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71화 (17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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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한국으로 돌아간 이도원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영화 <서커스>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김진우가 구치소를 나오면서 마침내 <서커스>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김진우의 마약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불매운동이 벌어졌지만, 이도원의 복귀 작이자 유태일 감독의 블록버스터라는 점은 이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빡빡한 일정에도 이도원은 중영극단의 창작극 <사실주의 연극>의 대본을 읽고 있었다. 노골적인 제목만큼 공감이 가는 내용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낭만과 순수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었다.

그때 매니저 이진빈이 말을 걸었다.

“단원들이랑 호흡 맞춰보실 시간도 없네요.”

이도원은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이미지 트레이닝 하고 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이진빈을 본 이도원이 설명해 주었다.

“뮤지컬 ‘영웅’ 때부터 함께했던 단원들이야. 연기할 때 템포는 전부 이 머릿속에 있어. 이럴 땐 상상훈련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의식은 우리의 몸을 지배하지.”

이진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하네요. ‘영웅’ 끝난 지 오래 됐잖아요?”

“배우는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기억해야 돼.”

“음…….”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진빈이 연기에 관심을 가지는 건 좋은 현상이었다. 현장에서 배우의 컨디션을 조절해주고, 때때로 연기에 관한 조언이나 날카로운 피드백을 해줄 수 있는 매니저야 말로 일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배우만큼이나 연예계 생리나 연기에도 관심을 가져야할 사람이 매니저인 것이다.

그 뒤에도 이도원은 대본을 보고 이진빈은 운전을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을 하며 한 시간 반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사회가 예정돼 있는 코엑스에 도착했다.

“다 왔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댄 이진빈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형. 이번 영화 평이 장난 아니던데요?”

이진빈은 운전석에서 내리며 말을 이었다.

“역시 흥행 보증 수표답게 엄청 태평하세요. 전 기대되고 떨리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도 스크린에서 나를 보면 기분이 묘해. 특히 초반에는 영화에 몰입하기도 힘들고. 불쑥불쑥 내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집중이 깨지지.”

“음, 영화를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겠네요.”

“아무래도. 현장의 즐거움을 누린 대신, 관객으로서 느끼는 즐거움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지.”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층수를 누른 이진빈이 물었다.

“형, 매일 영화 한 편은 보실 정도로 영화광이잖아요. 그런 점은 아쉽겠네요. 전 미처 그 생각은 못 했어요.”

“그래서 이래저래 스케줄이 안 맞으면 무리하지 않고, 좋은 시나리오를 보고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 연기하고 싶은 욕심보다 영화를 보고 싶은 욕심이 앞설 때. 나보다 더 적합한 배우가 연기하길 바란다거나, 철저히 관객으로 보고 싶다거나.”

“형은 그런 적 없어요?”

“난 내가 해야 돼.”

깔끔하게 대답한 이도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진빈이 졸래졸래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극장 안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도원이다!”“대박…….”

몽롱한 눈빛의 여성 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도원은 남성 팬들에게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반응은 거대한 헤일처럼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드넓은 극장 안이 술렁이는 가운데 안내요원들이 총 동원돼 이도원의 주위를 지켰다. VIP 입장선이 쳐져있었기 때문에 팬들은 일정 범위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선 밖으로 손을 뻗어 악수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차지은이다!”

뒤에서 다시 한 번 술렁였다. 파도가 연달아 밀려와 등을 떠미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앞서있는 이도원이 포토 존에 서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을 각 방향에 비춘 뒤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미니드레스를 입은 차지은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휴……. 정말 체력이 생명이에요. 포토존에 서는 것만으로 이렇게 피곤한 게 말이 돼요?”

“원래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더 피곤한 법이지.”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내 오준식, 심재빈, 박아현, 유태일 감독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김진우는 마약 건으로 인해 영화 홍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입장해 문을 닫은 유태일 감독이 배우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영화는 일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잘 나왔으니까. 이 시간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유태일 감독의 말에 부응하듯 문이 살짝 열렸다.

“감독님, 배우님. 입장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고개를 돌린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그럼, 관객을 만나러 가자고.”

