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65화 (165/178)

< 뜻밖의 사건 (1) >

당일 촬영이 취소된 이도원은 사무실로 향했다.

차 안에서 병원으로 연락을 해본 이진빈이 말했다.

“단순한 타박상이라고 하네요. 뼈에 지장 없어서 다행이에요.”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이진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신 거예요?”

이도원은 차 창문을 열며 바람을 쐬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진빈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이진빈은 대강 얼버무렸다.

“하긴, 김진우가 좀 뻔뻔하긴 했죠. 레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면서, 우리 회사로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이도원은 짤막하게 말했다.

이진빈은 뒷말을 기다렸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떤 해명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홧김에 나온 실수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편집하고, 홍보하고, 개봉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지만 오늘 하루면 마무리됐을 촬영 일정이 자신 탓에 지체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식점을 예약까지 해놓은 쫑파티도 함께 미뤄졌다.

‘모두에게 피해를 줬어.’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주연배우인데다 지금껏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했으니 망정이지, 입지가 적은 배우였다면 욕을 태백이로 얻어먹었을 터였다.

불편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쯤 밴이 백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이진빈이 백미러로 그런 이도원을 돌아보았다.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촬영한다고 며칠 집에 들어가지도 못 했을 텐데.”

머뭇거리던 이진빈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머지않아 그의 사무실로 팀장들과 과장들이 불려 다녔다. 그동안 일일이 확인하지 못했던 내용이나 이상백의 관리 하에 진행됐던 일들을 검토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오후를 보내던 이도원은 배에 꼬르륵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시간을 보았다. 벌써 저녁 여섯 시였다. 새벽에 야채주스를 마신 뒤로 쫄쫄 굶어서 그런지 허기를 인지하기 무섭게 바짝 배가 고파왔다. 따라서 인터폰을 켜고 비서실에 전했다.

“이상백 대표님 좀 연결해 주세요.”

전화가 백 프로덕션 대표실로 연결됐다.

곧 수화기 너머로 이상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으로 전화하지 않고, 왜?

“나가 계시면 할 수 없고, 사무실에 계시면 저녁식사 함께 하려고 연락드렸어요.”

-또 무슨 이야길 하려고 그러나… 불안한데?

능청스러운 물음에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정말 그냥 식사입니다.”

-그래. 그럼 회사 근처 <바다소리>에서 일곱 시에 보자고. 안 그래도 할 말이 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서류 검토를 마무리한 이도원은 지갑과 코트를 챙겨서 나갔다. 그는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바다소리’로 갔다. 가게 안에 들어가자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물어보았다.

“예약하셨습니까?”

“아니요. 두 명입니다.”

이도원이 부정하자 종업원은 자리를 안내했다. 이윽고 작은 룸에 들어가 앉은 그는 휴대폰으로 최신 뉴스의 경제면과 연예면을 훑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이로빈 대표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기에 경제와 연예, 양쪽 헤드라인을 나란히 장악하고 있었다.

관련기사를 읽고 있던 차에 이상백이 도착했다. 그는 일어나는 이도원을 도로 착석시킨 뒤 코트를 걸고 마주 앉았다.

“요즘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던데, 어떻게 시간이 난 게냐?”

질문을 받은 이도원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장에서 사고를 좀 쳤습니다. 김진우를 부상 입혀서 촬영이 중단됐어요.”

“쯧, 그런 일이… 많이 다치진 않았고?”

이상백이 묻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이번 주 안으로 스케줄이 다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조심해라. 얄밉다고 때리고 그러면 안 돼.”

이상백은 김진우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평소 건방진 태도를 떠올리며 농을 던졌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하실 말씀이 있으셨다고요?”

그때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이도원이 들어올 때 미리 주문해 둔 스시와 소주가 나왔다. 이상백의 취향을 잘 알고 있기에 발휘한 센스였다.

슬쩍 웃은 이상백이 술잔을 채우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 무지막지한 희소식이 하나 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이면 굳이 만나서 알려주려 했겠냐?”

이도원으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표님이 지금처럼 흥분하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무슨 일이죠?”

이상백은 술을 마시기도 전에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백 프로덕션으로 투자 요청 건 하나가 들어왔다.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연출하는 블록버스터 대작이더구나.”

제임스 윌리스라면 이 시대 가장 인정받는 명장 중 한 사람이었다. 노익장임에도 세련된 연출력으로, 아직까지 영화를 낼 때마다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고 있었다. 감독 이름만으로도 대박이 확실한 보증수표고, 투자사들이 서로 투자하고 싶어 경쟁이 붙고 있을 것이다. 전설과도 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켜 온 영화감독이 한국의 한 투자사에 투자제안을 했다는 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입이 딱 벌어질 투자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이도원은 절로 의문이 나왔다.

그러자 이상백이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아스라이>를 보고, 이번 영화에 널 쓰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다더구나. 그의 말은 곧 법인지라, 배급사에선 계열사 백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프로덕션으로 직접 연락을 준 게다. 그것도 투자 대열에 끼워주겠다는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달고서.”

