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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신-174화 (17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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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2025년 10월, 뉴욕.

이도원은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메디컬 드라마 <리서스테이트(Resuscitate : 소생시키다)>에 참여했다. 따라서 촬영 기간 동안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기로 결정됐다.

이도원과 함께 머물게 된 매니저 이진빈이 한국에서 가져온 화투를 꺼내 보이며 씩 웃었다.

“동전 놓고 맞고 한판 치시겠습니까?”

그는 질문하면서도 이미 이불을 평평하게 만지고 있었다.

“맞고 말고, 섰다로 가자. 깔끔하게.”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이진빈 앞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샤워를 끝낸 잠옷 차림이었다.

패를 섞으며, 이진빈이 물었다.

“부담이 크지 않으세요? 이미 다른 배우들이 터를 다 닦아놓은 인기 드라마 후반부에 들어가시는 거잖아요. 게다가 배역 자체가 주인공의 라이벌이기도 하고요. 기존의 배우들을 압도할 정도 연기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욕먹지 않을까요?”

이도원은 대답 대신 패를 들며 말했다.

“화투치자며? 여기에 집중하라고. 승부는 한순간이야.”

“예, 형. 전 죽습니다.”

이진빈이 패를 까며 말했다.

“둘이서 섰다를 무슨 재미로 해요?”

일 땡이었다.

그에 이도원도 패를 깠다.

세 끗이 나왔다.

“기싸움하는 재미.”

대답한 이도원은 판을 이어가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섰다는 눈을 보며 상대의 수를 읽지. 표정과 작은 동작 하나도 놓쳐선 안 돼.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극도의 긴장감은 실수를 낳는 법이야. 이런 점은 연기와 닮았지?”

패를 섞는 그를 보며 이진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전 연기를 안 해봤으니까요.”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비슷해. 나한테 물었지? 이번 드라마가 부담되지 않느냐고.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소극장이든 대극장이든 매번 난 같은 마음으로 연기를 한다. 내 배역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나머지는 운에 맡기는 거지.”

이도원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준식이에게 전해줘라.”

뜻밖의 한 마디에 이진빈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넷이 떠들썩하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 원 톱으로 첫 주연을 맡게 됐는데 속이 편할 리가 없지. 더군다나 네가 평소 안 묻던 질문을 하는데 설마 모를까봐?”

말을 마친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그에 한숨을 푹 내쉰 이진빈이 대답했다.

“미국에서도 한국 사정을 훤히 꿰는 경지에 이르셨네요. 준식이 형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전 매니저로서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고민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죠. 형… 아니, 대표님이라면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도원은 화투 패를 건네며 말했다.

“새로운 도전은 늘 두렵지만 그렇기에 설레는 법이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불청객인데다 동양인이 각광받는 캐릭터에 내정됐다는 사실이 반감을 일으키겠지. 그들이 보았을 때 난 그저 굴러들어온 돌이니까. 그럼에도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날 구태여 드라마에 집어넣었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이진빈이 대답했다.

“음……. 형이 보여준 연기력에 감탄한 것 아닐까요? 아니면 드라마에서 얼굴을 비쳐서 인지도를 키워줄 생각으로? 영화가 흥행하려면 형이 티켓파워를 가져야 할 테니까요.”

이도원은 순순히 설명해주었다.

“반은 맞췄다. 네 말대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가장 시험해보고 싶은 건 내 적응력일 거야.”

“적응력이요?”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현장에 완벽히 적응할 수 있어야만 기대에 부응하는 영화를 뽑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계약은 끝났잖아요. 굳이 테스트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진빈은 순진한 얼굴만큼이나 순도 높은 질문을 했다.

한편 그를 빤히 응시하던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대안을 마련해야 하니까. 만에 하나의 상황까지 고려한 판단을 내린 거다. 아무리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라도 동양인을 주연으로 삼았다는 건, 큰 부담을 떠안고 촬영에 들어간다는 뜻이야.”

그 말을 듣고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진빈이 화투 패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들고 왔다. 그는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기도 나와 있습니다. 굳이 주연배우로 동양인을 기용한 이유는 ‘현재의 연기력과 미래의 잠재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라고요. 더불어 ‘아시아에도 재능 있는 배우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동서양의 경계를 허물고 시장을 넓히면 더욱 양질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올 테고, 영화계는 어느 때보다 호황을 맞이할 것이다.’라네요.

이도원도 눈이 있으니 이진빈이 줄줄 외는 기사를 따라 읽었다. 그러고 보면 이대로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사명감을 갖고 도전을 했는데, 내가 망칠 순 없지.”

나직이 중얼거린 이도원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진빈아. 미안하지만 오늘 화투는 여기까지 해야겠다.”

이어서 그는 다시 대본을 꺼내들고 연습에 매진했다.

이진빈은 이도원의 진지한 표정에 매료돼 불평하지 않고 숨죽였다. 이도언이 큰 목소리로 대사를 뱉을 때마다 방음장치가 버텨줄지 의심이 됐다. 그 모습을 보며 이진빈은 조마조마한 심정과 함께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역시 어디 가든 꿀릴 실력도, 사람도 아니야.’

*

일정보다 삼십 분 일찍 현장에 도착한 이도원은 감격스러운 기분을 맛보았다. 그는 <아스라이>를 촬영할 당시에 비해 개런티가 올랐고, 딱 그만큼 현장에서 대기할 때 머무는 트레일러도 넓어진 것이다.

‘대우가 달라졌군.’

