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64화 (164/178)

< 역습 (9) >

2025년 4월 25일.

영화 <서커스> 촬영은 막바지에 돌입했다. 뜻밖에도 두 달여 촬영 기간 동안 제작 과정은 순항했다.

그 와중에 이도원은 간간히 레드엔터테인먼트의 동향을 살폈다. 이로빈은 ‘윤세라 사건’을 계기로 불구속 입건되어 조사를 받는 중이었다.

현장으로 가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이진빈이 물어왔다.

“형, 이로빈이랑 레드 엔터요.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유야무야 되면 어쩌죠?”

대본을 보던 이도원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아마 이번에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서커스>에 외압을 행사했던 일과 엮여서 영화가 개봉하면 앞으로도 쭉 회자될 거야. 더구나 전과 달리 기획 기사로 줄줄이 나가면서 크게 이슈가 됐기 때문에 관심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테고.”

이진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략적인 지도는 이상백 대표님이 그리셨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떤 경로로 모든 증거들을 수집했던 거예요?”

“이로빈은 그동안 회사 경영을 하면서 든든한 인맥을 믿고 적을 만들어왔어. 겁 없이 부정한 일도 서슴지 않았지. 지난 번 날 겨냥해서 KAS국장 딸이 연루된 스폰서 의혹을 만들기도 했고.”

“원한을 많이 샀군요.”

“그래. 그렇게 적의 적들이 아군이 된 거지. 이로빈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소모전을 하고 싶지도 않던 참에 총대를 메 줄 사람이 나타났는데 협조를 안 하고 배기겠어?”

“쥐도 새도 모르게 물밑 작업을 해두었던 거예요?”

그 질문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은 반드시 나타나. 무슨 일이든 잘 풀릴 때 문제 대비를 해두어야 하는 법이지. 이건 나도, 이 대표님도 같은 생각이야.”

“와우! 두 분 팀워크가 장난 아니시네요.”

이진빈이 호들갑을 떨었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없어야 정상이지.”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대답한 이진빈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스태프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형이랑 차지은 씨랑 사귄다고 말입니다.”

“왜?”

“키스씬, 배드씬 때 분위기가 야릇하셨다고…….”

“오해다.”

딱 자른 이도원이 덧붙여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고백 안 했어.”

“헐.”

입을 딱 벌리며 놀란 이진빈이 이어 물었다.

“그럼 형님께서 차지은 씨를 마음에 두고 계시다, 뭐 그런 건가요?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대본만 보시면 안 됩니다.”

이도원은 대본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현장에서 똥 싸면 네 덕이다. 궁금한 게 뭐야?”

“차지은 씨는 남자들의 우상이라고요.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 근데 어떻게 형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거죠?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차지은 씨 팬클럽 간부로서 꼭 알고 싶습니다.”

이진빈은 제법 진지했다.

반면 이도원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백미러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둘 이야기를 꼭 알아야겠어?”

“알아야 합니다. 공인이시잖아요.”

전에 없이 강경한 모습이었다.

이진빈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형이 먼저 고백하신 거겠죠? 대체 어떻게 그런 미녀의 마음을 빼앗은 겁니까?”

“여배우도 사람이다.”

대답하는 동시에 이도원은 미소를 띠었다. ‘저도 평범한 여자예요’라고 말하던 차지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한편 이진빈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차지은 팬 카페 일원으로 활동해왔고, 심지어 카페 간부였다. 고등학교 시절이나 군대에서 조차 선후임들 몰래 팬레터를 쓰기도 했다. 그는 백 엔터테인먼트 매니저가 된 후 차지은을 종종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운 사람이었다.

‘차지은 매니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진빈은 괜히 이도원이 야속했다.

이도원은 백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소속 배우 중 가장 큰 인지도를 가진 배우였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담당 배우가 차지은이 아닌 이도원이란 사실이었다. 허황된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이진빈이 다시 입을 열어 물음을 던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도원은 더 받아주지 않고 귀마개를 꼈다. 그가 대화를 단절하고 대본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진빈은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부럽다. 중학교 때부터 내 이상형을…….”

두 사람은 삼십 여분이 더 걸려서 현장에 도착했다.

이번 장면은 이도원과 김진우가 마지막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영화의 라스트 씬을 마지막에 촬영하게 된 상황인 것이다.

이도원과 김진우가 겹치는 장면은 지금껏 딱 한 번 이었다. 두 사람이 쫓고 쫓기는 장면이 교차돼서 나올 뿐 한 프레임(frame : 영화 필름 한 장)에 등장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서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재회한 김진우는…….

“영화 촬영, 시작과 끝을 함께하게 됐군.”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김진우가 먼저 말을 붙인 것이다.

이도원이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친밀한 관계였던가?”

“적이 될 것도 없지.”

김진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나는 곧 레드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올 예정이다. 주변에서 듣기로, 백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이도원은 그가 태도를 바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고 있지만 내심 불안한 것이다. 레드엔터테인먼트를 나온다면 갈 곳이 없었다. 아버지인 김봉민 의원의 외압으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는 기획사는 백 엔터테인먼트뿐이었다.