하긴, 제임스 윌리스의 영화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이 한국의 한 배우에게 거절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섭외를 진행한 책임자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될 터였다.

이도원으로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꿈만 같은 소식을 접한 그는, 초조한 마음에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왜 하필 저한테 그런 제안을…?”

“그 이유는 제임스 윌리스 감독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지.”

이상백은 농담조로 덧붙여 말했다.

“사실 나도 <아스라이>가 지금까지 중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준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그 감독이 왜 수많은 톱 배우들을 고사하고 널 선택했는지 모르겠구나. 시나리오 상 주인공이 원래 동양인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도원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역시 어려서부터 제임스 윌리스 감독의 작품들을 보며 자라왔다. 그런데 제임스 윌리스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오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경사인 것이다.

“엄청나게 설렙니다.”

그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미팅은 언제죠?”

“8월이니까 <서커스> 개봉하는 것까지 잘 보고, 쉬다가 출국하면 된다.”

설명해 준 이상백이 덧붙였다.

“축하한다. 네가 훌륭한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은 네가 학창시절 때부터 했지만… 넌 항상 날 놀라게 만드는구나.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이도원은 공손하게 고개를 돌려 술잔을 비우고 빈 잔을 내려놨다.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들뜨는 감정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마음 편히 기뻐할 수도 있지만, 그는 영화가 완성되고 세상에 나오기 전까진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이도원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미국행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백 엔터테인먼트의 일을 처리해준 이상백의 믿음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이상백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답했다.

“우리 회사에 좋은 배우를 영입했던 것도, 지금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네 공이 아니냐? 난 그저 모두가 꿈으로 그친 일을 해나가는 널 보며 부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이도원이 대답 대신 술을 따르자 이상백이 계속 말했다.

“오늘은 일 이야기 말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자꾸나. 넌 그야말로 소처럼 일만 해왔다. 내가 본 바로는 잠시도 쉬지 않았어.”

그 말처럼, 이도원은 편안한 마음으로 술자리에 임했다. 철두철미한 모습은 서서히 내려놨다. 두 사람의 입에서는 첫 만남을 비롯해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우여곡절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지난 추억들을 되짚던 두 사람은 세 시간 정도 흐른 뒤에야 최근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이상백은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껄껄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뻔뻔하게 백 엔터테인먼트로 오고 싶다고 말했다고?”

김진우의 이야기를 한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됩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와 계속 엮이는 일이 생기는 것도 불편하고요.”

“그럴 수 있겠지. 신중하게 고민해보고 판단해라. 어차피 결정은 대표인 네 몫이니까. 그나저나, 그렇다고 동료 배우를 후려친 건 좀 너무했다고 본다.”

이상백이 놀리듯 나무라자, 이도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일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을 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

이로빈은 주먹으로 책상을 때렸다.

“뭐? 일정이 미뤄졌다고?”

“예. 촬영 도중 김진우가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의 말을 들은 이로빈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우리 계획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문제는 김진우가 부상을 핑계로 쫑파티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많이 다쳤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대답한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조만간 김진우를 스폰하고 있는 임소군이 들어온다고 해서, 아마 그쪽을 만나려고 일정을 비워두는 것 같습니다.”

“골치 아파졌군. 이도원과 동석하지 않으면 둘을 엮을 수가 없는데.”

“예. 더구나 임소군은 건드릴 수 없는 상대가 아닙니까?”

이로빈은 난처해졌다.

영화 <서커스> 쫑파티 때 이도원과 김진우를 마약으로 엮을 생각이 무산된 것이다. 두 배우가 각각 다른 곳으로 간다면 동시에 한 사건으로 묶을 수 없게 된다. 더욱이 김진우가 만나는 임소군은 레드 엔터테인먼트가 중국으로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사업 파트너의 장녀였다. 그녀가 자리한 곳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면 여러 사람이 곤란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유추한 비서실장이 제안했다.

“김진우는 조금 미루시고, 이도원부터 손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편이 더 안전할 텐데요.”

그에 이로빈은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소리! 이도원이 김 의원에게 찍힌 건 모두 김진우 때문이다. 이도원이 우리한테는 눈엣가시일지 모르지만, 김봉민 의원에게는 관심 밖 인물일 뿐이야. 김 의원이 가장 처리하고 싶어 하는 건 김진우라는 뜻이지. 우린 김 의원의 눈에 다시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 이도원에 관한 사사로운 복수는 그 다음이다.”

비서실장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상황이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인 이로빈이 턱을 쓸며 대답했다.

“임소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김진우를 처리해야 된다는 뜻이지.”

“하지만 대표님. 김진우한테만 약을 탄다고 해도, 동석하고 있던 임소군 역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무혐의 처분을 받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잘 빼내서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라는 거야. 끝까지 나와 함께 한다는 자네 말을 지킬 순간이 왔다는 뜻이지.”

비서실장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김진우가 입을 열기 전에 임소군은 중국으로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잘 해야 돼.”

그리 말한 이로빈이 누차 강조했다.

“이번 일에 우리 회사의 명운이 달렸어.”

< 뜻밖의 사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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