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5) >
인터뷰 차례가 넘어가자 이로빈은 TV를 끄며 심호흡을 했다.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비서에게 물었다.
“차기열 회장과 김봉민 의원 측에선 연락 없나?”
“예. 아직은…….”
“언제든 발 뺄 수 있도록 떨어져서 지켜보겠다, 이건데…….”
중얼거린 이로빈이 실소했다.
“연예 기획사 대표 자리를 사냥개 정도로 보는 종자들이니 그럴 수 있지.”
“사냥개라니요?”
비서가 발끈했지만 이로빈은 번복하지 않았다.
“잘 나갈 땐 동등한 입장에서 대해주지만, 문제라도 터지면 혹시나 똥물이 튀길까 걱정하기 바쁘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재력가나 권력자에게 우리는 욕망을 해결해주고 유흥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일 뿐이다. 언제든 꼬리를 자르기 편할 정도의 관계만 유지하지.”
비서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한편 등을 편히 기대고 평온한 표정을 회복한 이로빈이 말했다.
“<시네마 24>의 김흥수 기자와 약속 잡아봐. 현재로서는 이번 기획기사를 내리는 게 상책이다. 그럼 오늘 일은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질 거야.”
“안 그래도 김흥수 기자를 조사해봤습니다만 회유나 압력이 통할 자가 아니었습니다.
“통하든 말든 만난다.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인가? 이도원은 이제 시작이라는데, 우리는 놈이 준비한 총알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잖나.”
“…알겠습니다.”
고분고분한 대답을 끌어낸 이로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 전에 윤세라 그 계집애가 쓸데없는 짓을 한 바람에 우리 입장이 난처해졌다. 언론에서도 이쪽에 촉각을 세우고 있어. 지금 같은 상황에선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자네만이 날 도와줄 수 있지. 난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네. 흥해도 함께 흥하고, 망해도 함께 망하는 거야.”
인터뷰를 통해 신호탄을 터트린 다음 날, 이도원은 촬영 현장으로 갔다.
어제 행사가 이번 영화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나 배우 모두 방송을 본 상태였다.
그들은 이도원을 향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도, 한편으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응원했다. 업계에서 후문이 많았던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한방 먹였다는 사실에 속이 시원한 것이다.
“방송 잘 봤어. 대단하던데?”
유태일 감독과 회의를 하던 카메라감독이 웃으며 말하자 조명감독도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담이 큰 배우는 오랜만이야.”
반면 음향감독은 두 사람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남들이 나서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네.”
미술감독 또한 그의 말을 거들었다.
“제 생각도 음향감독님과 같아요. 비록 레드 엔터가 우리 영화에다 방해공작을 벌인 건 괘씸하지만 공개적으로 질타한 건 지나쳤다고 생각해요. 어제 일로 도원 씨와 레드 엔터테인먼트 사이에 낀 제작사나 투자자들도 심기가 불편해졌을 거예요.”
빤히 그들을 응시하던 이도원이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심려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인즉, 혹시라도 레드 엔터테인먼트와의 신경전으로 영화 촬영에 지장 받는 일은 없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절대로 촬영에 악영향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도원은 덧붙이며 확신했다.
마음이란 때때로 굳이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전달된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열정 가득한 표정을 접한 스태프들은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았다.
그건 유태일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촬영하자.”
그는 콘티를 내밀며 이도원에게 설명했다.
“오늘은 드디어 지은이를 만나는 장면이다. 두 사람 호흡이야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을 거야. 자유롭게 촬영하되 최선을 다해주면 고맙겠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은이는 아직 안 왔나 보네요.“
“어젯밤에 라디오 녹음이 있었다던데? 늦는 친구는 아니니까 곧 오겠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유태일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밴 한 대가 현장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발견한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양반은 못 되는군.”
차지은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배우부터 스태프까지 그녀에게는 모두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그리고 오빠.”
이도원이 한쪽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한편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콘티를 건넸다.
콘티를 받은 차지은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저, 이 캐릭터 너무 마음에 들어요. 직업이 화가인 것부터 성격도 애착이 가고요.”
이미 차지은 캐릭터의 대사까지 머릿속에 줄줄 외고 있는 이도원은 그 말에 동감해서 대답했다.
“넌 그냥 성격대로 연기하면 되겠던데? 당돌하고, 열정적이고, 티 없이 깨끗한 모습이 널 빼다 박았어.”
듣는 사람에 따라 손발이 오그라드는 소리였지만 이도원을 사모하는 차지은에게는 자장가 보다 감미로운 멜로디로 들려왔다.
그때 유태일 감독 옆자리에서 이도원의 얼굴을 힐끔거리던 스크립터가 중얼거렸다.
“역시 느끼한 멘트도 용서가 되네요.”
“왜, 잘 생겨서?”
유태일 감독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실물을 보니까 사람들이 찬양하는 이유를 좀 알겠어요.”
