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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이도원은 무대로 나갔다.
객석이 눈에 들어오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위를 보면 안 돼.’
연기에 있어 시선은 중요하다.
관객의 눈길은 배우의 시선을 따라간다.
한태양이 손봤던 무대 위 철골이 언제 덮칠지 몰라도, 공연 도중에 시선이나 정신을 분산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정신을 집중한 이도원의 입이 열렸다.
“난 남들이 안정적이라고 불리는 직장에, 썩 괜찮은 수입을 가졌다. 그럼 뭘 해? 그 안정적인 직장을 언제 잃을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썩 괜찮은 수입은 대출금으로 반 토막 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렸을 적 꾸던 꿈들은 왜 멀어져만 갈까?”
앞섶 단추를 두 개 풀어헤친 와이셔츠.
목에는 매듭이 풀린 넥타이가 감겨 있었다.
독백한 이도원은 취기로 비틀대며 무대 위를 배회했다. 그의 만취한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로 술 냄새가 풍겨오는 듯해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 어감은 술주정뱅이처럼 어눌한데 대사가 똑똑히 전해졌다.
그때 무대로 차지은이 나타났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또 술이 떡이 돼서 들어오는 거예요?”
이도원이 걸음을 멈추고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간신히 정신을 가눈 뒤 말했다.
“아, 우리 마누라. 하하.”
양팔을 벌리고 접근하자 차지은이 밀쳤다.
“저리 가. 술 냄새 나니까.”
냉랭한 태도에 이도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한테 왜 그래? 남편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꼭 이래야겠어?”
차지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정신 차리고 내일 얘기하지?”
“너 그거 알아?”
이도원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굉장히 티껍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차지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무대 뒤로 사라지자 이도원은 자리에 남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듯이 노래를 했다.
“내 맘 아무도 알아주지 않네.
세상에 혼자된 것 같은 맘으로
덩그러니 혼자, 덩그러니 혼자.
반지를 나눠 끼운 아내가 낯설고
사랑의 결실은 밤새도록 징그럽게 울어댈 때.
덩그러니 혼자, 덩그러니 혼자.
막막한 밤하늘 바라보네.”
무대 불이 꺼지고 이도원이 내려왔다.
아래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이 저마다 격려를 보냈다.
누군가는 엄지손가락을 세웠고, 누군가는 눈짓을 했으며, 누군가는 어깨를 두드렸다.
한편 이도원은 무대 내려오자 연기할 땐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사고에 대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머리를 비우자.’
이도원은 재차 다짐하며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신용운이 함께하는 장면이었다.
무대 배경이 집 앞에서 회사로 바뀌어 있었다.
“정 대리, 나랑 장난하나?”
신용운이 칸막이 위로 까칠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도원이 추임새처럼 독백을 넣었다.
“또 시작이다.”
마침 신용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꾸 이따위 양식으로 보고할 거야? 또 강 팀장이 제시한 양식이라고 핑계 댈 건가? 결재를 해주는 게 누구야? 직급이 누가 더 위지?”
딱 맞춰서 이도원이 독백을 쳤다.
“유 과장은 매일 아침 내 잠을 깨우러 납신다.”
그 후 대답했다.
“유 과장님이십니다.”
“그래! 직속 상사가 누구든, 내가 선임이란 말이야. 앞으로는 보고서 양식 똑바로 지켜서 보고하길 바라네.”
그 순간 신용운보다 어리고, 이도원보단 나이가 있는 중견 배우 하나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등장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유 과장님 아니십니까?”
비꼬는 말투가 명백했다.
신용운은 표정을 움찔 떨었다.
“강 팀장, 마침 잘 왔네. 얘기 좀 하지.”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이도원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앉았다.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두 사람이 쑥덕거리는 쪽을 노려보며 독백을 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숨통이 조여 온다. 직장 생활에서 유일한 위로가 되는 월급은 고스란히 마녀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담배만이 내게 안도감을 준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내게는 여가 생활을 할 돈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끼이이익-.
철골이 흔들리는 소음이 났다. 그 소리는 제법 커서, 앞 좌석에 앉은 몇몇 관객의 집중력을 깨트릴 수준이었다. 그러나 극장 안이 깜깜했기에 육안으로 식별할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조명이 존재하는 무대 안쪽이었는데, 때마침 조명이 꺼지고 말았다.
조명이 꺼지기 전, 그쪽을 바라봤던 신용운이 무대를 내려오며 속삭였다.
“아까 그 소리, 들었나?”
함께 있던 ‘강 팀장’ 역할의 배우가 고개를 저었다.
반면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무대 장치를 점검해 달라고 요청하면 좋겠는데…….”
신용은 말끝을 흐렸다. 점검하면 좋겠지만 그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경이 바뀌면 다시 무대로 올라가야 했다. 짧게 고민한 그가 이도원에게 당부했다.
“조심해라. 무대 장치가 헐거운 것 같더구나.”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그 자리에 조금 더 남아있었다. 그리고는 무대 배경이 바뀐 후 차지은과 함께 무대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차지은이 먼저 독백을 했다.