사정을 알고 잠시 침묵하던 이도원이 물었다.

“뭔가를 요구하려면 당당하게 밝혀라.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백 엔터 소속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건가?”

한차례 눈꺼풀을 떤 김진우가 짧게 답했다.

“그래.”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처럼 보였다.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이도원에게 부탁을 하는 것도 속이 쓰린데, 밑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김진우가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한국에서 활동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이도원은 현장에서 길게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대답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하지. 사무실로 한번 와.”

김진우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도원은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김진우.’

배역 때문에 자신을 살인교사 했던 자. 그 덕분에 20년 전으로 돌아와 지금의 삶을 살 수 있게 됐지만, 죽음의 순간 느낀 끔찍한 기억은 잊을 수 없었다. 물론, 타임 슬립을 하며 운명이 바뀌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번 생에서는 김진우와 원수지간이 아니었다.

‘용서해야 하는가?’

이도원은 스스로 자문했다.

김진우는 여전히 이기적이었으며 성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무려 20년을 앞선 이도원을 따라올 수 없었지만, 만약 지난 삶에서처럼 승승장구해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면 김진우는 더욱 이기적이고 물불 가리지 않는 인간이 됐을 터였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비도덕적인 일이라도 합리화를 한다. 비도덕적인 일을 해서 성과가 있고 들키지 않는다면 점점 더 대담해졌겠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 김진우다.’

용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도원은 우연찮게 김진우가 자라온 환경을 알게 됐고 습관처럼 그의 심층구조를 분석해 보았다.

‘김진우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이 세상에 혼자였기 때문에 항상 전후 사정 생각하지 않고 원하는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또한 김봉민 의원은 김진우의 입을 막기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퍼부었을 테고, 김진우는 원하는 것을 대부분 가져왔을 터. 한국으로 온 뒤에는 훤칠한 외모와 독보적인 연기력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 테고, 나만 없었어도 탄탄대로를 걸었겠지.’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김진우가 굳이 살인교사라는 범죄를 저질렀을 정도로 <서커스>라는 영화가 큰 의미를 가졌었다는 사실이었다.

‘왜지?’

그 이유를 현실의 김진우에게 묻는다 해도 알 수 없을 터였다. 오직 과거의 김진우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도원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죽어야 했던 이유조차 알아낼 수 없는 건가?’

그런데 김진우는 구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이도원으로서는 고해를 들을 대상도, 복수를 할 대상도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저 이제는 과거를 잊고 현실에 충실 하라는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사고는 찰나에 이루어졌다. 그 짧은 순간 만에 이도원의 복잡한 심경을 읽은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얼굴색이 좋지 않은데.”

“아닙니다.”

짤막하게 대답한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촬영 시작하시죠.”

그는 김진우가 기다리고 있는 현장으로 갔다.

배우의 내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태일 감독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배우가 말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었다. 캐물어봐야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별수 없이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작동했다.

그 순간 유태일 감독의 신호가 이어졌다.

“레디, 액션.”

이도원은 피 분장을 한 채로 K-1 소총을 들고 숨었다.

김진우는 리볼버 M60, 38구경 권총을 겨냥한 채 그를 쫓았다.

숨 막히는 추격적은 카메라 세 대가 담았다.

그 중 두 배우를 조이는 풀 샷.

서로 벽 하나를 등지고 선 상태로, 김진우가 말했다.

“투항해라. 비록 적이지만 널 죽이면 기분이 불쾌할 거야.”

이도원은 K-1의 탄창을 확인했다. 총알이 한 발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갈대밭으로 총을 던졌다. 그 소리를 들은 김진우가 총이 던져진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고 천천히 접근했다.

순간 이도원이 벽에서 튀어나오며 김진우를 덮쳤다. 함께 쓰러진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했다.

카메라가 바짝 붙었다.

그 순간.

퍼억!

이도원의 팔꿈치가 김진우의 흉부를 강타했다.

“커억!”

김진우가 비명을 질렀다.

스태프들이 화들짝 놀랐고, 유태일 감독도 촬영을 중단했다.

“컷, 컷!”

조연출이 황급히 달려가서 김진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도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찰나의 눈빛에서, 유태일 감독은 포착해 낼 수 있었다.

‘일부러 세게 때렸다?’

의외였다.

지금껏 이도원은 감정에 의해 촬영을 망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미국 촬영 당시, 텃새를 부리는 영국 배우에게 얼굴을 얻어맞아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촬영 생각뿐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도원이! 잠깐 이리 와봐.”

이도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왜 그랬냐?”

왜 일부러 세게 가격했는지 추궁하는 것이다.

이도원은 대답하기 전, 쓰러져 있는 김진우를 보았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도원이 유태일 감독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습니다.”

“뭐가?”

유태일 감독이 재차 물었다.

“대체 뭐가 널 화나게 만들었지?”

이도원은 이실직고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답답한 상황과 심경을 모두 토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도 허황되고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왠지 힘에 부치는 기분으로, 그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 얘긴 진우한테 해.”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스태프들에게 지시했다.

“진우 병원 데려다주고, 오늘 촬영은 여기서 마무리 한다.”

< 역습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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