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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신-175화 (17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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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두 남자를 지켜보던 올리비아 왓슨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 주도권을 잡았어?’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는 소리가 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연기를 선보이는 것만으로 자리의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모조리 휘어잡는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연기의 대가들은 등장만으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는다던데, 그 말이 진짜였어?’

얼마 전 영화 촬영 때 90년대 최고의 배우를 만났던 동료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젊은 배우에게서 그 같은 충격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그것도 동양인 배우라니.

더 기가 막힌 건 호흡을 맞추는 메이슨 카메론의 반응이었다.

“난 칼 케이지입니다. 이쪽은 동료인 소피아 디아즈고요.”

시종일관 노련하고 여유로운 연기를 보이는 것이 장점인 그가 초조해 보였다. 당황해 혼란스러운 심정이 대사 템포에서 드러났다. 정작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대사 흐름이 빨라져 감정이나 의도가 전혀 실리지 않은 것이다. 굉장히 초보적인 실수였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누구나 하는 실수기도 했다.

명백한 엔지였지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끊지 않았다. 그는 엔지든 오케이든 배우의 연기를 먼저 자르지 않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이도원은 이번 컷을 끝까지 연기했다.

“반갑습니다, 소피아 디아즈.”

“컷!”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외쳤다.

엔지가 확실했으므로 스태프들은 촬영 구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 친구가 너무 잘해서 살 떨립니다.”

메이슨 카메론이 엄살을 떨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머쓱하게 미소 띤 이도원은 내심 생각했다.

‘서로 연기 스타일에 적응하게 되면, 제법 잘 맞겠어.’

잠깐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 사이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짜릿한 텔레파시가 오가기 때문이다.

같은 촉을 받은 메이슨 카메론이 작게 속삭였다.

“실수해서 미안합니다. 실력에 너무 놀라서요.”

그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다가왔다.

“둘이 꽤 친해졌나 보군. 기쁜 소식이야. 메이슨, 너무 말리지 말라고 충고하러 왔네.”

“열두 살짜리 사춘기 소년이 된 느낌이네요, 제임스. 과한 충고에 자존심 상하고 반항심도 생깁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장난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표정을 못 봤다면 서로 비꼬는 줄 알았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농담이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이도원은 절실히 느꼈다. 한국에서는 여러 작품을 함께한 감독과 배우 사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신뢰관계가 이곳에선 대부분 통용되고 있었다. 그 예로, 감독이 보조출연자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을 한마디로 함축하면…….

“똥 군기가 없어.”

올리비아 왓슨이 고개를 갸웃하며 따라 했다.

“동군기가 없어?”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영어로 대답했다.

“현장 분위기가 허물없어서 놀랐습니다.”

“텃새라도 부릴 줄 알았나요?”

물어본 올리비아 왓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엔지를 밥 먹듯이 냈다면 분명 텃새를 당했을 거예요.”

이도원의 연기력을 보고 돌려 하는 칭찬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도 그에게 호감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메이슨 카메론의 긴장을 풀어주고 돌아갔다. 그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지시했다.

“한 번 더 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까치집을 여러 개 지어놓은 짧은 머리가 하얗게 새었을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가 발휘하는 에너지는 결코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의욕 넘치는 젊은이들이 울고 갈 만큼 파워풀 했다.

“레디, 액션!”

밀도 높고 묵직한 신호가 치고 들어왔다.

그에 따라 올리비아 왓슨이 대사를 했다.

“여기가 당신이 지낼 곳이에요. 룸메이트는 자긍심 높은 텍사스 사람이죠. 그는 동부 사람을 무시해요.”

이도원을 힐끗 쳐다본 그녀가 이어 붙였다.

“뭐… 당신은 신경도 안 쓸 것 같지만.”

이미 이도원은 이층 침대에 짐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면 조금 쉬고 싶군요.”

“아.”

입을 딱 벌린 올리비아 왓슨이 민망한 듯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전 이만 나가드리죠.”

그녀가 나가서 방문을 닫았다.

카메라가 홀로 남은 이도원을 비췄다. 그러자 이도원은 침대에 짐을 풀고 책상 정리를 시작했다.

카메라가 액자를 올리는 모습과 액자 속 가족사진, 알람시계, 책장 한가득 책을 꽂는 모습을 담았다.

“컷, 오케이.”

해당 씬이 끝나자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그의 곁에서 현장을 함께 바라보던 앤 로버츠가 물었다.

“제 말이 맞죠? 그는 엔지를 거의 내지 않아요.”

그녀는 거 보란 듯이 코끝을 세웠다.

낄낄 웃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좋은 배우를 소개시켜줬군 그래. 지금도 완성된 배우 같지만 그의 잠재력은 끝이 없네. 이번 드라마를 마치고 영화 촬영에 돌입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거야. 내 장담하지.”

쏟아지는 극찬을 들은 앤 로버츠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한 번 보면 그게 보이세요?”

“경험과 연륜이 아무 쓸모없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나? 자네도 내 나이까지 배우들과 부대낀다면 모두 알 수 있는 것들이야.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말일세.”

그때 이도원과 메이슨 카메론, 올리비아 왓슨이 나란히 걸어왔다. 어느새 세 사람은 친해져 있었다. 배우라는 동질감이 단숨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다.

“삼총사 결성이군.”

흐뭇하게 웃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말을 이었다.

“걱정을 많이 했네. 자네들 덕분에 밤잠을 설쳤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붙여놓으니 찰떡궁합이란 말이야!”

“하하.”

