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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지난 사고로 인해 중영극단 공연은 중단됐다.
이를 예측하고도 막지 않았던 이도원은 단원들에게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그가 양심을 잃었다면, 사고의 발단이 된 이로빈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다.
다시 구치소 면회실에서 이도원을 만난 김진우는 씁쓸하게 말했다.
“이로빈도 구치소에 수감된 동안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해놨더라고. 비서를 시켜서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고, 검찰 쪽과도 여러 번 접촉을 했나 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수순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증거가 불확실하면 아예 검찰 쪽에서 진즉 결재를 막는다. 반대로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다면 형량을 줄이는 쪽으로 일을 전개할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인 처벌을 받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이 바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군.”
이도원의 말에 김진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유착관계가 드러나는 걸 막으려고 아버지가 돈과 인맥으로 힘을 쓴 거다. 이로빈이 지금까지 애를 먹고 있던 것도 담당 검사와 판사가 공정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아버지가 개입하면서 판이 뒤집혔다. 법원 감사로 판사를 압박하고, 차장 검사를 통해 담당 검사를 교체했어. 더구나 한태양까지 설득했다.”
기가 막힌 이도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그에 김진우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뒤를 봐주겠다고 손을 쓴 거지. 아마 형량을 줄이고 대가를 지불해주겠다고 약속했을 거다. 명백한 살인도 과실 치사로 바꾸고, 십오 년 형을 오 년으로 줄일 수 있는 인간들이야. 아버지를 뒷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 증거는 단 하나도 찾지 못했어. 그 때문에 오랜 시간 섣불리 나서지 못했던 건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니.”
허무했다.
사실상 이로빈과 레드엔터테인먼트는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김봉민 의원은 잠시 물러났다가 돌아오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복수를 실패한 김진우는 어떨지 몰라도 이도원은 더 이상 파고들 생각이 없었다.
“배우들을 노예처럼 부려서 이윤을 취하고 윤세라를 죽음까지 몰고 갔던 레드엔터테인먼트가 완전히 무너졌고, 이로빈 역시 다시는 연예계로 돌아올 수 없게 됐다. 비록 김 의원이 힘을 써서 중벌은 면했지만 버려진 사냥개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정말, 내다 버릴 사냥개의 입을 막기 위해 먹이를 준다고 생각하는 건가?”
김진우는 분통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연기로서 대중과 소통하는, 배우다. 이런 공방전을 반복해봐야 다치기만 할 뿐이야. 네 아버지도 이번 복수로 타격을 받았다. 그러니 복수는 이쯤 하고 네 미래를 위해 살아.”
“날 버리고, 내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작자야.”
눈시울이 붉어진 김진우가 씹어뱉듯 물었다.
“<서커스>의 원래 시놉시스를 알고 있나?”
뜻밖의 질문에 이도원이 당황했다.
여기서 갑자기 이번 영화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서커스>의… 원래 시놉시스?”
“네가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쯤, 이로빈 대표가 사무실로 찾아온 아버지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유태일 감독이 현 정치권의 민낯을 밝히는 영화를 제작 중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그 영화가 타깃으로 삼고 있는 정치인이 바로 김봉민 의원, 내 아버지였어. 아버지가 저질렀던 비리가 다시 재조명될 수도 있겠다 싶었지.”
이도원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타임 슬립 하기 전, 유태일 감독에게 받았던 <서커스> 시놉시스의 내용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시놉시스가 겨냥하고 있는 타깃이 김봉민 의원이었다면 김진우가 반드시 주연을 꿰차고 싶어 할 동기가 될 수 있다. 즉, 죽음에 대한 진실이 이 자리에서 밝혀지고 있었다.
“설마 그 시놉시스의 여주인공이…….”
“너도 봤나 보군. 그래, 내 어머니다.”
