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63화 (163/178)

< 역습 (8) >

“컷! 엔지.”

벌써 열다섯 번째 엔지였다.

차지은은 머릿속이 백지화됐다. 도무지 혼미한 정신을 붙잡기 힘들었다. 그녀에게 이번 장면은 연기가 아닌, 현실적으로 직면한 문제였다. 이도원에게 품은 오랜 감정을 재확인하는 것밖에 안 됐다.

“…죄송해요.”

차지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강도 높은 노출은 없다지만, 키스씬에서 배드씬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부담을 느낄만한 부분이기 때문에 스태프들은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건 이도원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준비되면 얘기해.”

응원을 보낸 이도원은 속으로 고민했다.

한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키스 씬 하나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분장 팀은 배우들의 입술이 부르트지 않도록 립 클로즈를 발라주었다.

“휴우.”

차지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캐릭터 설정을 바꾸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생각한 그는 유태일 감독을 쳐다봤다.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는 유태일 감독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배우들, 잠깐 와보세요.”

마침내 유태일 감독의 말에 이도원과 차지은이 모니터로 갔다. 잠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유태일 감독은 커피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도발적인 매력의 여주인공을 그렸지만, 사실 분량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성격을 바꿀 수 있어.”

“감독님.”

차지은은 자신 때문에 시나리오가 영향을 받는 게 싫은지, 불편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유태일 감독은 합리적인 판단을 우선시했다.

“지은이가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가 아니야. 계속 찍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장면이 나오겠지. 하지만 지금 지은이의 감정을 살려서 촬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운 장면으로 연출될 것 같아서 바꾸자는 거야.”

차지은은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태일 감독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발랄하고 자유분방하되, 순수한 내면을 가진 느낌으로 가자. 지은이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연기하면 돼. 그리고 도원이는 거칠게 스킨십을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가는 걸로.”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진즉 캐릭터 설정을 수정하지 못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성격 수정을 하게 되면 현재까지 촬영한 차지은 분량을 엎고, 다시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시 촬영할 것 같진 않은데.’

유태일 감독은 곧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는 지난 차지은 분량을 돌려보며 조연출에게 동의를 구했다.

“대사는 많지 않으니까, 끈적거리는 음악 대신 맑고 튀는 걸로 깔고, 명도 좀 조절하면 나오지 않겠어?”

“글쎄요… 작업해 봐야 알겠지만, 선배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조연출은 유태일 감독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배우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하던 장면 계속 가지.”

“예.”

“후우…….”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반면 차지은은 결연한 다짐을 했다.

힐긋 그녀를 본 이도원이 말했다.

“잘하려고 하지 마. 테이크 수에 구애받지도 말고. 아까 내가 말했듯이,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겨.”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걱정 말라는 의미였지만, 얼마나 긴장했는지 더 확실히 보여준 꼴이 됐다. 하지만 이도원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네?”

이도원과 마주 선 차지은이 되물었다.

그러자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말했다.

“나도 비슷한 감정이야. 떨리고 두근두근 해.”

그가 덧붙였다.

“이전까진 캐릭터 성격 때문에 거친 표현 방식으로 연기했지만 이제부턴 더 내 마음과 가까운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지은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도원의 말은 간접적인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물을 새도 없이,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레디, 액션.”

이도원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다가 얼굴을 가져갔다.

차지은이 그 흐름에 홀리듯 눈을 스르륵 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고, 부드럽고 촉촉한 촉감에 심장이 짜릿했다. 한참 서로의 입술을 느끼던 그들은 조금 더 딥 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카메라감독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촬영을 했다. 두 배우가 어렵사리 키스를 성공한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건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노력으로 자연스러운 키스 씬이 나오자 유태일 감독이 지시했다.

“컷, 오케이!”

마침내 떨어진 오케이 사인이었다.

이도원은 차지은과 천천히 떨어졌다. 아직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이어서 고개를 푹 숙이며 침묵했다.

그런 차지은을 가볍게 안고 등을 두드리며 이도원이 빙그레 웃었다.

“수고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연출이 유태일 감독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제법인데요?”

“그렇게 튕기더니… 능구렁이 같은 녀석.”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태일 감독은 기쁜 얼굴을 했다.

키스 씬을 무사히 끝내자 둑이 터진 듯했다. 드디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 것이다.

‘휴우.’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차지은은 침대에 누웠다. 산 넘어 산이었다. 키스도 모자라 이번에는 스킨십이라니. 그녀는 여배우이기 전에 여자로서 엄청난 부담감이 들었다. 특히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곤혹스러웠다.

비록 차지은보단 덜했지만, 그건 이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이십 대 중반을 넘긴 나이였지만 이번 생에서는 여자와 스킨십을 했던 적이 없었다. 지난 삶에서는 경험이 있었지만, 너무 퇴색된 기억이었다. 하지만 가늘게 떨고 있는 차지은에게 어설픈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허세 부리긴 싫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적어도 한쪽은 능숙해야, 나머지 한 명이 덜 불안할 터였다.

두 배우의 미묘한 공기를 비집고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준비됐으면 액션.”

유태일 감독은 장난기를 보였다.

반면 직접적으로 촬영을 하는 스태프들은 긴장을 유지했다. 민감한 촬영이기에 최대한 실수 없이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씬일수록 현장 자체가 가벼운 분위기가 되면 배우들은 더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정신 차리자.’

