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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사건
2025년 5월 11일 일요일.
김진우의 부상으로 지체되었던 <서커스>의 마지막 씬이 마무리됐다. 모든 촬영이 끝나자 이도원은 어쩐지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건가?’
타임 슬립 전에는 이도원을 죽음까지 내몰았던 작품이었다. 현재에도 레드엔터테인먼트와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생사를 좌우할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크게 데인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찝찝한 기분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그때 오준식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우리 대표님, 표정이 왜 그래요?”
이도원은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촬영답게, 영화에 참여한 주역들이 모두 구경을 와 있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한편 김진우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그는 이도원을 비롯한 배우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모두 고생했네. 다음에 또 보자고.”
다른 이들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김진우는 촬영 내내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유일하게 그 대상에서 제외됐던 이도원만이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수고했다.”
손을 내저은 김진우가 차지은 앞에 멈추었다.
차지은은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거짓말처럼 풀며 물었다.
“왜요?”
김진우가 먹이를 바라보는 독사 같은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연락할게.”
“괜찮아요.”
차지은은 인위적인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교만한 사람과 잘 안 맞아서요.”
거절을 당했음에도 김진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요.”
차지은은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이도원을 힐끔 보았다.
한편 이도원은 둘 사이를 전혀 오해하지 않고 있었다. 차지은의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우랑은 상극이지.’
김진우가 현장을 떠나자, 유태일 감독은 회식 장소까지 이동이 편리하도록 팀을 나눴다.
1차는 촬영장 근처의 소문난 맛 집으로 갔다. 주 메뉴는 샤브샤브였고 예약된 테이블에는 이미 주류와 밑반찬이 깔려있었다.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 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오준식이 나직이 감탄했다. 좌우를 살펴도 같은 회사 동료들이 보였던 것이다.
막내인 심재빈이 씨익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여러 선배님들이 계신 곳에 함께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하.”
“넌 어째 활동 경력이 쌓일수록 아부만 늘어나?”
오준식은 핀잔을 주면서도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아무 걱정 없는 즐거운 모습인 반면에 박아현은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에 가까운 사이인 윤세라가 사고를 입는 사건이 벌어졌고, 아직도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에 마냥 기분이 유쾌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도원은 모른 척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 앉았다. 잇따라 나머지 배우들도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마주보며 착석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이윽고 유태일 감독이 들어섰다. 그는 한자리에 함께 앉은 배우들을 보며 말했다.
“스태프들과 섞어 앉아.”
그 지시에 스태프들이 중간중간 끼어 앉고, 배우들이 분산됐다.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에게 한 테이블을 맡기고, 자신은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며 잔을 들었다.
“제게 <서커스>는 네 번째로 상업화된 영화입니다. 지금껏 촬영했던 저예산 영화들과는 달리 큰 투자금이 들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부담도 컸지만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중 가장 편안한 작업 환경에서 임할 수 있었습니다.”
유태일 감독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도원과 김진우를 비롯해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 모두가 호연을 펼쳐주었기에 물 흐르듯 촬영하는 것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스태프들 역시 세 차례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해진 상태였기에 엔지 컷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 : 촬영이 끝난 후 영화를 완성하는 단계) 후 수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건배!”
건배사를 끝맺은 유태일 감독이 잔을 높이 들자, 스태프들과 배우들도 감개무량한 얼굴로 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촬영기간 동안의 피로는 어디 갔냐는 듯 모두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입가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이 순간의 희열이야말로 영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도원이도 한마디 해야지.”
유태일 감독이 자리에 앉으며 짓궂게 웃었다.
그 말에 따라 이도원이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먼저 촬영 기간 내내 배우들 보다 한 발 앞서 일어나고,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스태프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배우들도 너무 고생 많았고요. 이번 영화의 성과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기대를 갖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두 이 순간을 즐겁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건배!”
