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54화 (154/178)

< 양자택일 (9) >

잠시 후 액정을 치운 이도원은 대본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가 연기할 캐릭터는 대사가 없었다. 일견 대사를 외우거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줄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따라서 이도원이 생각하기에, 어려웠다.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 이진빈은 대본을 뒤적거리는 이도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을 때부터 느꼈지만… 어떻게 저토록 몰입할 수 있지?’

연기에 미친 배우를 발견한다면 그게 바로 이도원의 모습이었다. 대본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야말로 이글이글 타올랐고,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다른 세상에 가있는 듯했다.

오준식의 매니저를 할 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갓 유능한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오준식 마저도 일정이 밀리면 간간이 휴식을 취하거나 연습을 쉬는 날이 발생하는데, 훨씬 바쁜 이도원은 얄짤 없었다.

‘준식이 형이 왜 그랬는지 알겠어.’

오준식은 항상 이도원이란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은인이고 롤모델이라는 말 외에도, 나태해질 때마다 괜스레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을 다잡았다.

잠시 오준식을 추억하던 이진빈이 운전에 집중했다. 불빛 한 점 없는 비좁은 산길을 헤드라이트에 의존해 올라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주소를 받았을 때 예상은 했지만… 이건 깡촌도 너무 깡촌인데요? 제대로 온 것 맞겠죠?”

이도원이 대본을 내리며 차 시트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창문을 물들였던 먹색 차단막이 뒤바뀌며 바깥의 전경이 드러났다. 물론 그럼에도 밤하늘의 무수한 별 말고는 딱히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이도원은 확신했다.

“이곳 맞다. 오랜만에 별을 보니까…….”

이도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아련한 추억들이 생각난 것이다. 군 시절 무수한 별을 올려다보며 제대를 꿈꾸던 날들, 수많은 현장을 전전하며 오준식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나란히 떠올랐다. 기억은 미국의 하늘을 지나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밤하늘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많은 걸 변하게끔 만들었다. 어쩌면 이도원은 과거보다 발전된 현재를 살고 있었지만 추억 속 한때가 그립기도 했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들에 대한 애틋함.’

이도원은 대본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본 속 캐릭터가 떠올리는 건 애틋함이 아닌,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들이다.’

대본 속에는 캐릭터의 과거가 나와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기억들을 창조하고, 점차 연기할 캐릭터가 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연기란 굉장히 위험하고 매력적인 예술이었다. 대부분의 예술이 간접적 표현을 표방하지만, 연기만큼은 직접 표현할 인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이도원은 눈을 스윽 감고 뒤통수를 기대며 말했다.

“진빈아. 도착하면 깨워줘.”

“넵.”

이진빈의 대답을 귓가로 흘리며 이도원은 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끝까지 참다가 잠 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흡사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 이도원은 방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방을 상상들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대본 속 캐릭터의 과거를 그 당시 사용했던 사물의 생김새 하나하나까지 모두 떠올리는 작업이었다.

‘억울함. 차별.’

모든 환경과 분위기를 형상화 한 이도원은 캐릭터의 과거에서 느껴지는 촉감, 색깔, 냄새 등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집에서 학대를 당하고 학교에서 차별을 받았다. 늘 마음속에는 불길이 치솟았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스스로 약자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건 학대하던 아버지를 죽였을 때… 그렇게 청소년 시절부터 첫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다. 소년은 감옥 안에서도 특이한 생각들을 한다. 학대받고 차별당하는 약자가 아닌 강자로 살아남기 위해, 내재된 불만을 터트리기 위한 준비를 한다. 조용하고, 치밀하게.’

거기까지 생각한 이도원은 숨을 길게 뱉어냈다.

“후우우우우…….”

“일어나보세요! 다 왔어요!”

어느새 현장에 도착했는지 이진빈이 부르고 있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알겠다.”

창문 밖,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산속에 묻혀있는 허름한 창고에서 진행되는 철야 촬영이었다. 영화의 첫 씬으로, 이도원 일당이 무기 밀거래를 한 후 상대측 조직을 몰살한 현장에 김진우가 조사를 하러 나온 장면이다. 굳이 이도원까지 이번 촬영에 합류한 이유는 김진우가 현장을 살피며 짐작하는 상황에서 회상하듯 이도원의 범죄 행각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현장 세팅이 끝나자 먼저 와있던 김진우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나란히 서있는 이도원과 유태일 감독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다른 배우들은 아직 안 왔습니까?”

