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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시선만으로 주위를 사로잡은 이도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정의 동요를 들키지 않도록 철저히 감춘 모습이었다.
“가족을 직접 수술할 수는 없어. 동생아, 네 수술을 집도할 칼 케이지는 나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동생 역할의 단역 배우는 불안한 눈빛과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도원은 다시 한 번 느꼈다. 미국에서 촬영하며 든 생각은 한국과 비교했을 때 단역이나 보조출연자들의 열정이나 연기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단역이나 보조출연 출연료만으로 생계유지가 힘든 한국과 달리, 미국은 넉넉하진 않아도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는 것이 ‘취미’와 ‘직업’으로서 차이점을 발생시켰다.
‘확실히 개선돼야 할 점이야.’
이도원은 매번 그런 판단을 했지만 딱히 해결책이 떠오르진 않았다. 생계유지 여부가 다를 뿐 미국이나 한국이나 주역과 단역의 출연료 차이가 큰 것은 같았고, 애초부터 시장규모가 달라서 발생하는 문제점이었기 때문이다.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사인이 들려왔다.
“오케이 컷. 다음 바로 수술 장면 가겠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수술 장면은 영어로 구사해야 하는 대사도 어려웠을 뿐더러 메디컬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밀착 촬영을 하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력에 따라 장면 자체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이도원을 불러다 놓고 확인했다.
“한국에서도 메디컬 드라마를 촬영한 적은 없더군.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야. 간접적으로 보고 듣는 것과, 직접 연기하는 건 차이가 있으니까. 촬영까지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준비는 다 됐나? 원한다면 촬영 순서를 메이슨의 수술 장면과 바꿀 수 있네.”
그에 이도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준비는 항상 부족한 법이죠. 하지만 그간 준비한 것들로 해보겠습니다.”
“…좋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다 버리진 못하고 대답했다. 그는 한편으로 메이슨 카메론을 언제든 투입할 수 있도록 대기시켰다. 순서를 바꾸는 경우까지 대비한 것이다.
“어차피 남아서 지켜볼 생각이었습니다.”
메이슨 카메론은 그렇게 말했다.
윌리엄 잭슨과 올리비아 왓슨 역시 남아서 촬영을 지켜보기로 한 듯, 자신의 분량이 끝났음에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 이도원이 보여줄 수술 장면이 기대되는 것이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흥미진진한 표정을 발견한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청자를 만나기도 전에 현장을 통째로 홀려버렸어. 단 몇 씬만에 모든 사람들이 도원이 보여줄 다음 장면을 기대하고 있다.’
이도원의 연기를 접한 그는 관객과 시청자들도 열광할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앤, 수술실로 옮겨서 세팅하게.”
제임스 윌리스의 지시를 받은 앤 로버츠가 스태프들에게 전달했다.
과연 여러 대의 장비가 동원되다 보니 촬영 일정도 여유롭게 진행됐다.
이도원은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현장을 보며 나직이 감탄했다. 금세 장비들이 옮겨지고 스태프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콘티를 들고 설명했다.
“대사 처리는 도원에게 맡길 생각이야. 단, 내가 원하는 톤의 연기는 의사다운 모습이네. 수술은 멋있게 하는 게 아니야. 섬세하고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작업이니만큼 멋져 보이기보다, 보는 사람조차 숨 막힐 정도로 치열해야 돼.”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 번 잘 살려보겠습니다.”
그는 스태프들이 장비 세팅을 마칠 동안 수술실 앞 복도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책 한 권을 올려두었다.
에릭 시걸의 <닥터스>라는 책으로, 하버드 의대생들의 치열한 사랑과 고뇌를 그린 작품이었다.
달라붙어 메이크업을 하던 스태프가 소설을 보고 물었다.
“<닥터스>는 저도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하지만 저긴 수술 장면이나 병원 이야기가 안 나오지 않나요?”
둘 다 메디컬 소재였지만 다소 드라마와 동떨어진 주제를 다룬 작품이었다.
제법 날카로운 지적을 받은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와 전혀 다른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발자취를 따라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정신과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친절한 설명을 들은 스태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좀 특이해서 여쭤봤어요. 보통 대본이나 의대에서 볼 법한 전문서적을 보고 계시거든요.”
어떤 방법이 더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도원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의학보다는 사람을 공부했다.
에릭 시걸의 <닥터스>나 로빈 쿡을 찾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자신이 맡은 ‘로건 리’라는 인물이 하버드대학교 의학과를 나왔다고 가정하고, 하버드 의대생들을 다룬 <닥터스>나 실제 하버드대학교 의학과 석사로서 많은 소설을 낸 로빈 쿡의 작품들을 모두 읽은 것이다.
그때, 주변을 기웃거리던 앤 로버츠가 끼어들며 물었다.
“저도 궁금하네요. 시간이 많이 촉박했잖아요. 전문의학을 공부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인물 자체를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지름길을 두고 돌아간 건 아닐까요?”
이도원은 그녀의 질문과 다른 의견을 펼쳤다.
“의사들이 실무를 볼 때 가지는 직업윤리는 교과서에 명시된 부분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앤 로버츠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도 기대할게요. 어떻게 다른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하네요.”