대부분 스태프가 이전 그대로였지만 스크립터는 이번에 다른 팀에서 데려온 스태프였다. 오늘부터 바뀌었으므로 이도원을 처음 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스크립터는 주로 여성 스태프가 맡으며 연출부 막내의 전유물이었다. 그럼에도 당사자는 첫 출근 치고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를 빤히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은 머리통에 꿀밤을 날리고 말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잘 배워놔. 스크립터는 편집을 돕는 감독의 현장 비서다.”
“옙.”
스크립터의 대답을 들은 유태일 감독이 덧붙였다.
“어차피 배우들은 질리도록 볼 테니까. 그리고 이도원의 매력은 실물이 아니야.”
“그럼요?”
“도원이는 현장에서 연기할 때 가장 빛난다.”
두 사람이 대화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들리지 않는 거리에 떨어진 이도원은 현장의 장비 세팅이 끝날 때까지 차지은과 호흡을 맞추는 중이었다.
“편하게 연기하네. <바람> 촬영 때보다 더 좋아졌어.”
“힘 빼느라 고생 좀 했죠.”
차지은이 혀를 쏙 내밀며 좋아했다.
이도원은 그녀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칭찬을 받고 즐거워하는 차지은을 향해 짓궂게 초를 쳤다.
“다만 연기의 리듬이 아쉬워.”
“연기의 리듬이요?”
차지은의 검은 동공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연기에 대해서 항상 진지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게 바로 이도원이 그녀를 만날 때마다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이유였다.
“응. 노래로 비유하자면 높은 음역대도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게 된 느낌이야. 보고 듣는 사람이 편안해진 셈이지. 이제 곧 너만의 스타일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차지은에게 말을 이었다.
“너만의 스타일이 잘 정립되어 있다면 다른 배우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도, 너만의 캐릭터가 될 수 있을 거다.”
그에 차지은이 입술을 꼭 깨물며 부탁했다.
“오빠가 보여주세요. 오빠만의 연기를.”
굳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일.
이도원은 한발 더 나아가서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두 가지의 스타일로 연기를 해볼게.”
“그게 가능해요?”
차지은의 물음에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가지도 가능하지.”
“대사 하나 없는 인물을 열 가지 버전으로 연기할 수 있다고요?”
이도원은 대답 대신 현장을 가리켰다.
“보여줄게.”
유태일 감독의 미간에 골이 깊었다.
이도원이 현장에 들어가기 전 돌발 제안을 한 것이다.
“이번 씬은 각각 다르게 다섯 가지로 나눠서 찍어도 될까요?”
말이 다섯 가지 버전이지, 촬영 때 일어날 엔지를 생각하면 다섯 씬을 찍을 시간을 한 씬에 투자하자는 요구였다. 그 의도를 짐작한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현장을 연습장 삼아 촬영할 생각인가?”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번 장면은 주인공의 인생관이 바뀌는 시발점입니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죠. 인상적인 씬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을 들은 유태일 감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영화 <서커스> 인터뷰 행사 후부터 계속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다시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꼼수가 시작될지 알 수 없는데다, 촬영 도중 이도원이 타격이라도 받으면 제작 과정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빨리 촬영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유태일 감독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이도원은 전혀 초조한 기색이 아니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청난 폭탄을 터뜨려 놓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인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유태일 감독 역시 쉽게 흔들리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자신조차 바람 앞의 등불처럼 마음이 번잡한데 정작 이도원은 멀쩡하니 참기 힘들 만큼 궁금증이 치밀었다. 결국 그는 이도원에게 물었다.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예?”
이도원은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엄청난 짓이요?”
며칠 전 인터뷰를 아예 잊어먹은 사람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이도원이 유태일 감독의 말뜻을 알아채고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인터뷰 말씀하신 거예요?”
“전에 없이 자꾸 조급해진다. 일을 저질러 놨으니 뭔가 반응이 오긴 올 텐데,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 알 수 없으니까.”
“음.”
이도원은 콧등을 긁적이다 말을 이었다.
“신경 쓰고 고민한다고 알 수 없잖아요. 조급해하는 순간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질 겁니다. 지금은 현장에 있잖아요. 그러니 감독님도 마음을 비우시고 평소처럼 촬영에만 집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태일 감독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배우야 촬영이 끝나면 그만이지만… 감독님은 영화의 성패에 따라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라면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도원은 늘 배우를 포용하던 유태일 감독의 나약한 모습을 가리어 서서 말했다.
“촬영에는 어떤 지장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감독님은 평소처럼 연출에만 신경 써주십시오. 레드 엔터테인먼트와의 문제는 제 선에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린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번 영화를 공격하는 건 엄밀히 말해 이도원과 김진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유태일 감독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애를 쓰고 있는 셈이었다. 피하려면 얼마든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유태일 감독은 소신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복잡한 표정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기 배우 하나 지키지 못한 주제에 도리어 사과를 받다니… 내가 나약했다.”
유태일 감독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촬영 시작하지.”
< 역습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