들어온다.’

어디서 어떤 구도로 촬영하고 있는지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카메라가 신경 쓰여 자칫 신경이 분산될 법도 한데, 몰입도가 하나의 큰 물줄기를 이룬 것처럼 흐름에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간단한 일 같지만 아무나 보여줄 수 없는 능력이었다.

‘대단해.’

스태프들은 별도로 지시하지 않아도 동선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이도원에게 소리 없는 성원을 보내며 열광했다. 스태프들의 구미를 척척 맞추는 배우의 존재는 촬영의 흥을 돋웠다. 이처럼 스태프들의 진지한 표정과 눈빛에서 나오는 열정을 읽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심장박동이 속도를 더해가는 것을 느꼈다.

‘배우들에 이어 스태프들마저 홀려 버렸어.’

그 순간.

휴게실 문 앞에 도착한 이도원이 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좋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은 이런 세심한 표현을 미처 볼 수 없었지만 모니터를 통해 현장을 바라보는 제임스 윌리스 감독과 앤 로버츠만은 달랐다. 그들은 이도원의 연기를 작은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괴물이야.’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공통된 생각을 했다.

반면 수술실에서 막 나온 올리비아 왓슨이 이도원의 연기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도원을 지켜보고 있는 메이슨 카메론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메이슨 카메론이 고개를 젓자 올리비아 왓슨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신 확인도 안 하네요…….”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대답한 메이슨 카메론도 한숨지었다.

그는 자신의 연기를 하면서도 이도원이 뿜어내던 카리스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교하게 절제된 연기로 어떻게 그런 파워를 보이지?’

그는 지금껏 자부심을 갖고 걸어왔던 연기 경력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대신 이도원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자존심을 굽히고 같은 배우로서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한편 또 한 명의 주역인 윌리엄 잭슨은 밖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휴게실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왜 안 와?’

윌리엄 잭슨이 긴장감으로 차가워진 손발을 비비며 입술을 축였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도원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야?”

윌리엄 잭슨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하지만 상대역인 이도원은 돌발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연기했다. 거센 파도에 조약돌을 던진다고 지장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무엇도 그의 연기 흐름을 방해할 수 없었다.

“흡.”

이도원이 거친 호흡을 붙잡으려 애쓰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신이 번쩍 든 윌리엄 잭슨이 대본으로 돌아가 대사를 쳤다.

“자네, 설마…….”

윌리엄 잭슨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네.”

그 말을 남긴 채 휴게실로 나간 그가 문을 닫고 엄지로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다들 저거 봤나?

휴게실 밖에 있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피식 웃었다.

반면 제임스 윌리스 감독과 앤 로버츠는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롱 테이크 촬영 동안 각각 나눠진 모니터를 통해 여러 장면들이 퍼즐처럼 완성돼 왔다. 그리고 지금, 이도원이 이번 롱테이크 씬의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정점이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이도원의 눈가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항상 역 팔(八)자를 그렸던 눈썹은 팔자로 떨어졌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사고를 겪고 불안정한 눈빛으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빠진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옹기종기 모니터 앞에 모여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숨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 도원이 오열하는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거기서 시간이 조금 흐르자 몇몇 여성 스태프들은 촉촉하게 젖어든 눈가를 훔쳤다. 그중에는 앤 로버츠도 있었다.

‘맙소사……!’

도저히 연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히 연기인데, 연기가 아니었다.

‘분명 가족을 잃어봤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런 연기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지금은 가족 모두가 잘 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깊은 감정의 출처 역시 경험이 아니었다. 오열을 그친 이도원은 전신이 얼얼해진 느낌으로 생각했다.

‘굉장해.’

그 전에도 인물에 완전히 몰입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뼛속까지 동질감이 든 건 처음이었다.

‘왜지?’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일으켰다.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선뜻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멍한 표정의 그를 보며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말했다.

“훌륭한 연기였네, 오케이.”

배우들과 스태프들 역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이도원만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전과 뭐가 달라졌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했다.

타임 슬립 전과 후를 비교하기도 했다.

왔던 길, 무수한 발자국을 되짚어 걷다보니 앞만 봐서 살피지 못했던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놓쳤던 감정들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 결과, 연기의 밀도가 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대사가 없던 <서커스>를 통해 무언극을 했던 시절의 감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감각을 되찾았다.’

몸이 떨려왔다.

먼 길을 돌아온 기분이었다.

새로 얻은 삶에서 소리를 낼 수 없던 시절의 수준까지 체득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히려 집중력이나 연기력 면에서 소리를 잃고 난 뒤 큰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전화위복.’

이도원은 주먹을 굳게 쥐며 미소 띠었다.

*

시청률 8%대로 기존에도 드라마 순위 1위를 굳건하게 지키며 큰 인기를 끌었던 메디컬 드라마 <하트펑션>은 15부작이었다. 그리고 이도원이 나온 10부를 기점으로 시청률은 1%나 더 상승했다. 그가 주인공의 라이벌이자 새로운 등장인물인 ‘로건 리’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했다는 평과 함께, 슬슬 하락세였던 <하트펑션>에 대한 흥미를 증폭시켰다는 세간의 평이 자자했다. 이미 ‘로건 리’ 캐릭터가 시즌2의 핵심 인물로 출연할 예정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다.

잡지를 내려놓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안경 너머로 루머의 주인공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하트펑션>의 팬들은 자네를 원해. 시즌2에도 출연해 주는 게 어떻겠나? 방송국으로부터 출연료를 세 배로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네.”

마주앉은 이도원은 커피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곧 감독님과 영화 촬영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동안 너무 달려와서, 촬영이 끝나면 휴식 기간을 가질 생각입니다.”

“지금껏 꾸준히 일을 하다가 왜 하필 나랑 작업을 하는 시점에 휴식 기간을 가진단 말이야?”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고 시즌2 작업에 함께해 주게. 이미 정해진 영화 출연료도 제작사에 말해서 대폭 수정해 주겠네. 자네의 휴식이 이쪽 바닥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어.”

“그럴 리가요?”

이도원이 난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번 상의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당부했다.

“모쪼록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겠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자네가 이 바닥에서 보기 힘든 보물이란 것만은 확실해. 함께 작업하기 전에 품었던 기대를 곱절은 더해서 돌려주는 배우라니… 어찌 탐나지 않겠나?”

============================ 작품 후기 ============================

연재 시간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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