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4) >
이도원이 폭탄을 터트리리라 결심한 후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은 김흥수 기자였다. 김흥수 기자는 이도원의 제보들로 인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간 사람으로서, 그동안 서로 두터운 신뢰관계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흥수 기자도 선뜻 총대를 메지 못했다.
“도원 씨 덕분에 제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제보는 제가 감당하기에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상대를 넘어뜨리지 못하면 우린 완전히 끝장이에요. 다시는 이 바닥에서 재기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고등학교 시절 처음 만났던 그 카페였다. 이도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여유롭게 화제를 돌렸다.
“이곳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그저 동네 카페인데…….”
“도원 씨.”
김흥수 기자가 초조하게 부르자, 이도원이 그를 마주보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맞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어쩌면 우리는 다시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끝장이 날 수도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선택하진 않을 겁니다.”
이도원은 휴대폰으로 ‘윤세라’를 검색한 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보십시오. 한 소녀가 자살을 선택할 만큼 괴로워했습니다.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 건 레드 엔터테인먼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소속 가수며 배우들이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겠죠. 단순한 성상납 강요뿐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훨씬 추악한 단면이 있을 거예요. 영웅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곳을 쓰레기더미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닙니까?”
호소력 짙은 음성이 김흥수 기자의 마음속에 울림을 전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앞장서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 자꾸만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던 김흥수 기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수집해 왔던 레드 엔터 관련 정보들만 종합해 봐도 방송으로 터트리는 방식은 답이 안 나옵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힘은 방송사들의 뿌리까지 뻗어있어요. 그들은 서로 약점을 쥐고 있는 협력관계입니다. 생방에서 터트린다거나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내보낸다고 해도, 맛보기로 그칠 겁니다.”
생방송에서 돌발적인 발언을 하는 것, 시사프로그램에 제보를 하는 것 모두 이도원이 생각하던 방법들이었다. 하지만 김흥수 기자는 이런 방식으로는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십 프로의 진실과 구십 프로의 미화가 있겠죠. 금방 잊힐 겁니다.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꼴이 날 수 있어요.”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빤히 예측하는 김흥수 기자를 바라보던 이도원이 슬그머니 미소를 갖다 붙이며 물었다.
“그래서 기자님께 도움을 청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김흥수 기자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을 아꼈다. 그는 마지막 애원을 하듯이 이도원에게 제안했다.
“정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이루신 것들을 모두 내려놔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상대로, 이도원은 확고했다.
“저는 방법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던 김흥수 기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획특집기사를 내보내는 겁니다.”
<시네마 24>의 김흥수 수석기자가 제안한 방식은 간단하다. 먼저 대중이 관심을 가질만한 키워드를 주제로 삼는다. 그 다음에 주제에 맞는 기사들을 내보내며 그 안에 터트릴 내용을 조금씩 섞는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에서 기획기사를 내보내다보면 어느 순간 심각성이 각인된다. 그 순간 이도원이 진실을 터트려서 대중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자는 계획이었다.
*
기획기사를 모두 읽은 이로빈은 잡지를 집어던졌다.
“김흥수 기자……. 처음부터 끝까지 이도원 후견인 노릇을 하시겠다?”
앞에 서있던 비서가 잡지를 줍고는 대답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쪽은 전부 막혀있으니 그나마 가진 인맥을 이용해 뭐라도 해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 이로빈 생각은 달랐다.
“아니! 영리한 놈이다. 가볍게 봤다가 큰코다친 적이 있지.”
중얼거린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뒤편에서 늙수레한 음성이 울렸다.
-무슨 일인가?
“선생님. 기획기사, 읽어보셨습니까?”
-봤네. 꼬마가 머리를 좀 썼더군.
“부탁을 좀 드려야겠습니다.”
이로빈이 말을 이었다.
“<시네마 24>는 영화, 방송, 패션계에서 메이저급 잡지사 아닙니까? 아직은 ‘영화제작과정에서의 외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자문 대상을 유태일 감독과 이도원으로 정한 것 자체가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겨냥한 겁니다. 이런 식이면 머지않아 더 깊숙이 파고들 테지요. 그때가 되면 다른 언론매체에서도 줄줄이 이번 기획특집기사에 대한 기사들을 실을 겁니다. 낙수 몇 방울이 일으킨 파문이 거대한 파도가 되지 않도록 선생님께서 신경을 좀 써주십시오.”
잠시 조용하던 수화기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리한 부탁을 하는군. 자네 스스로 처신해야 할 부분이야. 자네가 김진우를 버렸듯, 나 역시 꼬리를 잘라야하는 순간이 온다면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동시에 이로빈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젠장…….”
머릿속에선 죗값을 받게 만들어주겠다는 이도원의 말이 경종처럼 울려 퍼졌다. 설마 목숨 걸고 이런 기획기사를 실어줄 낭만주의자가 있을지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불안감이 썰물처럼 덮쳤다.