이곳은 드라마 현장이었다. 드라마 현장에서조차 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은 <아스라이>와 같은 영화 현장에선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진빈 역시 얼굴이 빨개져서 좋아했다.

“주연 배우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현장의 다른 에이시안들에 비해 트레일러 크기부터 다르네요.”

이도원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이진빈은 종달새처럼 떠들었다.

“한국에선 욕설이 난무하는 열악한 환경이 안락하게 여겨질 만큼 편해졌는데, 미국에서는 영- 촬영할 때마다 떨리고 긴장됩니다. 사실 지금 밖에 나가기도 무서워요. 이번 드라마 출연진은 <아스라이>의 배우들보다도 훨씬 거물들이잖아요.”

트레일러 밖의 배우들을 본 이진빈이 덧붙였다.

“물론 아무리 날고 기는 배우와 작업해도 형님이 기에서 밀리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왔다.”

이도원은 웬일로 겸손하지 않고 호기롭게 굴었다. 그는 지난 번 <아스라이> 촬영 때 아쉬움이 많이 남은 상태였다. 해서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그간 연기했던 대본을 싹 모아서 번역하고, 영어 발음이나 억양에 신경을 쓰며 연습했다. 동시에 여러 나라의 전문서적이나 소설, 에세이 등을 독파하면서 다양한 사상이나 상식들을 이해하려 노력해왔던 것이다.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이진빈은 그 의견에 동조했다.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십시오!”

그때 스태프 하나가 이도원의 트레일러를 노크했다.

“준비 다 되셨으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이도원은 현장으로 투입됐다.

당일 연기할 장면은 주인공의 라이벌인 이도원이 등장하는 씬이었다. 인간관계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캐릭터의 생사 여부는 최초 몇 초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내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다가오더니 손뼉을 치며 이목을 모았다.

“미리부터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이쪽은 ‘로건 리’ 역할을 맡은 도원입니다. 도원의 국적은 한국이죠. 우리는 훌륭한 배우인 그를 환영해줘야 할 겁니다. 단, 시간 관계상 인사는 나중에 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도원을 배려하지 않은 그는 배우들 하나하나에게 주의할 점을 전달했다. 첫 순서는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고 있는 올리비아 왓슨이었다.

“리비. 처음 호흡을 맞추는 도원과 메이슨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줘. 대척 관계인 두 남자를 융화시키는 역할을 하길 바라네.”

“알겠어요, 제임스.”

그녀가 흔쾌히 대답하자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남자 주인공, 메이슨 카메론에게 시선을 옮겼다.

“메이슨은 지금 그대로 감정을 표출하면 되겠군. 당황스럽고, 불쾌한 표정 말이야.”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에 메이슨 카메론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학창시절 때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싶었던 동양인 녀석이 하나 있긴 했지만, 저 한국인 친구에게는 아무 감정 없습니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살짝 비꼰 말투였다. 초면치고 무례한 언사였지만 응수를 하기에는 강도가 약했다.

그때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이도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네.”

그는 말 한마디로 배우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중에는 호기심 어린 시선도, 시기어린 시선도 있었다. 감독은 정작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도원에게만 아무 주문도 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다른 배우들 보다 이도원의 연기가 믿음이 간다는 듯한 제스처였다.

의도적으로 이도원이 받는 부담을 최고점까지 끌어올린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웃으며 지시했다.

“그럼 촬영 들어가지.”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자리를 잡았다.

보조 출연자들이 병원 복도를 오갔다.

복도 끝 수술실 앞에서는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복장의 메이슨 카메론과 닥터 가운을 입은 올리비아 왓슨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메라 한 대는 풀 샷으로 복도 전체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대는 두 주인공을 쪼았다.

이윽고 턱을 괸 채 시선을 던지고 있던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모니터 너머로 신호를 보냈다.

“레디, 액션!”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그에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올리비아 왓슨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대사를 쳤다.

“에이든이 말한 선생님인가 보네요.”

그녀가 바라보는 쪽을 따라서 응시한 메이슨 카메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젊은 나이에도 동부에서 알아주는 실력자라더군.”

조금 불편한 표정이었다.

올리비아 왓슨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긴장되나 봐요?”

“긴장은 무슨…….”

메이슨 카메론이 말끝을 흐렸다.

카메라가 이도원의 모습을 틸트업(TU;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카메라 워킹)으로 잡았다.

순간 이도원이 걸음을 뗐다. 카메라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를 줌아웃으로 당긴 후 롱 샷(LS : 먼 거리에서 촬영한 샷)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또 한 대의 카메라가 워킹하며 따라붙어 클로즈업으로 표정을 담았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은 세 대의 모니터를 통해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사람 잘 봤어.’

이도원은 평소 쓰지 않는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지적이고 날카로운 인상을 더하기 위해 세심한 부분까지 직접 고안해냈다. 더불어 표정도 촬영 시작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같은 사람인지 볼라볼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평가를 뒤로하고 남녀 주인공에게 바짝 다가선 이도원이 걸음을 멈췄다. 두 발을 모으고 허리를 곧게 편 모습은 흐트러짐 없어 보였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두 배우를 훑었다.

그 눈길을 받은 메이슨 카메론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살점을 도려낼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 문이다.

‘냉기가 줄줄 흐른다.’

그는 일순 이도원의 카리스마에 압도됐지만, 단숨에 주변을 장악한 연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사이를 두고, 이도원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로건 리 입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긴장감을 팽창시켰다.

메이슨 카메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서 빨려 들어가듯 이도원의 손을 맞잡은 그가 대답했다.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우리 병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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