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택일 (10) >
“뭐?”
유태일 감독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역시 방금 촬영이 어색하다고 느꼈지만, 연기자 하나하나의 문제점을 파고들진 않았다. 그저 모니터를 통해 현장을 관망하며 김진우의 연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태일 감독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현장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방송연기학원 성인반 전원이 현장 경험이 없다는 건 앞뒤가 안 맞아요.”
이도원의 대답을 들은 유태일 감독은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조연출에게 말했다.
“캐스팅 디렉터 데려와.”
어조 속에 매서운 분노가 내재돼 있었다. 그는 어떤 때보다 화를 내고 있었다.
조연출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학 후배였던 조연출은 유태일 감독이 화난 것을 한두 번 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한바탕 뒤집히겠구먼.’
스태프들에게 전달해 촬영을 중단시킨 조연출이 캐스팅 디렉터 정윤복을 데려왔다.
정윤복은 뻔뻔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유태일 감독이 그를 빤히 보며 되물었다.
“그쪽 에이전시에 정식으로 항의하기 전에 묻겠습니다. 차장님이 직접 말해보십시오. 섭외한 단역과 보조출연자들 모두 연기자가 맞습니까? 전 현장 경험이 있고, 연기되는 친구들로 부탁드렸는데요.”
“아닙니다.”
정윤복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실수도 아닙니다. 어떤 분의 부탁을 좀 받았거든요. 일단 두 분이 통화를 좀 해보시죠.”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유태일 감독을 바꾸어주었다. 그에 유태일 감독은 노기를 드러내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묻자, 수화기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유 감독님. 나 레드 엔터의 이로빈입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유태일 감독은 현장에서 처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만 봐왔던 이도원은 깜짝 놀랐다.
‘살벌하네.’
휴대폰을 귀에서 뗀 유태일 감독이 모두 들으라는 듯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뒤 올려두었다. 이내 이로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유 감독이 협조해 줬으면 합니다.
“잘 못 들어서 그런데, 촬영을 훼방 놓으면서까지 원하는 게 뭡니까?”
-훼방으로 생각했다니 유감입니다.
이로빈이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저 돕고 싶은 마음에 인력지원을 해드린 것이지요. 그래도 성의가 있는데 기쁘게 받아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김진우는 현장에서 돌아와 상황 파악을 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이로빈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말들이 나왔다.
-투자 계약서 상에는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할 시 소정의 책임을 진다. 에… 고로,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 투자사들이 큰 손해를 봤을 때 유 감독님이 일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 김진우와 이도원을 모두 현장에서 빼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네마천국’ 측에서 두 배우만큼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들을 섭외해드릴 겁니다. 섭외비용 역시, 저희 레드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책임질 거고요.
말이 끝났을 때 김진우의 표정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를 보며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한순간에 철석같이 믿었던 기획사로부터 팽 당했으니 충격이 클 터였다.
한편 유태일 감독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껄껄 웃은 그는 웃음을 뚝 그치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님. 내가 어려서부터 가장 싫어하는 게 뭔 줄 압니까? 바로 참견입니다. 특히 내가 작업할 때 참견을 하면 가족도 못 알아봐요. 근데 지금 당신은 나한테 배우를 빼라 넣어라, 아주 엿 같은 참견을 하고 있어. 당신이 연출이야?”
이번에는 이도원이 충격을 받았다. 수 년 동안 몇 작품을 함께 하면서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로빈 역시 당황했는지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이미 대학시절부터 함께 작업을 해왔던 유태일 감독 팀 스태프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각기 자리로 돌아가 촬영 장비를 옮기고 현장을 세팅했다.
그때 나직이 한숨을 내쉰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내 영화에 장난질하지 마십시오, 대표님. 책임을 지든 말든 그건 내 일이니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럼 끊습니다.”
유태일 감독은 전화를 끊고 이도원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진우 데려가서 십 분 휴식하고 와.”
“네.”
이도원은 착실하게 지시를 따랐다.
김진우 또한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이도원과 자리를 피했다. 그는 표정관리를 하려 했지만 곳곳이 어색하고 떨리는 것이,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고스란히 보였다.
“시발 새끼.”
불쑥, 김진우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당하고만 있을까 봐?”
혼잣말을 들은 이도원이 벽에 기대며 물었다.
“생각 있나?”
“친한 척하지 마라.”
김진우가 까칠하게 말했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옆에 나란히 앉았다.
“네가 쓰레기처럼 버려진 건 관심 없다. 내가 묻는 건 지금 상황에서 촬영할 방법이 있냐는 거야.”
그는 현장을 뚫어져라 보며 물었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촬영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보조 출연자 하나하나가 눈에 띄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은 그림의 배경처럼 전체적인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도원의 생각과는 달리, 김진우는 그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다 병풍들이다. 너랑 나만 연기를 잘하면 돼.”