“연애할 때 남편은 날 더러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끔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래 뭐, 나도 알고 있다. 원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허풍을 치는 건 남자들만의 사랑 표현 방식이니까. 그래서 기대도 안 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마치 결혼 생활에 염증을 겪고 있는 8년차 주부인 양 연기를 했다. 한 술 더 떠서, 내숭 없는 말투로 차분하게 독백하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정도가 있지, 내 남편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돌변할 줄은 몰랐다. 내 남편은 사기꾼이고 그 모든 건 연기였다. 일을 핑계로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시고 늦게 들어오며 주말에는 컴퓨터로 영화를 보거나 잠만 잔다. 난 이런 결혼 생활을, 어떤 긴장감이나 설렘도 찾아볼 수 없는 결혼 생활을 꿈꾸지 않았다. 친정에 가서나 가끔 만나는 친구들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척 하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난다. 이럴 바에는…….”
차지은이 말끝을 흐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서 있는 곳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이번에는 이도원을 비췄다. 그러자 차지은에게서 등을 돌린 이도원이 대답하듯 독백했다.
“어디부터 어긋났는지 모르겠다. 내 장점만을 봐주던 아내는 이제 단점만을 찾아낸다. 언제부터인가 잔소리가 스트레스가 됐고, 내 유일한 탈출구는 컴퓨터나 TV 속이 되어버렸다. 난 이런 식의 결혼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날 존중해주는 여자와 살고 싶었다. 이럴 바에는…….”
동시에 조명이 나가며 두 배우가 동시에 읊조렸다.
“차라리 결혼하지 말았을걸.”
그 순간 무대 위로 천둥소리가 들려오며 번쩍번쩍하는 흰색 조명이 터졌다. 두 배우가 결혼하기 전으로 ‘타임 슬립’을 하는 장면이었다.
철골이 붕괴되는 굉음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원래 예정돼 있던 음향효과가 아니었다.
‘위험해.’
이도원은 소름이 쫙 돋았다.
아직 철골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무대 위가 어둡고, 정신없는 조명이 터지는 탓에 어느 쪽 철골이 주저앉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피해!”
크게 외친 이도원이 차지은을 잡고 뛰었다.
그 순간 철골이 무대 위를 덮쳤다.
콰르르르르-.
철골이 주저앉는 굉음과 효과음이 뒤섞였다.
무대의 조명이 완전히 나갔고, 공연 스태프들이 뛰어올라갔다. 무대 아래 있던 배우들도 초조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대 연출은 마이크를 들고 관객들에게 알렸다.
“방금 공연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양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차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관객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들은 대부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무대 위에 있던 이도원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또 죽을 뻔했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아래 깔린 차지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몸을 덜덜 떨었다.
“괜찮아.”
이도원은 그녀를 일으켜주며 떨어진 철골을 보았다. 무대 자체가 주저앉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머리 위에 있던 철골이 떨어졌다.
‘까딱했으면 골로 갔겠군.’
미리 알고 있었기에 반응할 수 있었지, 몰랐다면 몸이 굳어서 떨어지는 철골을 맞았을 터였다.
스태프들이 달려와서 두 사람의 안전을 확인했다.
“괜찮습니까?”
또 한 명은 무대 아래 외쳤다.
“두 사람 다 안전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차지은이 물었다.
“오빠, 다친 데는요?”
“없어.”
이도원은 자신의 몸을 확인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차지은이 불쑥 무릎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왜 없어요? 여기 피나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바지에 빵꾸가 나있고,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스태프가 달라붙어 걱정스럽게 말했다.
“찢어졌어요. 꿰맬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병원 가보죠.”
또 한쪽에서 다른 스태프가 말했다.
“119에는 신고했습니다!”
정작 이도원이 기다리는 건 119가 아니었다. 그는 세트를 등지고 혼란을 틈타 자리를 뜨는 한 사람을 놓치지 않고,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잠시만요.”
이도원은 비틀대며 일어섰다.
그러자 무릎이 얼얼하고 아려왔다.
그 무모한 행동에 차지은이 놀라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내가 범인을 봤어.”
이도원은 짧게 답하며 이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뒤를 밟았다. 비록 한쪽 다리를 절었기에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형사들에게 수갑이 채워지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이거 놔!”
범인, 한태양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미 소년원과 감옥을 전전한 사람답게 수갑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이도원이 그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 김진우가 나타났다.
“너……?”
한태양이 당황해서 외쳤다.
그렇게 불쑥 등장한 김진우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형사들에게 양손을 내밀며 말했다.
“범인을 제보한 것도, 범인에게 이 일을 사주한 것도 바로 저입니다.”
형사들은 벙 찐 표정으로 김진우를 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일단 서로 연행하자고.”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찰차에 타기 전 김진우는 이도원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제 남은 약속은 이도원에게 달려있다는 의미의 제스처였다.
‘결국 공연은 망쳤군.’
이도원은 입맛이 썼다. 결과적으로 그의 목적을 위해 단원들을 고생시킨 셈이었다. 더욱이 차지은은 몸을 상할 뻔했다. 하필 조명이 꺼진 순간을 노려 철골 자체를 떨어트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더 크게 당황했다.
‘약속을 안 지켰어.’
내심 생각한 이도원은 김진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확한 사고 경위를 모르는 눈치인 걸로 볼 때, 계획을 바꾼 건 한태양의 속셈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는 철골을 무너트리는 게 아니고, 소품을 이용해 과실치사를 위장하는 방법으로 일을 진행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든 말든 이도원은 살아남았다.
“달라지는 건 없다.”
이도원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로써 이도원을 살인교사하려던 혐의까지 밝혀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로빈과 김봉민 의원의 좌절을 지켜보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