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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그쪽이 새로 온다는 실력자입니까?”
해맑게 물은 윌리엄 잭슨이 힐끗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이곳의 법이 있어요. 당신도 제대로 적응하려면 우리 병원의 원칙을 따라야만 할 겁니다.”
이도원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로건 리입니다, 당신은?”
그는 물으며 윌리엄 잭슨의 명찰을 보았다.
시선을 향해있는 곳을 확인한 윌리엄 잭슨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제이콥 하디입니다. 잘 부탁해요.”
그가 두툼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도원은 손을 맞잡는 대신 건조한 눈빛을 보냈다.
“아, 당신이 말로만 듣던 ‘빅 제이’군요. 몇 년 전, 돈을 받고 장기 이식 대상자 순번을 바꾸는 바람에 자격 정지를 당했었죠?”
제이콥 하디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잘 지내보려 했는데…….”
이도원은 그의 말을 날카롭게 잘라버렸다.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당신은 만년 치프(Chief : 레지던트 중 우두머리)를 지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난 CS(Chest Surgery : 흉부외과) 전문의죠. 난 당신이 이곳에서 밥을 몇 끼 먹었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직책에 맞게 대우해 주십시오.”
어조에서 이성적인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손발을 놀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사를 치는 이도원을 보며 윌리엄 잭슨은 보통내기가 아님을 인정했다.
‘그래도 배우 구색은 갖춘 놈이군.’
그렇다고 해서 바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도원의 기를 죽일 생각으로 분위기를 급격하게 고조시키려 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난폭하게 구는 것이다.
“아무리 전문의라 하더라도 병원 내부의 규율이 직책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단순히 직책이 높다고 해서 경력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뜻입니다.”
이도원은 책장을 정리하던 것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빤한 시선을 직격탄으로 맞은 윌리엄 잭슨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긴장했다고?’
일전의 이도원과는 전혀 다른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연기할 때의 이도원은 배우가 아닌 ‘로건 리’ 자체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존중을 받든 못 받든 그건 내 문제입니다. 존경하는 치프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란 뜻이죠. 치프, 당신은 그저 의사 사회의 공정하고 엄격한 질서를 지키면 되는 겁니다. 내 말 이해했습니까?”
윌리엄 잭슨이 부르르 떨며 책상을 쾅! 때렸다.
그 모습에 이도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말끝마다 치프, 치프. 날 조롱하는 겁니까?”
터벅터벅 다가간 윌리엄 잭슨이 이도원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날 얕잡아 보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비록 내가 치프일망정 이 병원에서 날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말하는 의사 사회의 공정하고 엄격한 질서란 말입니다. 내 말 이해하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서로 한 치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대립각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모니터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크게 외쳤다.
“컷! 잠깐 쉬죠.”
문간을 넘어서 방 안으로 들어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윌리엄 잭슨에게 물었다.
“뭔가 쫓기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과장된 연기를 보는 느낌이야. 윌리엄, 대체 무슨 일인가?”
질문을 받은 윌리엄 잭슨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하지만 제아무리 거칠 것 없는 성격의 그라도 제임스 윌리스 감독에게 만큼은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아닙니다, 감독님. 주의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이번에는 이도원에게 말했다.
“일관된 성격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엄지를 세우며 윙크를 보냈다.
이도원은 살짝 웃으며 참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윌리엄 잭슨을 바라봤다.
‘살덩이만큼이나 욕심이 많은 친구로군.’
실존인물 윌리엄 잭슨과 그의 극 중 배역인 ‘제이콥 하디’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윌리엄 잭슨이 감정적인 독불장군이라면 ‘제이콥 하디’는 선악이 불분명하고 능구렁이 같은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윌리엄 잭슨은 현장 밖의 모습으로 감정 표현을 하고 있었다.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집중력이 깨졌거나 캐릭터를 똑바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도원은 연습 부족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윌리엄 잭슨도 프로였기 때문이다.
“윌리엄.”
이도원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윌리엄 잭슨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뭐지? 날 비웃기라도 할 셈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촬영 시작 전에 있었던 소란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
“엔지를 낸 것은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고를 듣고 싶진 않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고집불통이란 말이 정확할 터였다.
이도원은 애초부터 윌리엄 잭슨이 자신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문제가 계속 풀리지 않고 반복된다면, 결국에는 충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판단을 한 상태였다.
“충고로 받아들이든 말든 삼자로서 조언 하나 하겠습니다. 난 당신이 ‘제이콥 하디’라는 인물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당신이 나를 너무 싫어한 나머지 신경이 분산돼 있다는 점이겠죠.”
윌리엄 잭슨은 의외로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애송이가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 캐릭터를 연기할 때에 내 감정이 작용했어.’
이도원은 남몰래 미소를 띠었다.
‘연기에 있어선 진지하군.’
한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촬영을 시작하기 전마다, 매번 두 사람에게 소정의 시간을 주고 기다렸다. 그의 노림수는 여러 번 마찰을 통해 점차 관계가 완화되는 것이었다.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던 메이슨 카메론과 올리비아 왓슨은 이 같은 예견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예요?”