스태프, 배우 할 것 없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쳤다. 그때마다 술이 넘실거렸고 사람들의 얼굴색은 점점 빨갛게 무르익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함께 어울리며 웃고 떠든다고 한들, 스태프와 배우의 경계는 명확했다. 그 사이를 넘나들며 잇는 존재는 섭외권이 있는 감독뿐이었다. 하지만 조연출은 언젠가 연출이 되고, 서로 얼굴을 익혀두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되는 것이 이 바닥 생리였다.
“그래서 우리 백 엔터에선 스태프들에게 잘하라고 늘 강조하죠. 스타병 걸리지 않은 개념 있는 배우들이 많다고나 할까요?”
심재빈은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스태프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는 백 엔터테인먼트 홍보대사라도 된 것 마냥 자부심을 갖고, 잔뜩 흥분해 외치고 있었다.
스태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하긴. 확실히 작업하기 편했어.”
“약속 시간 안 늦는 게 제일 좋았다니까?”
“엔지 안 내는 게 최고로 멋져 보였다고.”
그들을 지켜보던 이도원이 오준식에게 물었다.
“재빈이 원래 저래?”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오준식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고개를 저은 이도원이 말했다.
“그냥 반말 하자. 못 하겠다.”
“사실 나도 엄청 불편했어… 요.”
이미 적응이 되어버렸는지 오준식은 말을 놓는 걸 어색해했다. 이도원이 미국에 간 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기에 더욱 그랬다.
두어 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슬슬 낙오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집에 가는 사람도 있었고, 취한 사람도 생겨났다. 배우들 중에는 술을 물처럼 들이붓던 박아현이 취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윤세라를 추억했다.
“제가 챙길게요.”
이도원에게 속삭인 차지은은 본인도 취기가 올랐으면서도 그녀를 잘 챙겼다. 틈틈이 화장실에 데려가 변기에 오바이트를 하도록 도우며 제 머리끈까지 풀러 묶어주었다. 세심한 배려를 지켜보던 오준식이 은근슬쩍, 이도원에게 운을 뗐다.
“난 두 사람 사이를 꽤 오래 봐왔잖아.”
이도원은 말없이 눈길을 주었다.
그에 오준식이 말을 이었다.
“거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봤다고 할 수 있지. 너, 저만한 여자 없다. 저런 여자가 널 좋다고 하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 거야.”
이도원은 내심 인정했지만 겉으로 수긍하진 않았다.
“그냥 존댓말 하라고 할 걸 그랬다.”
“취소하기 없다.”
오준식이 날름 대답하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난 너 미국 간 동안에도 지은이랑 같이 활동했잖아? 옆에서 본 바로는 정말 좋은 여자야. 그래서 배우로서는 조금 부족한지도 몰라.”
그는 농담조로 덧붙였다.
“사실 연기를 헉 소리 나게 잘하진 않잖아. 지독한 노력에 비해선 아쉽지.”
이도원은 빤히 그를 직시했다. 분명 오준식은 연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이번 영화에선 조연을 맡았기에 김진우보다 조금 이미지가 약했다지만 연기력만 놓고 비교해보면 큰 손색이 없었다.
차지은이나 박아현이 어느 정도 끼와 재능을 가진 배우라면, 오준식은 이도원과 같은 대기만성형 배우인 것이다.
‘이대로만 발전하면 준식이는 좋은 배우가 될 거야.’
이도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준식이 스스로 자만하지 않도록 일침을 놓았다.
“연기력은 평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평등한 노력을 한다는 가정 하에 본다면 연기력이라는 건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음… 그래.”
오준식은 주춤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도원의 말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매번 볼 때마다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상대가 바로 이도원이였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자만했어.’
그는 내심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때쯤 1차 회식이 끝났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샤브샤브 집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이쑤시개를 찔러 넣고 대화를 나누었다.
귀가할 사람은 귀가하고, 남는 사람들만 남았다.
*같은 시각, 김진우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임소군을 만나고 있었다.
