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택일 (8) >
이도원을 만난 날, 이상백이 물었다.
“왜 김봉민 의원의 제안을 거절한 게냐?”
이도원은 대답하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파 아래 깔린 클래식한 카펫, 모던한 벽걸이 선반과 조각품 등 사무실을 꾸미고 있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회사 규모도 많이 커졌군요.”
툭 뱉은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유태일 감독님이 거절한 부탁을 제가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김봉민 의원을 언제 봤다고, 그가 내미는 손을 덥석 잡을 수도 없었고요.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바로 협박을 해오더군요. 그런 사람과 한 배를 타면 당장은 풍파를 피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침몰하고 말겁니다.”
이상백은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네가 잘나니 주변에서 자꾸만 위험한 접촉을 해오는구나. 흔들림 없이 꿋꿋이 파도를 헤쳐 나가는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위태로워 보인다.”
그 말에 이도원이 슬그머니 미소를 띠었다.
“다 잃어봐야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유랑극단을 만들고 순회공연을 할 당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도전이, 제게 연기를 할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습니다. 저는 도리를 지키며 연기를 할 뿐입니다. 후폭풍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상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주 용감하고 단단해졌구나.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김봉민 의원이나 레드 엔터테인먼트 쪽은 우선 두고 보자. 전에 말했다시피 자력으로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회사가 나서서 해결할 게다. 그러니 넌 영화 촬영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연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
영화 <서커스>는 불안정한 구도를 띤 채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5년 1월 23일, ‘시네마천국’ 본사로 배우들이 속속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도원 역시 매니저 이진빈과 동행하여 충무로에 소재한 ‘시네마천국’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이 겹쳐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여배우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대표님.”
그녀의 선글라스가 콧등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 여배우는 다름 아닌 박아현이었다.
이도원이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러게. 준식이랑 부부 역할이던데?”
“맞아. 그동안 드라마에서 한 번 진하게 호흡을 맞춰봐서 거뜬하지.”
박아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모처럼 비중 있는 조연을 맡게 돼서 마음껏 연기를 펼칠 생각에 기분이 붕 떠있었다. 표정으로 그런 심리를 읽은 이도원은 흥을 깨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기대하고 있어. 얼마나 늘었을지.”
그때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이도원과 박아현이 내려 복도 끝 리딩 룸을 보았다.
박아현이 먼저 샐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화장실 들렸다 갈게요.”
“그래.”
대답한 이도원은 먼저 리딩 룸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차지은과 오준식, 심재빈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대표님!”
심재빈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그는 이도원을 알기를 하늘 같이 여기는 후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반짝이는 눈빛에서부터 존경심이 묻어났다.
오준식 역시 입을 벙긋거리며 다가와서 포옹으로 환영사를 대신했다. 그는 이도원을 대표라고 부르는 것이 영 어색한지 최대한 호칭을 아끼며 말했다.
“정말 보고 싶었다고요.”
한편 차지은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웃으며 고개만 살짝 숙였다.
배우들의 인사를 받은 이도원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니까 감회가 새롭다.”
그 말에 다들 동감하는 눈치였다.
박아현 역시 리딩 룸 안으로 들어오더니 눈을 반짝이며 실내 풍경을 바라봤다.
“정말 흔치 않은 캐스팅이네.”
백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이 한 작품에서 뛴다는 건 생각만 해도 설레고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이 반갑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내 정성우와 김진우가 도착했다. 두 사람은 외부 배우였지만 익숙하게 자리에 가서 앉았다.
“대부분 아는 얼굴이군.”
나직이 중얼거린 김진우가 한 사람 씩 훑으며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잘 부탁합니다. 그나저나 신기하게도 모두 백 엔터 소속 배우들이군요. 이렇게 귀한 분들께서 한 자리에 모인 데는 제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대답이 들려왔다.
“모종의 이유는 없습니다. 김진우 씨.”
유태일 감독이었다. 그를 발견한 배우들이 분연히 인사했다. 손을 들어 답례한 유태일 감독이 가운데 앉으며 좌중을 훑었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또한 천군만마 같은 배우 분들과 함께 작업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태일 감독이 이어 말했다.
“저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아시리라 믿고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우리의 심장>, <악마의 재능>, <바람>을 연출했습니다. 그중 바람은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내기도 했죠. 그리고 이번 영화 <서커스>로 그 기록을 갈아치울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환호가 터졌다.
다음으로, 미소 띤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개하지.”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입을 열었다.
“배우 이도원입니다. 감독님이 나열하신 네 작품에 모두 함께 참여했습니다.”
사실 정성우나 김진우를 제외하면 모두 백 엔터테인먼트 사람이었기에 그들 간에는 특별한 소개가 필요치 않았다. 따라서 배우들은 간략하게 이름과 작품 정도만 열거했다.
이내 정성우까지 소개를 마치고, 마지막 김진우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조금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형사 ‘강철’ 역할을 맡은 김진웁니다. 다른 집 사람이라도 잘 대해주십시오. 그리고 비록 제가 배역을 따냈지만…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정성우 선배님.”
그 말을 들은 정성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김진우의 언사는 굉장히 무례했으며 시종일관 고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태도에 배우들 모두가 불편한 느낌을 받았고, 유태일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우 씨는 자중해주세요.”
주의를 받은 김진우는 고개를 슬쩍 숙이며 미꾸라지처럼 물러났다.
그 모습에 이도원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배우들과 융화되려 하지 않는다. 시작 전부터 기 싸움을 하려 드는군.’
촬영 전 배우들 간의 기 싸움은 때로는 암묵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벌어지지만 항상 존재했다.
이도원은 김진우의 눈빛에서 목적을 읽을 수 있었다.