올리비아 왓슨이 먼저 물었다.
메이슨 카메론도 궁금한 눈치로 덧붙였다.
“감독님도 윌리엄의 꽉 막힌 성격은 잘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두 배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난 윌리엄의 성격적인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배우들 사이에서 그가 어떻게 불리는지도 알고 있지.”
그는 모니터 너머로 현장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난 그 의견에 동조해선 안 되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중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야. 난 다른 배우들을 믿는 것처럼 윌리엄 잭슨 또한 믿고 있네. 그와 총명한 도원이라면 사소한 감정 문제를 잘 해결해나갈 거라고 믿었을 뿐이야. 예견한 게 아니고, 신뢰한 거라는 뜻일세.”
그 말처럼 현장에서도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한바탕 시비를 걸었을 윌리엄 잭슨이 가타부타 말없이 모니터가 있는 곳을 보며 요청한 것이다.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입을 열었다.
“레디, 액션!”
그에 따라 두 배우는 전과 같은 장면을 연기했다.
이번에도 이도원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찍어내듯 기복 없이 정확한 연기를 보여줬다.
반면 윌리엄 잭슨은 전과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배척하고 인물에 몰입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야 배우가 아닌 의사 같아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바뀌네.’
이도원은 윌리엄 잭슨이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적응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엔지를 내다가 정 안 될 때, 충고를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할 거라 짐작했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훌륭하군요.”
컷 사인이 떨어지자 이도원은 숨김없이 감탄했다.
윌리엄 잭슨은 거구를 들썩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굳이 당신 충고를 받아들인 건 아니야.”
피식 웃은 이도원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어련하시겠어요?”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메이슨 카메론이 올리비아 왓슨에게 물었다.
“어쩐지 좀 친해진 것 같지?”
올리비아 왓슨이 고개를 돌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굴러 들어온 돌이라고 생각했는데, 터줏대감도 못 했던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아요? 그를 보고 있으면 구심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신뢰가 생겨요.”
고개를 끄덕인 메이슨 카메론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도원이 주위에서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스타일인 건 확실해. 저런 당당한 모습이 비호감을 호감으로 만드는 것 같고. 그나저나 눈이 반짝이는 게, 저 친구에게 호감이라도 품은 건가?”
그가 묻자 올리비아 왓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왜 물어요?”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것 같아서 말이야.”
메이슨 카메론이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건넸다.
그때 모니터를 보고 있던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조연출 앤 로버츠에게 말했다.
“다음 현장으로 이동하지.”
*
다음 촬영할 씬은 이도원이 단독으로 들어갈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배우들 중 누구 하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분량이 모두 끝났는데도 모든 배우가 남아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 그딴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윌리엄 잭슨이 메이슨 카메론과 올리비아 왓슨에게 물었다.
올리비아 왓슨은 직설적인 질문에 머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윌리엄 당신이 다른 배우의 연기에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 봤으니까요.”
“저 재수 없는 자식은 뭔가 다른 느낌이 있다. 무척 자연스러운 연기로 화면을 장악하고 자석처럼 끌어들이면서도,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
그를 보며 메이슨 카메론은 입을 떡 벌렸다.
‘남은 것도 모자라 찬사를 보내다니.’
해가 서쪽에서 떠도 이상할 게 없을 것만 같았다.
한편 이도원은 개의치 않고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의 몸은 촬영 현장에 있었지만, 의식만큼은 ‘로건 리’가 호흡하는 병원의 공기 속에 있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생생한 현장감이 심장을 쿡 찌르며 들어왔다.
‘준비 끝.’
그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지시를 보냈다.
“레디, 액션!”
순간 이도원의 눈가가 붉게 충혈됐다.
소리 없는 표정 변화가 감정을 전달했다.
‘순서대로 찍는 것도 아닌데 바로 집중한다.’
윌리엄 잭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와중에도 이도원의 연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병원 침대 위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은 애절했다. 눈빛에 병실 풍경이 버무려진 것만으로 그 같은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심지어 현장의 배우나 스태프들은 연기인 걸 알면서도 믿음이 생겼다. 그들은 더 이상 현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이도원과 동생 역할의 조단역이 형제로 보이는 것이다.
‘어쩐지 알면서 속는 기분이야.’
메이슨 카메론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올리비아 왓슨은 소름 돋을 새도 없이 연기에 몰입해버렸다. 그녀는 이도원과 함께 눈가를 적시고 있었다.
배우나 스태프 누구도 이도원의 감정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번 사로잡혀 마음대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도원을 손을 가늘게 떨며 뻗었다.
기교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움직임이었다.
동생 역할의 조단역 배우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이도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의 역할에 젖어버렸다. 그러자 연기를 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자신 스스로가 이도원이 연기하는 ‘로건 리’의 동생임을 믿게 된 것이다.
“형.”
마치 전염병이라도 걸린 듯, 동생 역할의 배우 역시 동질감이 느껴지는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수술, 형이 해줬으면 해.”
리액팅.
이도원의 감정은 반사되는 것처럼, 상대 배우 내면의 감정을 끄집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