세 사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후 배우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링을 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는데 썩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이도원은 촬영을 할수록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쭉 가면 좋겠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돌이켜보면, 촬영 땐 늘 다사다난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마침 메이슨 카메론이 불쑥 말을 꺼냈다.

“도원. 다음 씬이 코앞이니 하는 말인데, 윌리엄 잭슨을 조심하게.”

윌리엄 잭슨은 앞으로 촬영할 씬에 등장하는 배우였다. 드라마에서 감초와도 같은 명품조연으로, 선악의 중간쯤 걸친 역할을 연기했다. 잘하는 배우라는 것만 짐작할 뿐 그 인간성까지 알 수는 없었다.

궁금한 표정의 이도원을 본 메이슨 카메론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단언컨대 윌리엄 잭슨은 텍사스 최강의 쓰레기였을 거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윌리엄 잭슨이 키홀더를 빙글빙글 돌리며 등장했다. 그는 백구십 센티에 달하는 키와 백이십 킬로가 넘는 몸무게를 가진 거구였다.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올리비아 왓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왔네요. 조심해요, 도원. 그는 웬만한 주연 배우는 씹어 먹는 개런티를 받고 있죠. 그만큼 자부심도 높답니다. 문제는 그가 남을 무시하는 교만한 성격을 가졌다는 거예요.”

한 마디 씩 하며 건투를 빌어준 메이슨 카메론과 올리비아 왓슨은 상어를 피해 달아나는 정어리 떼처럼 자리를 피했다.

‘도대체 뭐야?’

이도원을 발견한 윌리엄 잭슨이 이죽거리며 웃더니 거구를 이끌고 다가왔다.

“당신이 그 한국인이로군.”

이도원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크네.’

반면 이도원을 빤히 내려다보던 윌리엄 잭슨이 말을 이었다.

“내가 텍사스에 있을 때 한국인을 본 적이 있지. 그들은 남한테 피해를 주는 인종이었어. 당신이 날 방해하지 않길 바란다.”

“하하.”

초장부터 무례한 언사를 들은 이도원은 웃음이 나왔다.

뜻밖의 반응에 윌리엄 잭슨이 눈꺼풀을 움찔 떨었다.

“뭐가 우습지? 내 충고가 우습나?”

“아닙니다. 그냥…….”

말끝을 흐린 이도원은 적당한 표현을 찾았다.

“어이가 없어서요.”

“뭐라고?”

윌리엄 잭슨은 자신의 덩치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도원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불쾌한 기분으로 이어졌다.

“건방지군.”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군요.”

나직이 말한 이도원은 보고도 믿기 힘든 윌리엄 잭슨의 안하무인 태도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당신에게 폐를 끼칠 거라고요? 난 ‘텍사스연쇄살인사건’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텍사스 출신의 끔찍한 연쇄살인범을 다룬 영화죠. 그럼 당신도 그런 인종입니까?”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본 제임스 윌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벼운 수신호를 보내 촬영 중단을 지시했다. 윌리엄 잭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제임스 윌리스가 그 이상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자, 올리비아 왓슨이 전전긍긍하며 물었다.

“감독님.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제임스 윌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가 됐든 터질 일이네. 도원은 현명하게 잘 대처할 거야. 그러니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지.”

한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윌리엄 잭슨은 이도원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반면에 이도원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내 실력이 당신을 실망시킨다면 그때 불만을 꺼내시죠. 일단은 넣어두세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저와 연기 호흡을 맞추다 보면 해소될 겁니다.”

마치 엄마가 아들을, 교사가 제자를 타이르는 어조였다. 당연히 윌리엄 잭슨은 울화가 끓어서 졸도할 지경이었지만 섣불리 난동을 피우지 못했다. 이도원의 부드러운 말투 속에서 맞서기 꺼림칙한 자신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놈이 뭘 믿고?’

이도원은 고개를 돌리며 제임스 윌리스 감독에게 말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그에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빙그레 웃더니 스태프들에게 지시했다.

“촬영 준비해주게.”

현장이 다시 분주하게 돌아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메이슨 카메론이 팔짱을 끼며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윌리엄이 임자를 만난 것 같군.”

“그러게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자예요.”

대답하는 올리비아 왓슨의 시선은 이도원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윌리엄 잭슨의 험상궂은 인상과 압도적인 덩치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 이도원이 신기했다. 아무리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막상 윌리엄 잭슨의 앞에 서서 난폭한 언사를 뒤집어쓰면 대부분 꼬랑지를 말고는 했다. 그런데 이도원은 동양인이라고는 자신뿐인 현장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맞선 것이다.

‘멋있네.’

순간적으로 호감을 품은 올리비아 왓슨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이도원은 지금 상황이 흥미로웠다. 남들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격투기에서 스파링을 하기 직전 느끼는 묘한 흥분과 흡사했다. 어쩌면 그동안 겪었던 배우들 간의 기싸움이나 레드엔터테인먼트와의 신경전 등으로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이도원에게는 윌리엄 잭슨의 위협 수단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잠시 후 표정이 궁금하군.’

평소 같으면 상대 배우를 보며 호흡을 맞출 궁리를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얄짤 없이 실력 발휘를 해볼 요량이었다.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는다면 보다 자신의 연기에 치중할 수가 있었다. 다만 압도적으로 상대를 눌러서는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없기에 조화로운 연기를 추구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지시가 떨어졌다.

“레디, 액션!”

기숙사 방 안.

카메라가 두 배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윌리엄 잭슨의 연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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