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6) >
촬영이 시작되자 이도원과 차지은은 카메라가 비추는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을 때 이도원이 윙크를 하며 장난을 걸었다.
차지은이 풋 웃었다. 이미 이도원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그녀에게 장난의 재미 유무는 중요치 않았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다.
‘얼씨구.’
그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은 피식 웃었다.
“심각하네…….”
그가 보기에 차지은은 중증이었다. 하긴, 그러니 주변의 수많은 추파를 물리치고 젊음을 허비하고 있을 터였다.
옆에서 유태일 감독을 빤히 응시하던 조연출이 물었다.
“그나저나 선배님은 연애 안 하십니까? 대학 때 포함해서 여자 사귀시는 걸 딱 한 번 봤습니다. 함께 한지가 십 년이 넘는데,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남 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유태일 감독은 상체를 젖힌 채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물었다.
“난 너 여자친구 있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다.”
“저야 뭐, 중간에 괜히 나가서 영화 만들었다 말아먹는 바람에 데이트 비용이 없는 것뿐입니다.”
조연출의 말에 유태일 감독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크윽, 팔자 한번 사납다.”
“휴, 영화인의 길이란 참으로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니 영화가 망하지, 대사가 구려. 좀 더 맛깔나게 표현해 봐.”
“제 평생 고삼 때 제일 많이 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으며 모니터 너머 현장을 향해 말했다.
“카메라 롤.”
삼성동에 위치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카메라가 작동하고 붐 오퍼레이터가 마이크를 카메라 밖으로 위치했다.
이어서 모니터와 헤드셋을 통해 현장을 느낀 유태일 감독이 날카롭게 지시를 내렸다.
“레디, 액션.”
이도원은 바(Bar)에 앉아 얼음 잔을 흔들었다. 단추 두 개가 풀린 셔츠와 살짝 감긴 눈이 긴장감을 완화시켰다.
잔을 흔드는 신호에 바텐더 역할의 단역이 잔을 채워주었다.
카메라가 시점을 옮기며 술병이 진열돼 있는 안쪽 벽면을 비추었다. 그곳에는 이도원과 바텐더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단골이라는 걸 보여준 카메라는 다시 이도원을 비추었다.
그땐 이미 이도원의 얼굴에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원래는 술병에 물을 타려 했지만, 이도원이 술로 받겠다고 주문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미처 몰랐던 유태일 감독이 분장팀과 소품팀에게 눈짓을 보냈다.
‘진짜 술 줬나?’
팀원들은 머쓱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직 촬영 중이었기에, 유태일 감독은 나무라지 않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괘씸한 녀석. 술은 안 된다니까.’
사실적인 연출을 추구하는 그였지만, 음주는 촬영이나 감정에 지장을 줄 수 있었기에 웬만하면 생수로 대용했다.
어찌 됐건 이도원은 연기를 계속했다. 그는 차지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이도원이 검지를 세우며 기다려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는 정장 주머니에서 행커치프, 만년필을 꺼내어 메시지를 써서 바텐더에게 주었다. 또한 검지로 술이 가득 차있는 자신의 술잔을 가리킨 후 엄지로 그녀를 지목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바텐더가 새로 채운 술잔과 행커치프를 차지은에게 전달했다.
카메라가 움직이며 차지은을 비추었다. 행커치프를 펼쳐놓고 술잔을 한 모금 들이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행커치프에는 ‘난 외로운 벙어리지만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차지은이 고개를 돌리자 이도원은 으레 촬영 전 보여주었던 표정을 다시 지었다. 눈빛은 뜨겁고, 살짝 미소 지은 얼굴은 어두운 조명을 받아 더욱 빛이 났다. 그는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새파란 블루 톤 정장을 잘생긴 얼굴과 탄탄한 몸매로 소화하고 있었다.
‘이러니 내가 반하지.’
차지은이 붉어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녀는 캐릭터에 이입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섹시한 면도 있었어.’
이도원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다. 차지은과 같은 미녀의 미소는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천천히 일어난 이도원이 이끌리듯 차지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이도원은 멈추지 않고 손끝으로 차지은의 얼굴선을 따라가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아름답군.
차지은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달뜬 표정이 남심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수줍은 얼굴은 도발적이었다. 청순한 얼굴과 매혹적인 얼굴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마스크를 가지고 있어.’
이도원은 내심 생각하며 연기를 계속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턱에 머물렀다. 가볍게 그녀의 턱을 바친 이도원이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그때서야 차지은은 살짝 몸을 빼며 검지를 펴서 이도원의 입술을 막았다.
“진정해요. 우린 초면이라고요.”
이도원은 피식 웃고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녀를 놔준 이도원이 술잔을 내밀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건배.
한편 모니터로 장면을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외쳤다.
“컷!”
그제야 스태프들이 숨을 제대로 쉬었다.
“괴물이네요. 완벽한 장면을 만들다니… 동선은 물론, 눈동자 위치까지 디테일한 감정 전달을 해 주고 있어요.”
조연출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유태일 감독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두 배우에게 말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미 오케이 컷이 나왔는데, 몇 번 씩이나 다른 느낌으로 촬영을 해야 한다는 거야. 의견을 굽힐 생각 없나?”
그 물음에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두세 번 정도는 새로운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고민한 유태일 감독이 주문했다.
“지금 감정선 그대로 가져가되, 다른 느낌으로 연기할 수 있다면, 한번 해 봐.”
차지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도원을 보고 있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냐는 의문이 담긴 표정이었다.
