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3) >
한편 박아현의 마음속은 복잡스럽기 그지없었다. 전날 2인조 걸 그룹 ‘레드 오션’으로 함께 활동했던 윤세라를 만났고,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지?’
윤세라가 차기열 회장 결혼식 축가를 불렀을 당시 오랜만에 만났고 약속을 잡았다. 촬영에 들어가면 다시 바빠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작 하루 전인 어제, 시간을 쪼개어 만났다. 그 결과, 윤세라의 심각한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박아현은 애타는 눈빛으로 이도원의 뒷모습을 쫓았다. 이도원은 항상 그녀의 문제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고 윤세라의 비밀까지 마음대로 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저래 망설이던 박아현은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현장으로 끌려갔다.
불쑥, 이도원이 박아현의 이마를 짚었다.
“열도 없는데, 왜 이러지?”
당황해 입을 벙긋거리던 박아현이 그의 손을 치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얼굴인데.’
속 사정이 모두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태일 감독은 촬영 지시를 내렸다. 박아현이 좀체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현 상황을 오래 끌어보아야 마땅한 묘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로 일단 촬영을 해보았고, 우려하던 상황과 달리 박아현은 곧잘 집중했다.
반면 이도원의 속은 여전히 찜찜했다.
‘무난하게 넘기긴 했지만…….’
박아현이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이 계속 걸렸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다가가서 직접적으로 물을 수 없었다.
결국 박아현이 먼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두 사람은 지금의 조심스러웠던 판단을 후회하게 된다.
*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관계로 <서커스> 야외촬영이 취소된 2025년 2월 28일. 때는 연휴를 하루 앞둔 대체 공휴일이었다. 그날 점심, 이도원은 라면을 올려둔 상태로 밥을 푸고 있었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이도원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다림질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거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나저나 수민이랑은 연락하니?”
이도원은 수민이란 이름이 낯설어 되물었다.
“수민이가 누구예요?”
“수민이 기억 못하니? <악마의 재능> 시사회 때도 같이 갔었잖아? 예전 월곡 집 살 때, 이웃집 살던 여학생 말이야. 지금은 대학로에서 연극하고 있단다.”
“연극이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아 올리고 방에서 나온 누나 이다원이 대신 대답했다.
“응. 걔도 연기하잖아? 꽤 큰 기획사 들어갔었다고 하던데… 그냥 나왔다던데? 엄마! 왜 나왔다고 했죠?”
어머니가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
“수민 엄마가 그러는데 소속사에서 애를 워낙에 못살게 굴었단다. 아들, 너희 회사는 안 그러지? 혹시라도 그렇게 못됐게 굴면 안 돼. 언제가 됐든, 부메랑처럼 그대로 돌려받는 거야.”
이도원은 어머니와 누나의 밥을 모두 푸고 피식 웃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어요?”
“너야 촬영 현장, 아니면 미국 가있어서 잘 못 만났겠지만 난 수민이 번호도 아는데? 공연도 초대해줘서 친구들이랑 몇 번 갔었어.”
이다원의 말에 이도원은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수민이가 안부는 안 물어?”
“웬걸? 편지 보낼 때 같이 붙여준다니까 절대 안 된다고, 오빠한테 방해될 거라고 별 핑계를 다 대면서 부끄러워하더라. 만났을 때 너한테 전화라도 걸라고 하면 창피해서 도망가고. 광팬도 그런 광팬이 없어.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 연기는 어떻게 곧잘 하는지 몰라?”
그때서야 대충 상황 파악이 된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기획사가 어디였는데?”
이다원은 다시 어머니를 크게 불렀다.
“엄마! 수민이 회사 어디였죠?”
어머니가 주방으로 들어오며 눈을 흘겼다.
“와서 말을 하든지. 어른한테 바락바락 소리나 지르고… 귀청 떨어지겠다, 이 계집애야. 어휴. 시집이나 잘 갈 수 있을지…….”
이다원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나 인기 많거든요?”
어머니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이도원에게 대답해주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라더라.”
자신의 밥을 푸던 이도원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레드 엔터요? 어떻게 괴롭혔다고 하는데요?”
“수민 엄마도 자세히는 얘기 않는데… 계속 성형 권유 받으면서 스트레스 받고, 스물네 살 뿐이 안 된 애가 이리저리 술자리 불려 다녔다고 하더라고.”
이도원은 짐짓 놀라며 말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걔가 벌써 스물넷이에요? 나중에 또 수민이나 아주머니 뵙게 되시면 백 엔터테인먼트 오디션 한번 보라고 말씀해주세요.”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말 안 했겠어? 떨어졌단다. 연극으로 경험 좀 쌓고 다시 도전한다고 하니까 뭐, 잘 하겠지.”
“예.”
그때 거실에 켜져 있는 TV에서 뉴스 메인 앵커의 음성이 들려왔다.
-속보입니다. 지난 2월 27일 오후 열한 시경, 레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솔로 가수 윤세라 양은 혼자 살고 있는 청담동의 오피스텔에서…….
소식을 모두 들은 이도원의 머릿속으로 벼락이 쳤다. 그는 밥주걱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거실로 달려 나갔다. 이어서 멍한 시선으로 TV를 보았다. 방금 들은 비보가 선뜻 믿기지 않았다.
순간 시끄럽게 주머니 속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깬 이도원이 심호흡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진빈입니다. 형.
매니저였다.
이도원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래.”
-소식은 들으셨어요? 윤세라.
“방금 뉴스에서 보던 참이었어.”
-준식이 형이랑 아현이 누나는 먼저 병원으로 출발했어요. 아현이 누나 소개로 준식이 형이랑 셋이 몇 번 술도 함께 마셨다고 하더라고요. 형도 병문안 가실 거죠?