이도원이 고개를 돌려 김진우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무식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처음 현장에 나온 애송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
그 언사에 모욕감을 느낀 김진우가 이도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비꼬지 마라.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도원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대답했다.
“똑똑히 들어. 그들에게도, 너에게도 똑같이 단 하나의 배역만 주어진다. 너 혼자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할 수는 없지. 영화는 일인 극이 아니야. 같은 공간 안의 사람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넌 삼류일 뿐이다.”
김진우의 손을 가볍게 풀어내며 이도원이 덧붙였다.
“나랑 싸울 힘으로 연기를 해라. 네가 충성한 레드 엔터가 널 버리지 못하도록.”
그는 일어나서 멀어졌다.
뒷모습을 보며 김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넌 연기만 해서 그 자리에 올랐지. 운이 따라줘서 탄탄대로를 걷는 넌 이해 못해. 배우로 가는 길이 얼마나 가시밭길인지… 노력만 해서 닿을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는 걸 몰라. 배우로서 성공하려는 그 몸부림을!’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에게 다가가는 도중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김진우 같은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노력해 볼 용기나 끈기가 부족해 자꾸만 편법을 찾고, 결국 세상이 날 벼랑 끝으로 몰았다고 말한다. 피해 의식에 빠져 비관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이도원은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믿고, 굳건한 마음을 가진다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그런 짐작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때 나도 김진우와 같았으니까.’
이도원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사고를 당하기 전 방송국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연기력을 기르기보다 연줄을 만들거나 관계자들의 눈에 들려고 애를 썼다. 조급한 마음에 성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집착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사고가 난 후였다.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연기하는 행위 자체의 행복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소리를 잃고 나서 인기나 출세에 대한 과욕을 내려놓은 후 이도원은 진정한 연기를 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훈련하며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그리고 20년 전으로 타임 슬립 한 뒤에도 그런 마음가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옳고,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척도는 재력이나 인기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 현재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감독님.”
이도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유태일 감독을 향해 말했다.
“이대로 촬영 진행하시죠. 어차피 지금 시간에 새로 보조 출연자들을 부를 수는 없잖아요.”
어느새 밤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유태일 감독이 시선을 들어 이도원을 빤히 보았다.
“작정한 훼방꾼들을 데리고 촬영을 하자고?”
“예.”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대답했다.
“지금 상황을 믿게 만들면 됩니다.”
“상황 자체를 믿게 만든다?”
“놀이기구를 탈 때 우리는 안전장치를 합니다. 떨어지거나 다치지 않을 걸 알고 있죠. 또 공포영화를 보거나 공포체험을 할 때에도 처음부터 진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죠.”
“그런데?”
“근데 분위기에 지배되잖아요. 머릿속은 탈색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표정 짓지 않습니까?”
이도원의 말을 들은 유태일 감독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그런 현상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연기로 상대의 감정을 끌어내고 영향을 줄 수는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배우의 연기보다 카메라와 조명, 스태프들이 만드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긴 촬영장이다. 완성된 영화도 아니고, 연극이나 뮤지컬도 아니야. 돈을 받고 불협화음을 내기로 작정하고 온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린단 말이냐?”
이도원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연기는 공간 안의 모든 사물과 호흡하는 겁니다. 감독님께서는 불필요한 스태프들은 최대한 물려주시고, 가능한 한 분위기 조성을 해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저었지만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딱히 다른 묘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조 출연자들과 단역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빼고는 밑져야 본전이었다.
“좋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해보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촬영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미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 현장의 모든 이들을 속여야만 했다. 감정적으로 ‘진짜’라고 믿게 만들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도원은 다른 곳으로 눈 돌리거나 고민할 새도 없이 어떤 연기를 보일 것인지 집중했다.
‘특별히 동선을 짜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준비는 항상 부족하게 느껴지는 법이야.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감과 떨림을 에너지로 바꿔서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을 쏟아붓는다.’
이도원이 눈을 번쩍 떴다.
현장에는 환한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스태프가 조명 위에 투명한 종이를 덧대며 빛의 양을 조절했다. 카메라 감독은 이도원을 찍을 구도를 유태일 감독과 상의하고 있었고, 음향감독은 붐 오퍼레이터를 통해 장비를 체크하고 있었다.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은 현 상황을 관망하며 반대쪽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 모두 이도원과 함께 현장에 투입할 배우들이었다.
이도원이 천천히 일어나 다가가자 눈치를 보고 있던 정성우가 물었다.
“왜 다들 그리 심각해?”
이도원은 상황을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부담만 가중시킬 뿐, 알든 모르든 달라질 건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호흡을 내쉰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얼굴색을 바꾸고 대답했다.
“별일 아닙니다. 단역과 보조 출연자의 현장 경험이 부족해서 우리는 제 몫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유 감독님이 믿고 선택하신 배우가 우리니까, 실력만큼만 해내면 성공적인 촬영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한 얼굴을 했다.
그때 조연출의 지시가 들려왔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배우들 위치해 주세요!”
< 양자택일 (1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