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2) >
“정말 넌 적이 되고 싶지 않은 녀석이다.”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의 발 빠른 대응에 감탄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도원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고 이겨낸 사람처럼 대단히 굳건한 심지를 갖고 있었다.
물론 이도원 입장에선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한순간에 목소리를 잃어도 봤는데 이 정도쯤이야.’
당시에는 장애가 생긴 것보다 연기를 마음껏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무성극이라는 해답을 찾은 후에도 공연이 없는 날마다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이도원에게서 눈을 돌린 유태일 감독이 캐스팅 디렉터 정윤복 차장과 엑스트라 반장에게 다가가서 무언가 이야길 나눴다. 대화가 끝났을 때 정윤복과 엑스트라 반장은 얼굴을 붉히며 현장을 떠났다. 두 사람을 추방한 유태일 감독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서 촬영을 재개했다.
“많이 지체됐습니다. 다들 발 빠르게 움직여요.”
그가 독려하자 스태프들은 한층 기민하게 촬영에 임했다.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의 촬영 분을 모두 찍을 동안 이도원의 시선은 현장에 머물러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더 이상 레드 엔터와 마찰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끝장나든 승부를 봐야 해.’
이도원은 스윽 눈을 감았다 떴다.
날이 저물 때쯤 김진우의 촬영 분이 다시 시작됐다. 범죄현장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분석하는 장면이었다.
당일 분량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조연출과 각 분야 감독을 데리고 스태프 회의를 한 유태일 감독이 산 아래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원이 일당. 혹시 서울로 이동하는 대로 바로 이어서 촬영할 수 있겠어?”
철야를 넘어 이틀 내리 촬영을 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방해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요소가 늘어난 상황이기 때문에 촬영 일정을 최대한 바짝 끌어당기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야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사정을 잘 아는 이도원은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에게 시선을 던졌다. 세 사람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절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정성우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미래의 기획사 대표님이신데, 난 당연히 오케이. 예쁨 받아야지.”
오준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전 대표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그때는 매니저고 지금은 소속 배우지만 제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동안 오준식과 많이 친해진 심재빈이 혀를 내밀며 장난을 쳤다.
“우와, 선배. 완전 오그라드는데요? 여러 선배님들도 피로를 잊고 촬영하시겠다는데 가장 영한 막내가 뺄 수는 없죠. 가장 앞장서서 겸손한 자세로 모시겠습니다!”
그 너스레를 보며 오준식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더 호들갑인 것 같은데?”
세 사람에게서 적극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마음이 든든해진 이도원은 시익 웃으며 유태일 감독에게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소속 배우들을 잘 뒀어.”
유태일 감독이 감탄하자 이도원도 지지 않고 말했다.
“배우야 분량 있을 때만 고생하면 되지만, 스태프들은 워커홀릭인 감독님 촬영 스케줄을 전부 소화해야 되잖아요? 아무나 못 한다고요.”
유태일 감독이 잠깐 말문이 막힌 사이, 입에 펜을 물고 콘티를 들여다보던 조연출이 고개를 들며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그나마 선배님이 막힘없이 찍으시니까 지치지 않고 촬영하는 겁니다. 흐름이 뚝뚝 끊기면 현장이 고통에 물들죠. 반대로 촬영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절로 흥이 납니다. 이래서 연출을 잘 만나야 해요. 배우도 그렇지 않나요?”
이도원 역시 맞장구를 쳤다.
“전 운이 좋아서 연출력이 좋은 감독님들과 작업했지만 확실히 유 감독님 촬영 때가 경쾌한 맛이 있어요.”
유태일 감독이 빙긋 웃으며 눈을 흘겼다.
“<시간아! 돌아와> 정 피디님이나 영기 선배도 나랑 비슷한 스타일인데, 뭘.”
“아닙니다. <시돌>이나 <투사>도 스타일은 좀 다르시더라고요.”
이도원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투사> 촬영은 좀 고루한 느낌이었다.
반면 <시간아! 돌아와>는 유들유들한 분위기였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장점만 적절히 섞인 현장 분위기를 연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유태일 감독이었다.
“어쨌든 전 감독님 현장이 가장 잘 맞습니다.”
이도원의 말에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영광이군.”
그 사이 현장 철수 작업이 거의 완수되었다.
김진우는 아직도 분한지 혼자 떨어져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충 인사를 나눈 김진우는 밴을 타고 현장을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쉰 유태일 감독이 화제를 돌렸다.
“내 동생이 네 안부를 매일 같이 전화로 묻는 통에 영 귀찮다. 시간 되면 현장 놀러 온다고, 그전에 싸인 하나만 받아달라고 하더라.”
“얼마든지요.”
이도원의 시선도 김진우의 밴에 머물러 있었다.
“설마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 촬영에 지장을 줄 만한…….”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야. 그 사실이 더 자존심 상하고 열이 받는 거겠지. 그나저나 이로빈 대표가 너까지 싸잡아서 공격하려고 작정한 것 같은데, 어쩔 생각이야?”
“이로빈 대표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에요. 김봉민 의원, 차기열 회장까지 뒤에서 개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방에 무너트릴 수는 없는 상대니까 잽을 날리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할 생각이에요.”
“나도 거들지.”
그렇게 말한 유태일 감독이 덧붙였다.
“내 영화를 전쟁터로 삼은 것 자체가 불쾌하거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부탁했다.