그때 고개를 돌리고 전화 한 통을 받은 비서가 표정을 휴지조각 마냥 구겼다.
무심코 그를 본 이로빈이 물었다.
“뭐야?”
“그게… 차기열 회장님입니다. TV 좀 확인해 보시랍니다.”
그 말과 함께 비서가 TV를 켰다. 화면 안에서는 플래시가 번쩍이며 터지고 있었다. 그 거짓말 같은 상황 속에 <서커스> 제작 팀이 서있었다.
“저건 뭐야?”
당황한 이로빈이 묻자 비서가 대답했다.
“유태일 감독 측에서 제작사 허가도 없이 영화 <서커스> 관련 인터뷰를 열었습니다. 아마… 이번 특집기사를 보고 질문지를 만든 기자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나와 제대로 맞서보겠다 이건가? 정면승부를 해보겠다 이거야?”
이로빈의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그는 붉은 얼굴과 충혈 된 눈으로 TV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화면 안에서는 사회자가 이도원을 소개했다.
-드디어 배우 이도원 씨의 차례네요. 게릴라이벤트로 열린 인터뷰임에도 많은 팬 분들이 모여 주셨습니다. 이 년도 넘는 시간 동안 한국에서 공백기를 가졌지만 인기는 여전하세요!
이도원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잊지 않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회자는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나저나, 유태일 감독님과는 벌써 네 번째 작품이네요.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죠.
이도원의 말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전 아닙니다.
한바탕 웃음이 터지며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타이밍을 재던 사회자는 이번 행사의 목적을 떠올렸다.
-그럼 이도원 배우,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돌아갔다.
이내 선택 받은 여기자가 마이크를 넘겨받고 질문했다.
-저는 <고려일보> 소속 기자 서유정입니다. 얼마 전부터 발행된 <시네마 24> 기획특집기사, ‘영화제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외압’에서 유태일 감독님과 함께 자문을 해주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이 자리의 두 분이 모두 자문 역할을 맡으셨다고 하니… 설마 ‘서커스’ 역시 제작과정에도 외압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화면에 이도원이 등장했다.
그는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제작사에 압력을 넣었고, 에이전시를 통해 고용된 단역과 보조출연자들로 하여금 촬영을 방해해가며 배우섭외 권한을 놓고 협박했습니다.
뜻밖에 구체적인 대답을 들은 기자석이 들썩였다.
-외압을 행사한 곳이 레드 엔터테인먼트란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에 레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윤세라 씨가 죽음을 택했습니다! 이 사건도 관계가 있는 겁니까?
-외압을 받은 영화 <서커스>의 현재 촬영 상황을 알려주십시오!
다양한 질문들이 기포를 일으키며 끓어올랐다.
이도원은 답변을 하지 않고 침묵했지만 질문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장소에서 폭탄발언이 터지자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순간 가장 혼란스러운 건 사무실에서 TV로 지켜보고 있는 레드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로빈이었다.
‘이 새끼들이…….’
그는 넋을 놓고 있었다.
화면 안에서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사회자가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질문지나 답변지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 너무나 놀라운 사실인데요. 예, 우선 한 분 씩 질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지목을 받은 기자가 자신을 밝히며 물었다.
-<시네마 24>의 고건수 기자입니다. 저희 잡지사에서 기획한 기사가 맞고요. 그럼에도 뜻밖인 건 아직 제보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더 있는 건가요?
이도원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비록 주제는 ‘영화제작과정 속에 벌어지는 외압’라고 쓰여 있지만, 그건 제가 말하고 싶은 진실의 표면에 불과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고 베일에 싸여있던 연예계의 부정적인 민낯을 들추게 될 것 같습니다.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고건수가 저돌적으로 말을 이었다.
-연예계의 민낯을 밝히겠다고 하셨는데요. 무엇이든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이지만, 지금까지 연예계의 뒷이야기는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히 밝혀진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뭐가 다른 건가요?
-저는 정의실현을 통해 이번 기획기사의 자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하게 목표로 하는 부패업체가 있습니다.
이내 다른 기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하나신문>의 신정태 기자입니다. 확실한 정황과 물증이 있다면 고발을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공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도원은 호흡을 잠시 멈췄다. 모든 기자들을 숨죽이며 대답을 기다리도록 만든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경찰이나 법조인이 아닌 배우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잘못을 해왔음에도 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직접 잘못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만약 제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모략이라면, 근거 없는 명예훼손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당사인 레드 엔터테인먼트에게 전하고 싶군요.
여기까지 왔을 때 이로빈은 그야말로 거품을 물고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사이 화면 속 이도원이 아랑곳 않고 덧붙였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 역습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