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62화 (162/178)

< 역습 (7) >

“이게 뭡니까?”

레드 엔터테인먼트 사옥의 대표이사 사무실이 뒤집혔다.

전체적으로 회사 분위기가 침울해졌을 뿐더러 임직원들은 입도 벙긋하기 힘들었다.

“일처리를 그 따위로 하니까 우리 정보가 샜는지, 백 엔터가 어떻게 움직일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이로빈은 각 부서 팀장들을 불러다 나무랐다.

“돈을 받았으면, 받은 값을 해야지. 안 그래요?”

그때 법무팀 팀장이 손을 들었다.

이로빈이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뭡니까?”

“대표님께서 미팅 내용을 일일이 밝히시는 것도 아니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직원들도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내 회사에서 나를 위해 일을 하는 게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대표님만의 회사가 아닙니다.”

법무팀 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대표님이 주축인 회사란 말이 맞겠죠. 우리 회사에 투자하는 투자자들, 소속된 가수나 배우, 임직원 모두가 지금 현재의 회사를 만들고 유지해나가는 요소입니다. 절대 대표님 혼자만의 회사가 아니에요.”

그에 이로빈이 입가를 씰룩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내일 법무팀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왜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야 적법한 대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법무팀 팀장의 말을 들은 이로빈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짚고 대답했다.

“회사의 법률고문으로 계실 때와 지금은 달라요. 그런 말을 다른 팀장들 앞에서 내게 해야되겠습니까?”

“그 점은 죄송합니다.”

법무팀 팀장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도로 앉았다.

이로빈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오늘 아침에 뜬 기사 보셨죠?”

팀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빈은 태블릿을 켜서 책상 한가운데 세웠다.

“다시 보십시오.”

팀장들의 시선이 태블릿으로 갔다.

<레드 엔터테인먼트, 윤세라 성상납 강요 의혹… ‘스폰서 연결’까지?>

<레드 엔터테인먼트… 스폰서 제안에 불응한 소속 가수, 배우들 응징?>

<레드 엔터테인먼트 의혹으로 본 정 ?재계와 연예계의 관계>

<레드 엔터 끊이지 않는 연예계 의혹들… 진실은 저 너머에>

<윤세라 씨의 가족들 고소장 접수, 대상은 ‘레드 엔터테인먼트’>

괴로운 표정의 팀장들을 바라본 이로빈이 말했다.

“오늘 오후 회의 땐 한 분씩 대책을 마련해 오셔야할 겁니다.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회사가 흔들리진 않습니다. 그러니 문제없도록 직원들 단속 잘 하십시오. 이상으로 회의 마치겠습니다.”

팀장들이 방을 나가자 이로빈은 책상 위의 약통에서 신경안정제를 꺼내먹었다.

팀장들과 교대해 들어온 비서는 얼른 물을 떠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로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개떡 같아. 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한 후로 가장 열 받는 날이야. 그런 자료들을 갖고 있었다니… 하루, 이틀 만에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어. 내 상대는 이도원이 아니라, 이상백 대표였다고.”

비서가 놀란 듯 눈을 치떴다.

“대표님 말씀은, 우리를 곤경에 빠트린 게 이도원이 아니란 뜻입니까?”

그 질문에 복잡한 얼굴이 된 이로빈이 대답했다.

“의문이야. 이도원은 분명 미국에 있었어. 한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 그럼 이도원이 귀국하기 전부터 이상백이 이런 수작을 부려두었다는 건데…….”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던 이로빈이 지시했다.

“차 대기시켜.”

“예?”

“백 엔터테인먼트로 갈 테니까 미리 연락해 놔. 이도원과 이상백, 둘 중 한 놈은 있겠지.”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비서가 방을 나갔다.

이로빈은 클래식을 틀어놓고 진정하려 애썼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를 한 거지? 이도원이냐, 이상백이냐? 아니면… 둘 다냐.’