“전 레드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올 생각입니다.”
그는 유창한 중국어로 곧장 본론을 꺼냈다.
임소군은 볼에 점이 있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왜죠?”
“그들이 절 토사구팽시켰습니다.”
직설적인 김진우의 말을 들은 임소군이 슬쩍 웃었다.
“내 비즈니스 파트너는 김진우가 아닌, 레드엔터테인먼트예요. 김진우 씨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긴 하지만 레드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을 모두 아우를 수는 없답니다.”
“알고 있습니다.”
김진우는 당황하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서 레드엔터테인먼트 보다 훨씬 좋은 배우들을 갖고 있는 백 엔터테인먼트로 옮겨갈 생각입니다. 머지않아 레드엔터테인먼트보다 몇 배는 강력한 파트너를 소개해 줄 수 있게 되는 셈이죠.”
임소군의 표정이 살짝 떨렸다.
“백 엔터테인먼트는 우리도 주목하고 있는 곳이에요. 자금을 할리우드 쪽으로 투자하고 있어서 여력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김진우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배우를 투입하려면 큰 자금이 들겠지만, 제게 들어온 광고만 가져가도 백 엔터테인먼트는 중국시장을 돈 한 푼 안들이고 공략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임소군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내 술과 간단한 안주가 나오자, 그녀는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말했다.
“잠시 화장실 좀.”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소군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확실히 넘어왔어.’
기분이 좋아진 김진우는 먼저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는 집 키를 공유하고 있는 매니저가 자신의 아파트에 마약을 가져다 둔 것을 짐작도 못한 채로, 약물이 섞인 와인을 들이켰다. 이미 여러 번 마약이 주는 쾌감을 즐겨왔던 그는 머지않아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화장실을 간다던 임소군도 삼십 분째 오지 않고 있었다.
‘함정이다!’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김진우가 서둘러 일어나려 하는 순간, 주위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 셋이 다가오더니 경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김진우 씨 맞습니까?”
“맞습니다.”
김진우가 대답하자 형사가 말했다.
“전 마약 전담팀 채용욱 경사입니다. 김진우 씨께서 마약으로 추정되는 약물을 복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영장은요? 내가 마약을 복용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명의상 차량 소유주인 전유진 씨 동의하에 김진우 씨가 타고 온 차량을 수색했습니다. 그 결과 소량의 마약이 발견됐습니다. 또한 현재 이로빈 대표의 명의로 된 김진우 씨의 오피스텔을 동의하에 수색한 결과 그곳에서도 대량의 마약이 발견됐고요. 말씀하신 수색영장은 신청해 둔 상태며, 추가적으로 김진우 씨 소유의 아파트도 수색할 예정입니다.”
전유진은 차량 소유주일 뿐 아니라 김진우의 스폰서였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김진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미 마약에 손을 대기 전 여러 사례들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약사범의 경우 초범이면 감량이나 선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마약이 여기저기서 대량으로 발견됐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여기에 김봉민 의원이 힘을 보태면 완전히 매장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씨발.’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은 김진우가 물었다.
“누가 신고했습니까? 오피스텔이나 차량 소유주는 용의자 아닙니까?”
“절차를 밟고 차차 수사할 예정입니다. 일단 김진우 씨부터요. 그러고 보니까, 지금도 약 한 것 같은데… 맞죠?” “하. 이런 식으로 날 엮겠다.”
김진우는 눈을 번뜩였다.
그러든 말든, 형사는 김진우를 붙잡으며 말했다.
“서로 가시죠.”
저항해 봐야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김진우가 끌려 나가자 눈을 빛낸 형사가 현장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마약이 대량 나온 걸로 봤을 때 동료 연예인들의 마약 판매책일 수 있다. 김진우의 행적을 밟아서 샅샅이 조사한다. 이 형사는 해당 기관에 CCTV 공개 요청하고, 박 형사는 김진우와 만났던 동료 연예인들 만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