이 장면에선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이 함께 나온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 사실이 못 마땅한지 김진우가 까칠하게 굴었다.

“촬영 순서가 현장에서 조절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백 엔터 배우들은 준비성이 부족하군.”

반면 이도원은 황당해서 웃음이 다 나왔다. 볼 때마다 시비를 트는 행동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은.’

그는 유태일 감독의 얼굴을 봐서 참기로 했다.

김진우는 시비를 걸려고 의도한 건 아니었는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돌렸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의 제가 아니니까요.”

유태일 감독의 표정을 읽은 김진우가 말했다. 그는 대본 리딩 때부터 지나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저으며 먼저 물었다.

“전처럼, 말 편히 해도 되겠나?”

“그러시죠.”

양해를 구한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배우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하는 점이다. 네가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자신감이 과하면 교만이 되는 법이야.”

“충고는 명심하겠습니다. 저희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생각했더니 잠시 들떴었나 봅니다. 협력관계의 제작사인 <시네마천국> 주관 하에 작업을 하게 되니, 뭐랄까…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랄까요?”

김진우는 소속 기획사 레드 엔터테인먼트와 이번 영화의 최대투자사 시네마천국의 친분관계를 강조하며 자신이 미치는 권한을 과시했다. 그는 레드 엔터테인먼트가 자신을 버리는 카드로 낙점했다는 사실을 짐작도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해줘야 할 텐데.’

이도원과 유태일 감독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을 보며 김진우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두 사람을 그저 친한 복식조로 여기며 따지지 않았다. 대신 불만스러운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이것들은 언제 오는 거야?’

그때 마침 공터 입구로부터 환한 불빛이 들어오며 밴 세 대와 팀 버스 한 대가 줄줄이 정차했다.

밴에서는 ‘이도원 일당’ 역할의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이 내렸고, 팀 버스에선 이번 촬영에 참여할 보조출연자들이 내렸다.

정성우, 오준식, 심재빈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는 이도원까지 두루두루 훑은 김진우는 자리를 뜨며 명백한 조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오준식이 목소리를 낮추며 헛바람을 뿜었다.

“하. 저거는 언제 봐도 밥맛없네.”

정성우가 피식 웃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말고 우리나 잘하자. 김진우가 성격은 저래도, 연기 하나는 잘하잖아. 후배라도 인정할 건 해야지.”

“선배님은 군대 갔다 오신 후로 오히려 유해지셨네요. 입대하시기 전에는 군기 잡는 선배로 유명하셨는데.”

오준식의 말을 들은 정성우는 얼굴이 화끈했다.

“창피하다, 창피해.”

두 사람을 보며 빙그레 웃은 이도원은 조금 떨어져 조연출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유태일 감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팀 버스부터 보조출연자들을 인솔한 엑스트라 반장과 캐스팅 디렉터가 함께 있었다.

그중 캐스팅 디렉터가 이도원의 눈에 익었다.

‘누구지?’

그 순간 캐스팅 디렉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콧수염을 기르고 껌을 질겅질겅 씹던 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 역시 이도원을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랜만이네요? 이도원 배우.”

목소리를 높이며 캐스팅 디렉터가 다가왔다.

“설마 날 잊은 건 아니죠? 나 정윤복이라고 합니다.”

캐스팅 디렉터 정윤복이 명함을 내밀었다.

이도원은 명함을 받아서 살펴보았다. 차장이라는 직함으로 볼 때 현장 적응을 도와줘야 하는 주조연급 아역이라면 모를까, 다 큰 성인 보조출연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현장에 직접 나올 짬밥은 아니었다. 이도원이 그런 의구심을 느끼고 있을 때, 정윤복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하긴 너무 오래됐죠. 그때 봤을 땐 고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훌륭한 배우가 됐습니다. 아무튼 축하합니다.”

정윤복은 악수를 청했다.

이도원은 손을 맞잡은 순간 생각이 났다.

“아아. KAS 드라마 오디션 때 뵀었죠?”