“말이 나왔으니, 제작발표회 일정을 예정보다 앞당겨주셨으면 합니다. 제작발표회가 시작되면 제가 이번 방해공작에 대해 공개하면서 스타트를 끊을 겁니다. 그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다. 타이밍은 내가 알아서 잡도록 하지.”
두 사람은 합의를 본 후 현장을 옮겼다.
*
다음 촬영은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진행됐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실내 촬영이기 때문에 저녁처럼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이도원을 비롯한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은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분장을 받았다. 번듯하고 훤칠한 모습의 남자들이 레스토랑에 둘러앉자 그림이 멋들어졌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연출에게 물었다.
“박아현과 단역 여배우는?”
“도착했습니다.”
조연출이 고갯짓을 했다.
레스토랑 한쪽에 꾸며둔 분장실에서 두 명의 여배우가 나왔다. 한 명은 박아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연출부에서 오디션을 통해 뽑은 단역이었다. 또한 박아현의 역할과는 달리 이번 장면만 등장한다.
박아현이 오준식과 나란히 앉고, 단역 여배우가 정성우 곁에 착석하자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콘티대로 가겠습니다. 카메라 잘 잡아야 됩니다. 애틋한 부부 두 커플과 화목한 분위기, 행복한 가정을 일군 동료들을 보며 남몰래 고독한 기분을 느끼는 도원이, 시간이 흐르고 일전 일로 불만을 토로하는 재빈이 때문에 급격히 고조되는 긴장감까지… 롱 테이크 촬영이니까 스태프와 배우의 호흡이 중요해요.”
유태일 감독은 다른 때보다 더 신신당부했다. 배우와 스태프 모두 피로와 싸우느라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갑니다. 카메라 롤.”
유태일 감독의 지시에 스크립터가 슬레이트를 치고 빠졌다.
“레디, 액션.”
마침내 신호가 떨어졌다.
코스 메뉴와 와인이 함께하는 저녁식사였다. 호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오준식이 박아현을 챙기며 애정 어린 대화를 나누었다. 정성우와 단역 여배우 역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운데 상석에서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들을 관망하는 이도 원의 눈빛에 괴로움이 묻어났다.
이도원은 두 부부와 누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을 띠었지만 시선에는 고독과 부러운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표정 외에도 붐 오퍼레이터가 카메라 아래로 마이크를 대며 침 삼키는 소리, 숨소리 하나하나 놓치지 않았다. 느릿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에 넣고, 씹고, 삼키는 과정이 마치 씁쓸한 기분에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감정을 전달했다. 경박하지 않고 절제된 감정 표현이었다.
그때 오준식이 물었다.
“그나저나 대장은 언제 결혼할 거예요? 남자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는 건 인생의 중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정성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맞습니다, 대장. 제수씨 덕분에 중심이 생겨서 저 도박꾼이 목이 잘려야만 끊을 수 있다는 도박을 다 끊었잖아요? 가정은 필요하다고요.”
이도원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씁쓸한 표정을 본 심재빈이 끼어들며 물었다.
“행복한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겁이 나는 것 아닙니까?”
훈훈하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심재빈은 입가에 난 상처 분장을 만지며 삐딱하게 앉아 말했다.
“그렇잖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정을 가진다는 게…….”
정성우가 식탁을 치며 말을 잘랐다.
“닥쳐, 무슨 짓이야?”
오준식은 물로 입을 헹구고 심재빈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아까 일 때문에 억하심정이 남은 거겠지. 하지만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린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어.”
이도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숟갈을 들어 와인 잔을 두드렸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모두 주목시킨 이도원은 오준식과 정성우를 차례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오준식이 눈치껏 몸을 일으켰다.
“가자고.”
박아현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심재빈을 쏘아보았다. 잠시 후 일어난 그녀가 드레스 밖으로 드러난 가슴골을 가리고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이도원에게 인사를 했다.
“항상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이이를 안전하게 보살펴주세요.”
“세상에 안전한 일이 어디 있어?”
그렇게 말한 오준식이 박아현의 어깨를 감싸며 덧붙였다.
“가자.”
“알겠어요, 여보.”
그녀는 정성우와 단역 여배우에게도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카메라가 이번에는 정성우와 단역 여배우를 잡았다. 카메라가 다른 곳을 보는 동안 앵글 밖 이도원은 물을 마시며 박아현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이상해.’
그는 박아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움직임이 오늘은 시종일관 부자연스러웠다. 인물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처럼 보였다.
정성우와 단역 여배우가 대자리를 떠남으로써 식사 자리에서의 촬영은 마무리가 됐다.
모니터링을 하며 이도원이 유태일 감독에게 말했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유태일 감독 역시 박아현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현이에게 얘기 좀 잘 해줘.”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박아현에게로 다가가 곁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박아현이 이도원을 잠깐 보다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다들 피곤할 텐데, 내가 폐를 끼쳐서…….”
“엔지 때문이 아니란 건 알잖아.”
이도원이 말을 자르자 박아현은 얼굴을 숙였다.
“미안. 다른 스태프나 배우들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할게. 어제 안 좋은 소식을 듣는 바람에 정신을 딴 데 팔았어.”
그녀는 전에 없이 심한 자기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유를 묻지 말아달라고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도원은 빤히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걱정된다. 기획사 대표나 동료 배우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그 말을 남긴 이도원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스태프들을 보며 말했다.
“가자.”
< 역습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