‘이빨을 보여서 자신감을 드러내는 거다.’
김진우는 연기로서 모두를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뿜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최고의 실력자임을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이도원을 빤히 마주보던 김진우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할리우드 진출 축하한다. 이번에 미국에서 갈고 닦은 실력 좀 보여 달라고. <아스라이(Dimly)>에선 영어연기를 해서 그런지, 감이 잘 안 잡혀서 말이야.”
말투에 도발하려는 의도가 물씬 묻어났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부담되는군. 실망시키면 안 될 텐데.”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숙인 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두 배우의 연기를 모두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 어떤 자극이 될지.’
이도원과 김진우 모두 개성이 뚜렷한 배우였다. 더구나 김진우에게 이도원은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정작 이도원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지만. 잠시 관계를 분석하던 유태일 감독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지.”
유태일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리딩이 시작됐다.
다른 배우들과 달리 이도원은 언어장애가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딱히 할 게 없었다.
‘많이들 늘었어.’
이도원은 배우들이 대사를 치는 모습을 보며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다소 미숙하고 톡톡 튀는 재능이 보였다면, 이제는 완숙하고 정제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도 김진우의 연기력이 압권이었다.
‘자신이 있을 만하군.’
이도원이 가만히 있자, 유태일 감독이 손을 들어 진행을 중지시키며 말했다.
“도원이도 준비해 온 걸 꺼내봐.”
움직임이라도 보이라는 의미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대답했다.
“수화를 하죠.”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예 다른 방식의 언어인 수화를 준비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유태일 감독 역시 의외라는 듯 물었다.
“대사가 많은데 수화로 할 수 있겠나?”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수화를 시작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손을 놀렸는데, 대사에 따라 얼굴 표정도 변화했다. 손가락 끝까지 세심한 표현을 하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보며 가장 놀란 사람은 김진우였다.
‘그새 어떻게?’
눈가가 꿈틀거렸다. 이도원은 항상 김진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늘 기분을 망쳤다.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내젓고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수화는 맞는 거냐?”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확합니다.”
이번 영화를 위해 이도원은 수화 책을 다시 보았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간단한 연습만으로도 소리를 잃었던 과거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도원을 한차례 쓸어본 유태일 감독이 대본을 넘기며 말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도원은 ‘수화’라는 카드를 한 장 꺼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현장에 가면 보여줄 게 훨씬 많았다.
‘그 시절의 경험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다니.’
이도원은 온몸으로 땀 흘리며 연기하던 때를 떠올렸다. 몇 안 되는 관객만을 앞에 두고 허름한 무대에서 공연을 올렸지만 결코 외롭거나 힘들지 않았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때의 희열을 기억하려 애쓰며 현재에 집중했다. 그는 대본 속에 깃든 분위기와 치열한 감정들을 가슴 속에 받아들이며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눈으로 각인했다.
*
영화 <서커스>는 2월 1일 크랭크인에 돌입했다.
크랭크인 당일, 이도원은 밴을 타고 강변북로를 건너며 이어폰으로 휴대폰 녹음파일을 듣고 있었다. 바로 대본 리딩 날 리딩 룸 안에서 녹음해 둔 파일이었다.
상대역의 대사를 들으며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아무래도 정확도가 높았다. 함께 연기하게 될 상대 배우의 호흡에 적응하는 효과까지 불러오는 것이다.
그때, 운전을 하던 이진빈이 백미러로 이도원을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형님, 소식 들으셨어요?”
이도원이 오른쪽 이어폰을 빼며 되물었다.
“무슨 소식?”
“<아스라이(Dimly)>요. 상영기간 막바지인데, 개봉을 거절했던 상영관들 쪽에서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도원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무래도 <서커스>에 집중하다 보니 그쪽은 신경 쓰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
“네. 더 기쁜 소식은 형님의 인지도가 꽤 올라갔단 거죠. <아스라이(Dimly)> 자체가 주인공 ‘존 리’에 포커스가 맞춰진 정극이었잖아요? 형 연기를 본 관객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진빈의 너스레에 이도원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기분은 좋다.”
고개를 끄덕인 이진빈이 권했다.
“인터넷 한번 보세요. 미국 반응을 살피던 언론사마다 기사 냈더라고요.”
이도원은 그 말에 순순히 따랐다. 휴대폰으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검색어로 이름을 입력했다.
막 ‘검색’을 누르려는데 검색어 순위에 이름이 보였다.
‘이도원’과 ‘아스라이’가 함께 올라와 있었다.
그중 ‘아스라이’를 선택하자 영화평점과 리뷰, 관련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할리우드 배우 이도원… 이 정도면 ‘성공적’
-이도원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아스라이 ‘200만 돌파’ 목전 -‘아스라이’ 국내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도원은 개중에 자신과 가장 밀접한 제목의 기사를 하나 골라 읽었다.
[이도원의 연기가 돋보였던 정극 ‘아스라이’]
지난 2022년, 한국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한 배우가 홀로 할리우드로 갔다. 드라마틱한 도전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던 것도 잠깐, 팬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불가능한 도전’을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과감한 도전덕분에 우리는 2025년, <아스라이>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할리우드에서도 통하는 ‘배우 이도원’
<아스라이>가 미국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관계자들은 호기심으로 티켓을 끊고 극장 안에 들어섰다. 그러나 나올 땐 이도원이란 배우를 발견하고 찬사를 내뱉기 바빴다. 어딘가로 바삐 전화를 걸고 수첩에 메모를 하는 관계자들도 적지 않았다. 바로 이도원이 란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장래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신호다. 할리우드를 한류로 물들일 수 있을지, 이도원의 행보가 주목된다. 이외에도 이도원은 현재 유태일 감독 연출의 <서커스>의 주연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 양자택일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