이로빈은 호기심에 관해서는 끈기가 없는 편이었다. 따라서 이도원이나 이상백을 직접 만나 궁금증을 풀 요량이었다. 그는 제대로 카운터를 얻어맞고도 대미지를 감췄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정신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남은 건 분노, 그리고 복수심이었다.

‘누가 됐든 이대로 당하고만 있진 않겠다.’

*

그 시각, 이도원은 현장에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상대방은 바로 이상백이었다.

-아침 기사는 봤느냐?

“예. 잘 봤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네 부탁을 듣고 긴가민가했다. 배우가 아닌 모사꾼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걱정도 됐지. 쓸데없는 데 신경 쓴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귀국한지 얼마나 됐다고… 레드 엔터와 전쟁을 하게 될지.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탁한 건데 대표님께서 생각보다 세밀한 부분까지 조사해주셔서 놀랐습니다. 만약 준비된 자료가 부족했다면 영화에 외압을 가한 일도, 윤세라 사건도 침묵했어야 할 거예요.”

-백 엔터테인먼트 역시 레드 엔터에서 받았던 것과 똑같은 제안을 받아봤기에 조사가 수월했다. 우리 회사도 벌써 오 년이 넘었으니까, 그런 외압에 응하지 않은 곳치고 오래 버틴 편이지.

엔터테인먼트는 대개 유령회사거나 명줄이 짧은 곳들뿐이었다. 매출과 소속 배우진 양쪽에서 오 년 동안 괄목상대할 성장을 한 백 프로덕션이 대단한 것이다. 비록 중간에 위기는 있었지만 투자하는 작품이 대부분 손익분기점을 넘은데다, 소속 배우들도 승승장구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상념에 사로잡혀 뿌듯한 기분을 만끽한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네가 잘한 일이지.

사실 이도원도 만약을 위해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뿐, 정말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줄은 몰랐다. 물론 준비하지 않았다면 손 놓고 당했을 테지만.

“이제부터가 진짜겠죠?”

-그래, 하지만 너무 걱정 마라. 네 뒤에는 언제나 백 프로덕션과 내가 있어.

“물론 알지만… 저들도 분명 반격해 올 겁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요.”

-아무리 거칠어도 마지막 발악일 뿐이다. 넌 신경 쓰지 말고 연기에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었다.

곁에 있던 차지은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예요? 레드 엔터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던데, 오늘 아침에 터진 기사랑 관련된 거예요?”

“글쎄.”

이도원은 모호하게 답하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지난번에 말한 건 생각해 봤어?”

“작은 포인트만으로 변화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물론 연습했어요. 이따 보여드릴게요.”

서둘러 대답한 차지은이 대화를 원점으로 돌렸다.

“지난번 인터뷰도 그렇고, 레드 엔터테인먼트와 직접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 맞죠?”

“그래.”

“오빠, 전 반대예요.”

차지은은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크게 자극할수록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될 거예요. 전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아역 배우부터 생활했어요. 그들이 얼마나 비열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다고요.”

이도원은 대답하지 않고 빤히 그녀를 응시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차지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있던 동료 여자애가 있었어요. 전 불려가지 않았지만 그 애는 대표실로 불려갔죠. 고등학교 일학년 때 스폰서 제의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야망이 큰 친구였어요. 유명한 배우가 될 수만 있다면 어떤 모욕도 감수할 수 있다고 여겼죠. 결국 어린 마음에, 조급하게 대표의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어요. 완전 아역 때부터 저와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었는데… 전 그 애가 삼 년 후 매몰차게 버려지는 걸 봐야했죠.”

이도원은 조용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성인도 아닌 미성년자를 데려다 꿈을 이용하고, 그릇된 희망을 주입하고, 돈벌이로 삼은 것도 모자라 써먹을 데까지 써먹고 팽시켰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굳은 표정의 이도원을 마주한 차지은은 덜컥 겁이 났다.

‘아… 잘못 말했어.’

저들이 추악하고 더러운 방법을 서슴없이 쓴다는 사실을 듣고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닌 것이다. 상대가 악하다는 걸 알려줄수록 이도원의 적개심은 높아질 터였다.

역시나, 이도원이 말문을 열었다.