이도원은 아랑곳 않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한 그가 차지은에게 속삭였다.
“연기는 아주 작은 변화에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게.”
*
영화 <서커스>의 촬영이 한창인 시간.
이상백은 백 엔터테인먼트에 가있었다. 또한 그는 <시네마 24>의 김흥수 기자를 만나는 중이었다.
김흥수 기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대단하네요. 레드 엔터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촬영에 집중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이상백은 그 말에 동의했다.
“워낙에 강심장이니까요. 이건 그동안 저희가 구한 자료들입니다.”
마침내 이상백이 용건을 꺼냈다. 그는 여러 개의 파일을 꺼내 책상에 펼쳐 보였다. 내용물을 확인한 김흥수 기자는 눈을 치뜨며 물었다.
“도대체 이런 자료들은 언제 다 준비하신 겁니까?”
“도원이는 줄곧 촬영에 매진하고 있지요. 레드 엔터테인먼트 쪽에서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본격적이 공방전을 일으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몸을 사리고 촬영에만 집중해야 할 시기이니까요. 하지만 도원이는 이럴 때일수록 움직여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흥수 기자는 흥분한 낯빛으로 맞장구를 쳤다.
“분명 레드 엔터테인먼트에 카운터를 먹이는 상황이 되긴 할 겁니다. 백 프로덕션이 이도원의 백그라운드로 뛰어준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고요. 그리고 이 자료는…….”
끝을 흐린 김흥수 기자가 안경을 쓰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치명적이겠군요. 이미 기획기사와 지난 인터뷰를 통해 레드 엔터테인먼트에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관심이 꺼지기 전에 터트린다면 K.O까진 아니라도, 그로기 상태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기자님이 기사를 내시면 그때부터 다른 언론사에도 자료를 뿌릴 생각입니다. 동시에 윤세라 씨의 가족들이 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할 겁니다.”
김흥수 기자는 긴장된 표정이었다. 연예계에는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어왔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처벌받는 이는 없었다. 대부분 무혐의로 풀려났고 피해를 받은 사람만 소리 소문 없이 묻히고 말았다. 심지어 역고소를 당해 권선징악이 뒤집히는 경우도 빈번했다.
‘과연 이번에는 다를까?’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상백이 입을 열었다.
“자료가 더 있습니다.”
그는 소파 귀퉁이의 서랍장에서 한 장의 파일을 더 꺼냈다. 그러나 선뜻 건네지 않고 김흥수 기자에게 먼저 물었다.
“이 속에는 레드 엔터테인먼트가 하는 사업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신 성 상납, 스폰서 관련한 것은 모두 옵션으로 진행되는 내용들입니다. 일을 맡기면 제공해주는 서비스 개념이지요. 진짜는 이 안에 있습니다.”
김흥수 기자는 직업병인 호기심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가에 침을 묻히며 심호흡을 했다.
“얼마든 돕겠습니다. 제 직업이 아닙니까? 저를 믿고 보여주십시오.”
이상백은 마침내 자료를 김흥수 기자에게 넘겼다.
그곳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사업들이 적혀있었다.
힘을 가진 이들끼리 협력해 시스템을 만든 후, 그 속에 일반 사람들을 가두고 피를 뽑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하는 것마다 대박이 나서 ‘연예인 주’라고 불릴 정도로 수익이 높은 종목들이 있다. 심지어 엔터 주도 그 안에 포함된다. 정치인, 재벌, 언론이 함께 게임을 만들고 연예인을 통해 홍보를 하면 개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게 마련이다. 정보가 부족한 대중을 이용해 주가조작을 하고, 대중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다.
한편 그렇게 번 돈으로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며 될 만한 사업을 만든다. 고위직 인사나 재벌들이 알고 만든 이 ‘될 만한 사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면 이로빈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사장은 얼씨구나 하고 그들에게 유흥을 제공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김흥수는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이상백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도 제안을 받았었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가 있는 겁니다. 그들이 내게 당당하게 자료를 제공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걸 터뜨린다고 해도 정말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회사의 명운을 놓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런데 왜 이런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
“마치 인터뷰하는 것 같군요.”
미미하게 웃은 이상백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은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잘라낼 겁니다. 분명 어떤 증거도 남겨놓지 않았을 테고, 사실을 은폐하려면 그 방법이 가장 간단할 테지요. 어차피 사업 파트너로 삼을 기획사는 다시 만들면 될 일이니…….”
참으로 간단했다.
찝찝한 기분 속에서, 김흥수 기자가 물었다.
“레드 엔터를 침몰시키기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하시는 겁니까? 재벌이나 정치권 사람들에게 안 좋게 찍히면 외압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나는 도원이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이상백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녀석이 어렸을 때 내가 말했습니다. 어른의 의무는 아이들을 지키고 보살피는 거라고 했지요. 모든 아이들을 사회의 악습 속에서 지켜낼 수는 없겠지만… 도원이만은 지키고 싶습니다. 그 녀석은 내 제자이기도 하고, 회사가 위태로울 때 날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며, 내가 팬으로서 기대하는 배우기도 합니다.”
김흥수 기자는 코끝이 찡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이야기를 인터뷰로 내보내고 싶었다. 직업병이 도졌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장면은 스쳐간다는 것을. 화면에 담고, 지면에 담을 수 있는 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런 김흥수 기자의 아쉬움은 뒷전인 이상백은 맑은 눈빛을 한 채로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그대로 두면 도원이가 계속 힘들어질 겁니다. 난 이도원이 나오는 영화를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기자님이 도와주십시오.”
< 역습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