단단히 마음먹은 이도원은 이도원이 차지은의 곁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었다. 현장의 공기와 침대 시트는 차가웠다. 그런 가운데 살과 살이 맞닿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부드러운 감촉에 이도원과 차지은 모두 찌릿찌릿한 느낌을 맛보았다.

마이크에도 잡히지 않도록 꾹 억눌러서 날숨을 뱉은 차지은은 이도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대사를 쳤다.

“당신이 좋아요.”

진심이 느껴졌다.

이도원은 빤히 그녀를 응시했다.

점점, 촬영 현장이라는 사실이 뇌리에서 지워졌다.

둘만의 공간으로 변모한 침대 위에서, 한 이불을 덮고 누운 이도원이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나도 네가 좋아.

*

그 시각, 레드엔터테인먼트.

이로빈은 독사같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책상 위에는 경찰서에서 온 소환장을 비롯해 투자사들의 투자금 반환 요청, 여러 TV프로그램에 예정돼 있던 소속 가수나 배우들의 계약 파기 문서 등이 나열돼 있었다.

“꼬리를 자르려고 안달이 났군.”

이로빈은 이를 으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어두운 표정의 비서실장이 보고했다.

“대표님. TV프로그램 섭외 취소 등은 모두 방송국장이 직접 내린 지시라고 합니다.”

“그렇겠지. 다음은 주변 기획사들을 이용해서 우리 소속사 애들을 빼 갈 거고.”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공든 탑을 쌓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그런데 무너지는 건 두 달도 걸리지 않는군. 사실 백 엔터나 이도원을 원망할 일은 아니야. 김봉민 의원이나 차기열 회장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직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이로빈은 고개를 저었다.

“김봉민 의원만 없다면 돈으로 막을 수 있겠지만… 김봉민 의원이 버티고 있는 이상 공권력을 매수할 순 없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김진우와 이도원을 촬영에서 제외시키면 밀어준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실패했을 때 책임도 져야 할 거라더군. 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고, 사실 백 엔터테인먼트가 언론을 이용해 이 사건을 문제 삼은 순간부터 예정돼 있던 일이었어. 자네는 초기부터 나와 함께 했지?”

비서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예. 열 평 남짓한 대표님 오피스텔에서부터 였죠. 회사가 클수록 변변한 학벌도, 능력도 없는 전 막막했습니다. 제 밑에 애들이 치고 올라오니까요. 그런데도 곁에 두고 끝까지 챙겨주신 분이 대표님입니다. 저는 대표님과 함께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 말에 이로빈이 고개를 저었다.

“높이 올라가 본 사람은 언제든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반대네. 높이 올라갔을수록 떨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법이야. 두 번이란 없네. 난 이제라도 이도원과 김진우를 무너뜨리고 김 의원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야.”

비서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불편한 표정을 감추고 물었다.

“제가 할 일을 알려주십시오.”

이로빈의 눈이 순간 악의와 광기로 물들었다.

“두 놈을 마약 사건으로 엮을 생각이네. 성공만 한다면 놈들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어. 뒤처리는 김 의원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이로빈의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번 일로 차기열 회장의 손해가 막심한데, 만약 차기열 회장이 김 의원에게 딴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독박을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표님.”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이로빈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고비만 극복하면 손해 본 부분은 복구해 준다고 적당히 어르고 달래야지. 차광렬 전 회장이라면 모를까, 차기열 회장은 김 의원의 입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네. 김 의원도 우리가 아직 필요한, 잘 길들인 사냥개란 사실을 확인하면 우릴 버리지 못할 거야.”

“알겠습니다.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김진우와 이도원만 도려내면 되는 겁니까?”

“그래. 난 김 의원님께 연락해보도록 하지.”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에서 나갔다.

다음으로 이로빈은 김봉민 의원의 비서실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김봉민 의원의 비서실장 남대경이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레드엔터테인먼트 이로빈 대표입니다.”

그 말에 남대경이 다시 물었다.

-이 대표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혀끝이 날카로웠다.

이로빈은 녹음 기능을 켜고 대답했다.

“의원님 계십니까? 지난번 부탁받은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대답한 남대경이 덧붙여 말했다.

-누구에게 어떤 부탁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의원님과 관련된 일은 아닐 겁니다. 누군가 의원님을 사칭한 일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면, 사무실로 직접 방문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해보도록 하시죠.

‘미꾸라지 같은 새끼.’

마치 녹음한다는 것을 훤히 안다는 듯이 대응하는 남대경을 보며 이로빈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사무실로 방문하지요.”

-예, 그럼.

남대경이 전화를 뚝 끊었다.

이로빈은 다음으로 차기열 회장에게 전화를 걸고 이번에도 녹음 버튼을 눌렀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져 독박을 쓰게 됐을 시, 곤경을 탈출할 대비책을 마련해 놔야 했다. 신호음이 들려오고, 머지않아 차기열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이 대표, 미안하지만 전화하지 마십시오.

전화가 뚝 끊어졌다.

이도원에게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했기 때문에, 이로빈의 대처는 늦은 감이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젠장!”

이로빈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쓸어버렸다.

문서들과 전화기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 가려져 있던 조간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문 1면에는 안 그래도 폭발 직전인 이로빈의 속을 또 한 번 뒤집을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도원, 연예계 이미지를 갉아먹는 독초 ‘레드엔터테인먼트’의 비리를 속 시원히 밝히다.

< 역습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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