김진우는 쉼 없이 흐르는 눈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김봉민 의원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던 장애인 고아원 성 추문 사건의 피해자. 변호사 시절 봉사활동으로 간 시설에서 당시 고교생에 실어증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성폭행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자 우리 두 사람을 내쫓았지.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척 위선을 떨었지만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으셨어. 다만 날 위해 미국으로 떠나신 거다. 그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타지에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당신께서! 김봉민 의원이 매달 보내는 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고 자력으로 날 키우시면서 얼마나 큰 모욕과 고초를 겪으셨는지 짐작하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김진우는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며 덧붙였다.
“내게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둔 돈을 전부 내주시더군. 당신은 끝끝내 김봉민을 용서하지 못했지만, 한 번 찾아가 보라고. 그래도 핏줄이니 외면하지 못할 거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라. 나는 결국 용기를 냈고 전화를 했지. 그런데 돌아온 게 뭔 줄 아나? 비서가 오더니 학교에 입학시키고 매달 생활비를 붙여준다며, 절대 한국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 말을 쭉 들으며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봤던 <서커스>의 시놉시스 내용이 점차 떠올랐다. 실어증을 앓고 있는 여자, 그녀를 사랑하는 남주인공이 바로 이도원이 맡게 될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름만 다른 김봉민 의원이 나와서 똑같은 만행을 저지른다.
“그럼 남자 주인공도 실존 인물인가?”
“그건 몰라. 난 그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그렇게 답한 김진우가 찬찬히 이도원을 뜯어보며 물었다.
“네가 나라면, 김봉민 의원을 이대로 용서할 수 있겠나? 유태일 감독이 결국 외압에 못 이겨서 시놉시스를 바꿨더군. 개봉이 불가할 바에는 <서커스>의 내용을 전부 뜯어고쳐서 마음을 접었다고 방심을 유도한 후에, 나중에 영화가 흥행하고 힘이 생기면 다시 터트리자고 타일렀어. 그래서 이번 영화를 하게 됐다.”
김진우는 갈수록 놀라운 사실들을 토해냈다.
그에 나직이 한숨을 내쉰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유 감독님께서 네가 참여하는 걸 탐탁찮게 여기는 줄 알았는데…….”
김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지. 모든 건 외압을 최대한 피하려는 눈속임에 불과했어. 또, 너와 가깝게 지내라고 하더군. 레드엔터를 떠난 후 백 엔터로 갈 것을 제안한 것도 유 감독님의 생각이다.”
내막을 모두 들은 이도원은 속은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가 났다.
“이거 뒤통수 세게 한 방 맞은 느낌인데.”
한편, 의문 하나가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유태일 감독에게 <서커스>란 각본이 단순히 예술가의 열망이라면 외압을 피하려고 연막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밀어붙여서 만들고, 상영관에 걸어놨을 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김봉민 의원의 악행을 반드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유 감독님은 왜 그 시놉시스를 쓰셨으며, 그렇게나 집착하시는 거지?”
“그것까진 나도 모른다.”
“정말 찝찝해.”
얼굴을 찌푸린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네 입장은 잘 알겠어. 하지만 내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야. 넌 애초에 배우가 된 목적이 잘못됐다. 구치소에 갇혀서 내게 동정을 호소하는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을 바로 아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걸 모른다면 난 널 받아줄 수도, 도와줄 수도 없어. 그럼 난 돌아가서 네 감정을 이해해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이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우는 그를 잡지 않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아마 수십 년 간 마음속에 묻어뒀던 아픔과 비밀을 개와 고양이처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상대에게 처음 풀어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건 이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날이야.’
정말이지, 타임 슬립 후 가장 기분이 더러운 하루였다.
김봉민과 이로빈을 통해 이 사회에 끔찍한 단면을 마주했다. 또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김진우의 진심을 보고 용서를 강요받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가장 고맙게 여겨왔던 유태일 감독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환상적이군.”
이도원은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
그날 이후에도 이도원은 굳이 유태일 감독에게 찾아가지 않았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질문이 생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태이 감독이 고마운 사람이란 건 변함없었고, 그저 내막을 듣지 못한 것뿐이니 오해하거나 추궁할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도 먼저 연락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도원은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했다.