미소 띤 이도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근두근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내심 생각했다.
‘저도 기대됩니다.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무엇을 상상하든, 어떤 연습을 했든 배우가 연기를 끝내기 전까지, 모든 건 미지수였다.
*
“수술복이 잘 어울리는데요?”
앤 로버츠가 이도원을 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임스 윌리스가 대답했다.
“눈빛도 날카롭고 좋아. 이미 비주얼은 영락없는 흉부외과 전문의인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군.”
순간 한 여배우가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수술복을 입은 올리비아 왓슨이었다.
예정에 없는 출연에 화들짝 놀란 앤 로버츠가 물었다.
“그녀가 왜……?”
“내게 부탁을 해서 승낙했네.”
제임스 윌리스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도원과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더군.”
“연습은 충분히 된 건가요?”
“그녀는 드라마 촬영 동안 이미 반쯤 의사가 됐어. 대본상 환자의 예후를 확인하고 즉석에서 대사를 쓰더라고. 참여하는 작품마다 대본을 통째로 외우고, 직접 현장으로 찾아가서 사전 조사를 한다는 소문이 모두 진짜였어.”
“노력파라는 건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바로 즉석으로 투입해도 될 정도였단 말이죠?”
앤 로버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궁했다.
그에 머쓱하게 웃은 제임스 윌리스가 현장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직접 한 번 보라고.”
그는 앤이 더 이상 추궁할 새도 없이 막 바로 지시를 내렸다.
“롤 카메라. 레디, 액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이도원이 수술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위치에 서자 올리비아 왓슨이 능숙한 어조로 환자의 상태를 보고했다.
“환아는 2개월 된 남아로 COA(대동맥축착증), 그리고 ALCAPA(좌관상동맥이상기시증) 케이스입니다.”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귀에 쏙쏙 박혔다.
그녀를 응시한 이도원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상기시하는 좌관상동맥을 폐동맥에서 분리하여 관상동맥이 꺾이지 않도록 대동맥궁의 하면에 붙인다.”
다음으로 수술 장면이 이어졌다.
눈앞에 누워있는 환자는 인형으로 된 모형이었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실제 수술을 하는 의사처럼 대상에 몰입하여 섬세하게 매스를 놀렸다.
물론 그는 실제 수술 방법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대충 보고 어깨너머로 배운 순서대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 짧은 시간에 손동작을 외워왔다니…….’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슬슬 목이 타고 있었다. 기대감이 증폭되는 것과 비례해서 체내의 수분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이도원은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빛으로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가 짓는 표정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의사의 날것 그대로였다.
그 순간.
“블리딩(Bleeding : 출혈)입니다!”
올리비아 왓슨이 혈압 기계를 확인하며 급하게 외쳤다.
동시에 피가 튀자 이도원을 보조하는 어시스턴트들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때부터 이도원은 점점 더 집중력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손과 지시가 더욱 빨라지며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변함없는 표정에 대사 한마디 없었지만 극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움직임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블로드로스(Blood loss : 출혈로 빠져나간 혈액의 양)가 심해. 펙드 셀(Packed cell : 수혈용 혈액) 추가로 요청해.”
이도원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나직한 말투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며 수술에 임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어시스턴트 한 명이 수술 방을 빠져나갔다.
그를 힐끗 보던 올리비아 왓슨이 말했다.
“액티브 블리딩(Active bleeding : 두드러진 출혈)은 아니었어요. 굳이 펙트 셀을 요청할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을 위한 조치요. 앞으로도 길면 두 시간이나 수술을 진행해야 하는데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분명 필요할 겁니다. 부족한 것보다 넘치는 게 나아요.”
“다른 곳에서도 혈액이 필요할 수…….”
이도원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일축했다.
“환자의 안전을 담보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는 없습니다. 혈액이 부족해지면 그때 우리가 가진 혈액을 넘기면 될 일입니다.”
잠시 후 이도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말했다.
“수쳐(Suture : 봉합)하겠습니다.”
그는 수술이 끝난 것을 알림으로서 치달리던 흐름을 늦췄다. 잇따라 긴장이 풀린 올리비아 왓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무리하고 검사 진행한 뒤 보고하십시오.”
그 대사를 끝으로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컷!”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벙 찐 얼굴이었다.
이도원은 한 시도 환자에게 눈을 떼지 않고 표정변화 없이 수술을 했다. 그럼에도 긴장감이 그래프처럼 굴곡을 만들었던 것이다.
수술 장면의 경우, 배우들이 의사가 아닌데다 수술과정을 모두 연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여기에다 연출적인 효과를 입히면 몰입도를 더 높일 수 있을 터였다.
“훌륭하군.”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짧게 감탄했다.
스태프들은 이제 수술 방 전체를 잡으며 배우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풀 샷 촬영에 돌입했다. 그 외에도 클로즈업을 제외한 여러 구도를 추가로 확보했는데, 배우들은 서서 수술을 하는 시늉만 하면 되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배우들의 수술 연기를 돌려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모니터를 확인하며 앤 로버츠에게 말했다.
“어쩌면 이도원이 막바지 시청률의 변수가 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