유태일 감독과 배우들은 관객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맨 앞줄에서 함께 영화를 보게 됐다. 관객들은 <서커스>의 주역들과 한 공간에서 영화를 감상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서커스> 오프닝이 끝나자 배우들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화면 안에서 무기상에게 무기를 빼앗는 이도원 일당의 총격 씬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 심재빈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기상 중 하나를 살해했다. 분노조절장애로 쓸데없는 살인을 하면서 경찰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작전에 차질을 준 심재빈을 제압한 이도원이 그의 총구를 머리에 겨눴다. 대사 한 마디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도원은 거친 폭력성과 눈빛만으로 관객을 압도하고 있었다.

연기를 본 관객들은 중간 중간 감탄사를 뱉어댔다.

“연기력은 알아줘야겠어요.”

차지은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흥분으로 달뜬 모습이 귀여웠다.

반면 오준식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마침 스크린에서 오준식과 박아현 부부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오준식은 박아현과 자주 다투면서도 그녀를 끔찍이 생각했다. 범죄자답게 거친 면이 있지만 가정만은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내면연기에 썩 만족하면서도, 이도원의 연기를 보며 하나라도 배우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금방 발전하겠어.’

이도원은 스스로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오준식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스크린에 오준식과 박아현 부부를 보며 외로움을 느끼는 이도원의 모습이 잡혔다. 침착한 눈빛은 고독으로 물들었다. 그는 같은 팀의 오준식과 심재빈을 먼저 보내고, 바(Bar)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지은을 만났다.

‘이도원과 차지은의 케미는 ‘바람’ 때부터 증명됐어.’

유태일 감독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물이 솜에 빨려들 듯 서로에게 정신없이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면서도 일시적이지 않았다. 이도원은 그녀를 하룻밤 상대로 잊지 못하고 연락을 한 것이다.

-나는 삼 초 만에 버릴 수 없는 건 애초에 갖지 않았다. 그건 내가 이 일을 하며 절대 깨지 않는 규칙이었다. 이 규칙을 깬 순간, 난 이 바닥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도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그는 차지은을 선택했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자마자 마지막 한탕을 끝으로 이 바닥을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와 멀리 떠날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먼저 밝혔다.

그 후 차지은은 사랑하는 사람의 직업이 범죄자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도 내비쳤다.

‘훌륭해.’

이도원은 감탄했다.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도원 일당이 마지막 작전을 나설 때 심재빈이 빠졌다. 결국 이도원은 오준식과 둘이 일을 실행했는데, 현장에 그들을 집요하게 쫓던 김진우가 들이닥쳤다. 일에서 먼저 빠진 심재빈이 자신을 홀대하는 동료들에게 억하심정을 품고 배신하여 밀고한 것이다. 그로인해 오준식이 죽는 장면이 나왔다. 팽팽한 총격 씬이 관객들의 숨통을 조였다.

“아!”

오준식이 죽자 객석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서 박아현이 남편의 죽음을 듣고 형사 앞에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장면과 현관문을 닫자마자 오열하는 모습이 나왔다. ‘윤세라 사건’이 그녀에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울음을 쏟게 만들어주었다.

그 다음 순간, 객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건…….’

오준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대한 전율이 그를 덮쳤다.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다.’

오준식을 잃은 이도원의 분노가 묵직하게 상영관 전체를 짓눌렀다. 그는 어떠한 대사보다 강렬한 침묵을 던졌다. 무표정한 얼굴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섬뜩했다.

이내 장면이 전환되며 김진우가 등장했다.

“놈은 이미 달아났다. 지금쯤 중국에 도착해 있겠지. 난 씻고 사흘 동안 못 잤던 잠을 마저 잘 거야.”

그는 의외로 분노하지 않았다.

깨끗이 단념하고 포기하려 하는 순간-.

“옆방에 놈이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감시하던 CCTV 모니터에 이마에 총알구멍이 난 채 죽어있는 심재빈이 드러났다. 그로서 이도원이 도주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김진우는 심재빈이 머물던 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이미 시체만 남았을 뿐, 그새 이도원은 어딘가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김진우는 정신없이 이도원을 추격했다.