“가야지. 내 차 끌고 갈게.”
이도원은 대답했지만 병문안이 큰 의미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윤세라는 심장만 뛰고 있다 뿐이지 뇌사 상태라고 보도되었다. 대부분 뇌사 상태에선 대사기능 저하로 2주일 내 사망한다.
‘무슨 이런 일이…….’
이도원은 윤세라를 고등학교 시절 교복 광고 촬영 때 한 번, 근래 차기열 회장 결혼식 때 한 번 보았다. 그중 대화를 나눈 적은 광고 촬영 때 한 번 뿐이었다. 그런 이도원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한때 함께 활동했던 박아현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점심 식사를 물리고 주방을 정리한 이도원은 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그는 약 사십 분이 걸려 윤세라가 입원해 있는 성미 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복도에는 윤세라와 친분이 있었던 오준식이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도원을 발견한 그가 붉게 충혈된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이 개새끼들……. 도원아, 나 못 참는다.”
오준식은 웬일로 대표님이란 호칭 대신 이름을 불렀다.
이도원은 분노한 그를 보며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레드 엔터였지?”
“어, 가만 안 둬.”
오준식의 어깨를 두드린 이도원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박아현이 윤세라 옆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모두… 나 때문이야. 미안… 미안해. 흑.”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와 빗소리가 섞여들었다.
이도원은 죽은 듯이 누운 윤세라를 지나쳐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았다. 창밖으로 밝고 생기 넘치던 윤세라의 표정이 함께 녹아들었다.
이내 박아현의 어깨를 두드린 이도원이 우두커니 서서 윤세라를 지켜보던 끝에 아무 말없이 병실을 빠져나왔다.
오준식이 그에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자.”
이도원이 음료수를 받자 그가 물었다.
“앞으로 어쩔 거야?”
이대로 두고 볼 생각이냐는 추궁이 담긴 시선이었다.
이도원의 입장에서도 윤세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레드 엔터테인먼트는 용서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는 윤세라와 친분이 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업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생각에 잠긴 그가 아무 말도 없자 오준식이 덧붙였다.
“이번 건은 오지랖이 아니다. 사람이 맞아 죽는 걸 보면서도,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되진 말자. 요즘 세상이 아무리 내 일만 중요하고 남 일에 나서길 꺼려하는 빌어먹을 세상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우리보다 한참 어리고 약한 아이다. 밝고 착한 애였어.”
오준식은 점점 격앙됐다.
반면 이도원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이로빈이 다가오고 있었다. 직접 윤세라의 병문안을 온 것이다.
“넌 가만히 있어.”
이도원은 아직 이로빈을 발견 못한 오준식에게 짧게 말했다. 그 뒤 이로빈에게 다가가서 마주 섰다.
“이게 누구야? 반가운 얼굴이군.”
이로빈은 마치 한 방 먹여봐라, 하는 눈빛으로 이죽거렸다. 만일 이곳에서 이도원이 참지 못하고 주먹이라도 날리는 날에는 당장 내일 조간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될 터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도원은 주먹 대신 무미건조한 음성을 뱉어냈다.
“얼마 전 저희 어머니께서 그러시더군요. 나쁜 짓을 하면 언제가 됐든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되돌아온다고.”
운을 뗀 이도원이 덧붙였다.
“내가 당신이 죗값을 받는 시기를 당겨줄 생각입니다. 저 병실 안의 윤세라가 죽음을 선택하기 전 하루하루 느꼈던 절망과 고민들을 그대로 되돌려주죠.”
그 말에 이로빈이 피식 웃었다.
“가끔 생각하지. 세상 일이 모두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자네 정도 수준에선 아등바등 몸부림쳐 봐도 쉽지 않은 일이야. 그래도 모쪼록 응원하겠네.”
이도원은 옆으로 비켜섰다.
오준식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병실 문고리를 쥔 이로빈이 막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참. 그리고 나도 이곳에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다만 세상 시선이란 게, 기획사 대표가 소속 가수를 신경 쓰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거든.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면 안 되지. 안 그런가?”
이로빈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박아현이 이로빈의 어깨를 밀치며 도로 나왔다. 그녀는 절대 정숙을 요하는 병실 밖에서, 혹시나 윤세라에게 들릴까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신 오지 마세요.”
일련의 상황들을 모두 지켜보던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과 이상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명이 함께 통화를 할 수 있는 그룹 통화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전화를 받자 이도원은 큰 결심을 내린 듯 단호하게 말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성 상납을 강요해 여가수 한 명이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또한 성 상납을 강요받고 레드 엔터를 떠난 소속 출신 배우 둘이 있습니다. 대상자들에게는 신변보호가 필요하겠지만, 저는 제 자신을 숨기지 않고 이 사실을 언론에 터트릴 생각입니다.”
침묵이 감돌던 수화기 건너편에서 이상백이 물었다.
“소식은 나도 들었다. 하지만 연예계는 언론은 물론 정계, 재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힘 있는 자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탐욕으로 돌아가 그 모든 것들을 가지려 하지. 넌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이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꼴이 될 게다.”
유태일 감독은 우려보단 지지를 했다.
“용기 있는 결정이다. 영화가 어찌 될지는 신경 쓰지 말고 소신 있게 행동해라. 너처럼 힘 있는 사람이 하나둘 소신을 잃고 비상식에 편승한다면 세상은 발전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도 잘못된 세상을 향해 옳은 메시지를 날리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이도원은 이로빈을 직시하고 있었다.
순간 이로빈의 입가에 조소가 매달렸다.
반면 이도원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대로 이상백과 유태일, 두 사람의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제 자신만큼은 상식적으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 역습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