<우리의 심장>으로 데뷔하기도 전이었다. 무려 고등학교 일 학년 시절의 인연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윤복이 합격자를 내정한 후 오디션을 진행한데다 대본으로 장난질까지 쳐서 악연으로 느껴졌지만 이미 한참 지난 일일뿐이었다. 따라서 이도원은 반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윤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껌을 씹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휴, 엄청나게 유명해지셨더라고요. 아직 국내에선 캐스팅 디렉터라는 직업이 생소하고, 주연급 배우는 모조리 감독님 손으로 섭외하시니 그동안 만날 일이 없었죠. 도원 씨는 지금껏 계속 주연만 해왔잖습니까?”

이도원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계신 곳은 학원 겸 에이전시네요?”

그가 명함을 보며 묻자 정윤복이 설명해 주었다.

“중요한 역할은 외부에서 섭외를 하고, 단역이나 보출(보조출연)은 학원생들 위주로 섭외를 하고 있습니다.”

이도원은 다시 한 번 의구심이 들었다. 엑스트라 전문 기획사도 아닌 학원 겸 에이전시 소속 디렉터 차장이 보조출연자들을 우르르 끌고 현장에 직접 납시다니.

‘냄새가 나는데.’

이도원은 꺼림칙했지만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유태일 감독은 김진우에게 콘티를 설명했다. 계획대로 첫 장면은 김진우 먼저 촬영하기로 잡힌 것이다.

“한번 잘해봅시다. 자! 배우 위치하고, 스태프들 카메라 롤, 카메라 따라갑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진우에게 붙었다. 김진우가 심호흡을 마치자 유태일 감독이 확성기를 대고 외쳤다.

“첫 촬영 레디, 액션!”

영화 첫 씬의 원 테이크였다.

촬영이 시작되자 김진우는 생각해 둔 동선대로 움직였다. 아니, 완벽한 형사 ‘강철’로 분해 본능에 이끌려 움직이고 있다는 쪽이 맞았다.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으며 건물 안쪽을 살폈다.

시체처럼 분장을 한 보조출연자들이 쓰러져 있고, 경찰 유니폼을 입은 보조출연자들이 살해현장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은 시끌벅적했다. 김진우는 제한 선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서 말했다.

“하, 이 새끼들… 총기거래도 모자라서 살인? 감식반, 뭐 나온 거 있냐?”

현장감식반 소속 과학수사요원 역할의 단역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짱 꽝입니다. 이놈들, 프로예요.”

김진우는 이쑤시개를 물고 침 새는 소리를 내며 안쪽을 둘러보았다. 곳곳을 살피던 그는 장갑을 벗으며 피식 웃었다.

“혈흔은 물론 지문,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다? 거기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싹 처리하고 떴어. 이쪽 프로세스를 정확히 알고 있는 놈들이란 뜻이야.”

“무기 밀거래 장소라 감시카메라도 없고 심지어 차를 타고 온 것 같지도 않아요. 뭐 하나 단서가 없습니다. 수법이 너무 깔끔해요.”

“하늘로 솟았든 땅으로 꺼졌든 잡을 수 있다.”

김진우가 움직이는 대로 감식반 단역과 스태프들이 따라붙었다. 또한 김진우는 멈추지 않고 현장을 살피며 적절한 대사를 쳤다. 대부분이 애드리브였으며,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살려주었다.

‘자신할 만하네.’

이도원은 깔끔하게 실력을 인정했다. 반면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유태일 감독에게로 가서 속삭였다.

“뭔가가 이상하지 않아요?”

“컷!”

마찬가지로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컷을 외친 유태일 감독이 모른 척 되물었다.

“무슨 소리냐?”

이도원은 현장을 빤히 응시하며 청산유수처럼 줄줄이 말했다.

“시체는 얼굴을 씰룩였습니다. 감식반은 제자리에서 손장난만 치고 있죠. 심지어 감식반 사진기 플래시도 우리 카메라 구도를 생각 안 하고 터트렸어요. 이것뿐이면 적응이 안 됐구나 하겠는데 카메라를 봅니다. 카메라가 움직일 때 조명 뒤로 몸을 피하면 되는데 다들 화면에 걸리지 않도록 도망 다니기 바쁘죠.”

배우가 카메라를 보는 순간 관객도 의식하게 된다. 또한 조명 뒤에 서면 절대 화면에 잡히는 일이 없다. 이는 촬영 초짜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짧은 순간, 현장의 연기자 한 명 한 명을 모두 아우른 이도원이 유태일 감독을 보며 확신했다.

“저 사람들. 연기자 아닙니다.”

< 양자택일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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