분명 김진우는 모든 진실을 털어놨노라고 유태일 감독에게 언질 했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대화 중에 유태일 감독 이름이 나온 만큼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유태일 감독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저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다고 하더군.”
스튜디오의 문이 열리며 유태일 감독이 들어섰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도원은 동작을 풀며 일어났다.
“오셨어요?”
“단단히 벼르고 있었나 보구나.”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김진우를 섭외해 레드엔터테인먼트를 견제한 걸? 아니면 김진우 더러 친하게 지내라고 한 걸?”
“뭐, 둘 중 하나라도 말입니다.”
이도원이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에 유태일 감독은 미소를 띠며 짐볼(Gym ball :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큰 공 모야의 도구) 위에 눌러앉아 말했다.
“미안하다. 네가 미국으로 떠나버리기 전에 사과하러 온 거고. 겸사겸사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게 됐다는 축하도 할 겸.”
“감사합니다.”
“용서해주는 건가?”
“용서랄 게 뭐 있습니까? 대신 질문 하나만 하죠.”
이도원이 말하자 유태일 감독이 되물었다.
“꼭 대답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강요는 아닙니다.”
짧게 대답한 이도원은 질문했다.
“유 감독님의 시놉시스에 실어증이 딱 둘 나오죠. 그걸 계기로 친해지고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그중 남자 주인공도 실존 인물입니까?”
“정확히 알아맞혔다. 실존 인물이지. 그것도 아주 가까이 있는.”
“누구죠?”
궁금증이 증폭된 이도원이 물었지만 유태일 감독은 능구렁이처럼 말을 돌렸다.
“내가 먼저 대답했으니 이제부터 질문은 하나씩 해야 공평하지.”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태도였다.
이윽고, 시익 웃은 유태일 감독이 물음을 던졌다.
“최초 내 작품의 시놉시스를 직접 읽은 건 딱 둘이었다. 한 사람은 나고, 또 한 사람은 김봉민 의원이야. 김봉민 의원은 내가 소포로 보낸 시놉시스 한 장을 들고 이 사건을 어떻게 막으면 좋을지 묻기 위해 이로빈을 찾아갔다. 꽤나 급했나 보더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화를 엿들은 김진우가 또 알게 됐지. 이 네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 시놉시스를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내용을 도원이 네가 알고 있는 건지 궁금하구나.”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짐작대로, 김진우에게 들었습니다.”
유태일 감독이 의외라는 듯 눈을 짧게 빛냈다.
“그럼 김봉민 의원과 김진우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건가?”
“아마도요.”
이도원이 짧게 말했다.
그에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마. 원래의 <서커스> 각본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바로 내 아버지다.”
이도원은 그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감독님은 대대로 의사 집안이라고 하셨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담담하게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래. 아버지는 실어증이셨지만 고아원생은 아니었다. 봉사활동을 가서 작품 속 ‘여주인공’을 만나게 된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지. 여자가 떠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아래 그녀를 잊었어. 꽤 오랫동안, 김봉민 의원이 성 추문에 시달리기 전까지.”
나직이 한숨을 쉰 그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네가 미국에서 촬영하는 동안, 난 진우랑 <서커스>의 제목을 바꾸고 촬영에 들어갈 생각이다. 김봉민 의원이 주춤한 이때가 적기지. 다신 세상에 나올 수 없도록 만들 생각이다. 그게 영화인으로서 내 신념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국내에는 투자를 받을 곳이 없는 실정이야.”
“제게 투자를 받으러 오신 거군요.”
이도원의 말을 들은 유태일 감독이 품속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투자제안서까지 단단히 준비해 온 것이다. 그는 제안서를 내밀며 부탁했다.
“검토해주길 바란다.”
이도원은 파일을 챙겼다.
그는 지금까지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건 하나만 수락해주시면 백 엔터 대표 직권으로 이 자리에서 사인하죠.”
“무슨 조건?”
씨익 웃은 이도원이 데스크에서 모바일 게임을 하던 이진빈에게 펜을 넘겨받으며 대답했다.
“카메오로 출연시켜 주십시오. 제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개봉해 달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