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56화 (156/178)

< 역습 (1) >

이도원,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이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유태일 감독은 콘티를 들고 와서 배우들에게 촬영 방식을 설명했다.

“도원이 중심으로 카메라가 따라붙으면서 롱 테이크 촬영을 할 생각이다. 특별한 조명이나 반사판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거야.”

“알겠습니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상’ 역할의 보조출연자들은 하나같이 뺀질뺀질한 얼굴과 태도로 자신들의 위치에 서있었다.

이내 모니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유태일 감독은 예리한 눈빛으로 현장을 훑으며 지시를 내렸다.

“갑니다. 카메라 롤.”

그 말에 따라 카메라가 작동하고, 스크랩터가 몸을 숨기며 화면 안으로 슬레이트를 쳤다.

“씬 2의 1.”

슬레이트가 화면에서 자취를 감추자 유태일 감독이 배우들에게 신호했다.

“레디, 액션!”

동시에 이도원과 카메라가 움직였다. 그러자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이 뒤따랐다. 비좁은 통로에 기대어 선 보조출연자들을 눈길 한 번 안 주고 지나친 이도원이 복도 끝 쪽방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무기상 역할의 단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똑바로 연기할 생각이 없는지 대본과는 다르게, 웃음기가 벤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소문이 자자한 거물 나리신가? 빵에서도 대장 노릇을 했다지?”

이도원은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에 반응하지 않고 얼음장 같은 표정과 눈빛으로 빤히 응시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단역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리고 그때서야 이도원이 걸음을 움직여 다가갔다.

‘뭐야?’

대본에는 어떤 대사도 없었기 때문에 단역은 당황했다. 마치 주먹을 한 대 먹일 듯 거침없이 다가온 이도원이 등 뒤로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오준식이 몇 걸음 다가와서 말했다.

“대장은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이런 쾌쾌하고 지저분한 소굴로 기어들어온 게 아니다. 물건이나 보여줘.”

단역은 이도원을 마주 보다가 눈을 깔았다. 이미 배역에 깊숙이 몰입한 그의 감정 없는 눈빛은 배우가 아닌, 끔찍한 인생을 견디고 살아온 범죄자의 것이었다.

잔뜩 위축된 단역이 대사를 더듬었다.

“도, 돈은?”

이도원이 손뼉을 치자 정성우가 묵직한 돈 가방을 들고 나와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쿵, 소리와 함께 단역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는 돈 가방의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체 한 뒤 크게 외쳤다.

“물건 가져와!”

머릿속으로는 엔지를 낼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엔지 내는 걸 성공할 때마다 출연료의 세 배를 받기로 했던 것이다. 반면 티 안 나게 엔지를 내야만 여러 번 돈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난장을 피울 수는 없었다.

한편 이도원 역시 눈앞의 단역 배우를 살피며 그들 사이에 약속된 규칙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야만 촬영을 방해하려는 수작을 막을 수 있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대놓고 방해를 하진 않는다. 저들이 원하는 건 교묘하게 촬영을 지연시키는 거야.’

생각이 미친 이도원은 문득 깨달았다.

‘단순한 일반인이 아니다. 엔지를 낼 타이밍을 재고 있어. 섭외업체 오디션을 봐야하는 단역들은 배우, 보조 출연자들만 일반인이다.’

이도원이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 입장에서도 노골적으로 방해공작을 펼치면 유태일 감독 쪽에서 단역과 보조 출연자들을 고소하고, 내막을 파헤쳐서 언론에 알리는 등 일을 크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역과 보조출연자들이 모두 고용된 입장일 뿐 레드 엔터테인먼트와 특별한 유대관계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잘만 하면 뒤집을 수도 있겠어.’

곧 보조출연자 하나가 총기류가 담긴 가방을 가져와서 건넸다. 그러자 건네받은 심재빈이 가방을 땅에 두고 총을 꺼내어 일일이 상태를 확인했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가방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서 탄창을 조립하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앞에 있던 단역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빵에서 계철이를 잘 보살펴주었다고 들어서 믿고 거래한 거요. 잘 들어요. 괜히 물건 함부로 썼다가 여기까지 피해가 오면 그땐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순간 이도원이 권총을 단역의 이마에 겨눴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그가 묻자 이도원은 동료들에게 눈짓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도원의 냉철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그가 미리 생각해 두었던 상황이란 것을 알 수 있게끔 했다.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이 총을 하나 씩 챙겨들고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였다. 정성우는 총기 가방을 내온 보조출연자에게 기관총을 들이밀며 위협했고, 오준식과 심재빈은 방문을 잠그고 양쪽으로 섰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채 방안까지 봉쇄당한 이때, 단역은 속으로 엔지 타이밍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럼 어디…….’

그때 이도원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장면을, 네가 처맞는 장면으로 바꿔주면 엔지를 안 내겠나?

이도원은 어차피 대사가 없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붐 오퍼레이터가 붙어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숨소리에 섞인 음성이 걸려서도 안 되기 때문에 오디오 민감도도 낮춘 상태였다. 따라서 다른 배우들은 호흡을 섞여 조금 큰 목소리로 연기를 하고 있는 반면에, 이도원의 속삭임은 오디오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막 엔지를 내려던 단역만이 주춤했다.

‘이거, 완전 꼴통이야.’

단역은 확신했다. 협박하는 이도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주연인 이도원이 단역을 괴롭히고자 마음먹고 촬영이 계속된다면 정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도원은 현장에서 그만큼의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단역이 중간에 때려 치우면 어차피 돈을 못 받는다. 심지어 출연료마저도 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엿 됐군.’

단역은 결국 진심을 다해 대사를 쳤다.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내심,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엔지를 내는 걸 단념한 단역이 대사를 이어나갔다.