“네 말은 알겠다. 날 걱정하는 심정도 잘 알아.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언제까지 저지르게 할 수 없잖아. 옛날에, 이상백 대표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어. 모든 어른은 아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시더군. 그것만 생각해도 내가 위험을 감수하고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무너뜨릴 이유는 충분해.”

이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노에 찬 표정을 차지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멀리서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을 불렀다.

차지은은 그 틈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얼굴색을 바꾸며 이도원의 팔짱을 꼈다.

“가요, 오빠.”

이도원은 못이긴 척 끌려갔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유태일 감독이 콘티를 내밀었다.

콘티에 들어있는 내용은 이도원이 화가인 차지은의 작업실에서 그림 하나를 망연히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그 후 차지은이 커피를 내오자, 두 사람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키스를 한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배드신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카메라에 담을 예정이었다.

짓궂게 웃은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감정 연기야 알아서 잘할 거고. 스킨십이 문제인데… 격렬하게 해야 돼. 알지?”

이도원과 차지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어서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가가 씰룩이고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썩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유태일 감독이 농담을 던졌다.

“일부러 엔지 내지는 말고.”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차지은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이도원의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한 이도원은 부끄러운 기색을 지우고 일부러 눈을 맞추며 물었다.

“키스는 할 줄 알아?”

“네?”

차지은은 딱딱하게 대답하며 굳었다. 그녀가 만약 뜨거운 주전자였다면, 귀에서 연기가 나면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씨익 웃은 이도원이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차지은이 흠칫 떨자, 이도원이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그 돌발 행동에 차지은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빼냈다. 그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이도원의 목을 밀쳤다.

“컥.”

이도원이 목을 감싸고 고개를 돌리자 화들짝 놀란 차지은이 물었다.

“괜찮아요?”

순간 이도원이 미소 띤 얼굴을 돌리며 대답했다.

“장난이야. 긴장 좀 풀렸지?”

“휴, 장난 좀 치지 마요.”

“오케이, 키스는 진지하게 할게.”

“오빠!”

차지은이 빽 소리를 지르자 유태일 감독이 엄살을 떨며 농담조로 말했다.

“귀청 떨어질라. 그 기세로 격렬하게, 알았지?”

두 남자의 시도 때도 없는 농담에 차지은은 머릿속이 넝마가 돼버렸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콘티를 보았다.

‘긴장을 어떻게 풀어준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바뀌었다.

몇 번 농담을 던지면서 깨달은 사실은 차지은이 지금껏 키스신이나 배드신을 촬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활동 경력은 제법 오래됐지만 대부분 가족 드라마나 수사 드라마, 뮤지컬이나 광고 위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건 이도원에게는 미처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경우였다.

‘경력이 몇 년인데 아직까지 키스신이 한 번 없어?’

물론 이도원도 경험이 많진 않다.

나직이 한숨을 쉰 이도원은 차지은을 빤히 응시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키스신은 굉장히 민망하다. 그건 경력자든 아니든 똑같았다. 다만 적응력에 차이를 보인다. 즉, 이번 촬영의 관건은 두 배우가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이윽고,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적응이 되고 여유가 생기면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야.”

연인끼리도 시간이 지나면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처럼, 배우도 적응이 필요했다. 단 한 번의 엔지도 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왕 엔지가 날거면, 그 시간에 직접 부대껴서 적응하는 편이 낫다. 한바탕 싸움을 하다보면 머릿속에 하얘지고 고통이 없어지는 것처럼.

나름대로 배려한 말이었지만 차지은은 이도원을 노려봤다.

‘흐름에 몸을 맡겨?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러다 보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서운했다.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마음 같아서는 외치고 싶었다.

이 장면은 연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그녀의 표정을 읽은 유태일 감독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재밌겠군.’

그는 클로즈업했을 때 차지은의 눈빛이 궁금했다. 그녀의 재량 이상 연기력이 나온다면, 그건 빈 공간을 ‘진심’이라는 감정이 채운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진심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감독에게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였다.

< 역습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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