한편 이도원은 도주하며 차지은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통보했다. 그는 그녀를 삼 초 만에 버렸고, 사랑보다 복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 대가로 이도원은 결국 김진우의 총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

영화는 엔딩으로 치달았다.

차지은은 그림을 그리다 연필심을 부러트리거나, 멍하니 입술을 깨물다 저도 모르게 피가 맺힌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한 순간에 버려진 상실감에 미쳐가는 역할을 소름끼치게 표현했다.

배우들 간에 겹치지 않는 별도의 촬영분이 많았기에, 영하를 통해 서로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한데.’

서로가 서로에게 감탄했다.

영화가 끝나갈 때 즈음, 유태일 감독이 속삭였다.

“다들 명품 연기를 보여줬지?”

그는 썩 기분이 좋아보였다.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만에 700만 관객을 넘으며 최단기록을 허문 것이다. 그렇게, 유태일 군단은 무서운 기세로 흥행신화를 써 내리고 있었다.

*

2025년 7월 1일.

이도원은 두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연습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단원들 모두가 우려 대신 기대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중영극단 공연 전 리허설을 마치고 곁에 앉은 차지은이 이도원을 힐끗 보며 말을 걸었다.

“오빠. 고작 한 달 연습해놓고, 반칙 아니에요?”

화장 대신 땀이 흥건한 맨 얼굴에 머리카락이 미역줄기처럼 눌러 붙었지만, 그녀를 보는 이도원의 눈빛은 따스했다. 연습을 하고 난 뒤 모든 힘을 뺀 모습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워 보였던 것이다.

‘공연이 좋다.’

이도원은 연습실을 후끈하게 물들이는 땀 냄새가 향기로웠다. 연습실을 가득 채운 열정은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피어나는 배우 간의 신뢰가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이도원은 그런 생각과 함께 절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너야말로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늘긴요.”

볼터치라도 한 듯 차지은의 양쪽 볼이 붉게 물들었다.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아니야. 아주 많이 늘었어.”

그는 시선을 옮겼다. 무대 설치를 완료하고 점검하는 인부들이 보였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한태양,’

이도원의 눈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지은은 찰나에 스쳐간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왜……?’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에 한태양이 있었다.

‘저 사람을 알고 있어?’

그녀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섬뜩한 느낌에 말을 붙이지 못했다.

한편 이도원은 공연장으로부터 나가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김진우였다.

-제보까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

“수고했다.”

이도원이 대답하자 짧게 침묵하던 김진우가 말했다.

-떨리는군. 약속은 지키겠지?

“목숨을 맡긴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이도원은 그저 되물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 아군이 됐다고 해서 갑자기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차가운 말투에 머쓱해진 김진우가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혹시라도 위험할 수 있니 조심하라고. 네가 잘못되면 나도 끝장이니까.

“알겠다. 그럼.”

그는 먼저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단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사고를 예견하고 있는 이도원 만큼이나 긴장한 일색이었다. 높은 낭떠러지에서 외줄을 걸어놓고 기교를 펼치는 것과 흡사한 긴장감이 단원들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배우들 입장해 주십시오!”

마침내 진행 요원의 말이 떨어졌다.

배우들이 무대로 올라가 관객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퇴장할 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건 수백 차례의 공연 경험이 있는 신용운도 마찬가지였다.

“후. 오늘 공연은 나도 긴장되는군.”

그는 이번 공연에 연출자이자 배우로서 참여하게 됐다.

뮤지컬 ‘영웅’ 때부터 많이 친해진 이도원은 전보다 편하게 신용운을 대했다.

“선생님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오늘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에서는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공연을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도원은 그럴 수만 있다면 시도해 볼 결심이었다. 까딱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황에 그런 기지가 발휘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이도원이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있는 그때, 무대에선 단원들을 부르는 손짓이 이뤄졌다. 그의 곁에 있던 신용운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가자.”

타임 슬립 전, 김진우와 한태양으로 인해 사고로 위장됐던 죽음.

이제 바뀐 운명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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