“밖에는 열 명 넘는 부하들이 무장하고 있다. 날 순순히 놓아준다면 목숨만은 살려 보내주마. 그러니 괜히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돈과 물건만 두고 가라.”

심재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개새끼. 대장 말이 맞았어요. 놈들은 어차피 물건을 넘길 생각이 없었어요.”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k-1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번쩍거리면서 총성이 터졌다.

단역을 잡고 있던 이도원이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러자 마치 진동 스위치를 누른 듯, 단역은 경련하며 주저앉았다.

‘연기 잘하네.’

이도원은 내심 웃었지만 겉으로는 일순 놀란 얼굴을 했다. 심재빈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성우가 심재빈에게 외쳤다.

“미친 새끼! 무슨 짓이야?”

심재빈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저 새끼가 우릴 속이려고 했어요. 속이려고 했다고요.”

“진정해라. 총 내려놓고.”

오준식이 말했지만 심재빈은 좀체 진정하지 못했다.

“우릴 죽일 생각이었을 거라고요. 그래서 쏜 거예요. 왜 나한테 그러는 거예요? 저 새끼가 자초한 일이라고!”

심재빈과 정성우가 서로 총을 겨누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됐다.

정성우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또라이 새끼. 내가 저 새끼 사고 칠 줄 알았어.”

곁에 다가온 이도원이 정성우의 총구를 손으로 내렸다.

그러자 심재빈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대장도 같은 생각이죠?”

이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가더니 심재빈의 총구를 잡아 젖히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자 심재빈이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간단히 총을 빼앗은 이도원은 쓰러져있는 심재빈의 머리통에 총구를 겨눴다.

“대장!”

오준식이 달려와 이도원을 말렸다.

“지금 시체를 늘릴 때가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죠.”

이도원은 손가락으로 심재빈을 겨누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나서 총을 반대로 쥐고 돌려주었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쉰 오준식이 돈 가방을 챙기며 심재빈에게 말했다.

“또 허튼 짓을 했다간 죽은 목숨이다. 여기서 나가거든 팀에서 빠져.”

심재빈은 바닥에 침을 뱉고 대답했다.

“알겠다고요. 제가 앞장서죠.”

정성우도 총기 가방을 멨다.

그러자 심재빈이 문을 발로 차서 열며 방아쇠를 당겼다.

실내를 울리는 시끄러운 총성과 섬광을 비집으며 유태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컷!”

한편 유태일 감독 옆에서 현장을 지켜보던 김진우는 속으로 의문이 들었다.

‘왜 저놈들이 방해공작을 하지 않는 거지?’

김진우의 촬영에서 엔지가 났다. 그 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며 정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고, 이도원이 먼저 촬영을 한 것이다. 이번에도 당연히 엔지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도원은 훌륭히 촬영을 마쳤다. 어디서도 단역이나 보조출연자들의 의도 적인 실수를 찾을 수 없었다.

방금 장면을 돌려본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케이! 다들 와서 확인해 봐.”

이도원과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 그리고 단역배우가 나란히 와서 촬영 분을 모니터링했다. 꽤 흡족한 장면이 나온 상태였다. 단역배우에게 고개를 돌린 이도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보조 출연자분들도 설득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유태일 감독에게 건의했다.

“감독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오늘 인솔을 맡은 정윤복 차장과 엑스트라 반장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빙그레 웃은 이도원은 단역배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했다.

“이 분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엑스트라 반장이 했던 일을 그대로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보조 출연자들을 통솔해 줄 사람은 필요하니까요. 대신 반장 임금까지 지불하면 어떨까요?”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여우 같은 녀석.”

그는 단역 배우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남아서 좀 더 적극적으로 촬영을 돕고, 합당한 임금을 받아 가는 것. 둘 중 선택하십시오.”

단역배우 입장에선 당연히 생각해 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의도적으로 방해했던 것, 정말 죄송합니다.”

유태일 감독이 단역배우의 등을 두드렸다.

“잘 선택한 겁니다. 난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찍을 테고, 당신도 계속 배우를 할 생각이 아닙니까? 레드 엔터에서 출연료의 몇 배를 주고, 단역이나 조연으로 출연 기회를 우선적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겠지만 당신을 기용해 줄 감독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일전의 악질적인 행동을 다른 감독들에게 알리면, 다시는 영화판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유태일 감독은 청산유수로 말했다. 이도원뿐 아니라 유태일 감독 역시 레드 엔터에서 무슨 조건으로 방해꾼을 섭외했을지 생각하고, 약점을 파악해서 상황을 뒤집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여우인지.’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유태일 감독이 배우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포커스로 들어갔던 도원이는 잠시 나와 있고, 다른 배우들 좀 찍겠습니다.”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 그리고 단역배우가 움직일 차례였다. 이도원도 자신이 걸리는 컷에서는 잠깐잠깐 현장에 들어가야 했지만, 일단은 휴식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스태프들이 준비를 하는 동안 유태일 감독이 말을 걸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물론이죠. 감독님도 그렇겠지만 저도 꽤 화가 나거든요.”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한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이번 방해공작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감독님도 힘을 실어주십시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해꾼으로 섭외된 사람이 많으니까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캐스팅 디렉터까지만 잘못을 시인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끄집어 낼 수는 없을 거다.”

이도원이 미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제 신뢰를 누릴 생각이에요. 생각보다 제가 가진 파급력이 크다는 걸 일깨워 줄 겁니다. 상대는 저를 과소평가하고 있죠. 감히 선빵을 날릴 수 없다고 방심하고 있어요. 그래서 터트려 줄 겁니다. 사건이 단순 의혹으로 끝나더라도, 경고사격 정도는 되지 않겠어요?”

< 역습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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