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50화 (150/178)

< 양자택일 (5) >

차기열 회장은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젊은 사람이 분에 넘치는 것들을 손에 넣으면 교만해지는 경우가 있지.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것을 거머쥐었을 때 굉장한 자신감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말이야…….”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보았을 땐, 별것도 아닌 일을 해내고 허세를 부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네.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기쁨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세상 무서운 건 알아야지.”

이도원이 차분하게 듣고만 있자 차기열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영화 팬으로서 자네 같은 인재가 사라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내 즐거움이 줄어들 테니까. 그러니 한두 번 맞섰다고 해서 나나 레드 엔터를 적으로 돌리는 판단을 하진 말라고 경고해주고 싶군.”

경고성 발언을 들은 이도원이 속으로 웃었다.

‘아주 잘나셨군.’

그는 속내의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저 따위는 언제든 치울 수 있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그래서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었던 겁니까?”

물은 이도원이 도발했다.

“레드 엔터에선 간혹 소속 배우나 가수, 연습생들에게 스폰서나 성상납 제안을 하고는 하죠. 문제는 회장님의 막냇동생 분인 차지은이 왜 그 명단에 들었냐는 겁니다. 회장님이 레드 엔터의 뒷배를 든든히 봐주고 있는데 말이죠.”

차기열 회장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를 본 이도원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아이 스스로 거절했지. 지금은 자네 밑에 있는 걸로 알고 있네. 나나 레드 엔터, 누구도 그 아이에게 강요한 적 없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지. 선택의 본인의 몫일 뿐.”

차기열 회장의 말을 틀린 구석이 없었다. 다만 추가하자면, 기획사가 소속 연예인에게 그런 은밀한 제안을 할 땐 대부분 이미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건넨다는 것이었다. 차지은은 당시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배우였기에 화를 면했지만 레드 엔터는 지금도 그러한 악덕 비즈니스를 하고 있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이도원이 대답했다.

“정말 가지가지들 하는군요. 레드 엔터는 악덕 기업입니다. 연예계에서 사라져야 할 부정을 자행하는 곳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깨지고 부서져도 레드 엔터와 마음껏 싸울 마음이 듭니다. 치고받을 때마다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회장님은 대상이 아니었습니다만, 만약 레드 엔터 편에 서신다면 전 더 이상 존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마음껏 한 번 해보게. 영웅 흉내를 내봐야 자네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깨닫게 될 테니.”

차기열 회장의 답변을 들은 이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돌아가는 길, 그는 이상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도원이냐? 어떻게 됐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이도원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예. 아무래도 차기열 회장과 레드 엔터를 적으로 돌린 것 같습니다.”

-아니, 어쨌기에 차 회장에게 투자 받는다고 가서는 적이 돼서 와?

“애초에 투자할 생각 같은 건 없었습니다. 저를 약 올릴 심산으로 부른 거였어요. 왜 투자를 거절하나 봤더니, 이미 레드 엔터 쪽으로 지분을 돌리고 있더군요.”

-차 회장이 배신을 했다는 거냐?

“언제는 뭐, 한편이었나요.”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얘기하다 열받아서 들이받았습니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레드 엔터는 네 생각보다 이 바닥에서 힘이 센 곳이야. 지난번 네가 고소했을 때, 순식간에 기사 내리고 조용히 만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이상백의 설명을 들은 이도원은 난처하게 물었다.

“회사 대 회사로 태클이 들어올 텐데, 괜찮을까요?”

-안 괜찮겠지. 넌 괜찮겠냐?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겠죠.”

*

마침내 12월 31일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에서 촬영한 <아스라이(Dimly)>의 상영관 진입이 시작됐다. 확보된 스크린 수는 천여 개에 머물렀다. 이제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 서울, 청담동 소재의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선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맹랑한 놈이 회장님께 찾아갔단 말입니까?”

웃음을 그친 이로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노트북 화면 안의 차기열 회장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이판사판으로 독을 품은 것 같더라고.

“이상하군요. 이도원과 우리 사이에 그만한 원한은 없을 텐데?”

-글쎄, 모르겠습니다. 레드 엔터에서 다른 동네에 줄을 대고 있는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던데.

“무슨 상관이람.”

중얼거리며 피식 웃은 이로빈이 물었다.

“그나저나 투자 건은 확실히 거절하셨지요?”

-물론입니다. 아마 이번 영화는 흥행에 실패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이로빈은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잠자코 있는 김진우에게 시선을 주며 혼잣말을 했다.

“이놈을 어떻게 한다……. 역시 다시 한국에 발을 못 붙이게 하는 편이 낫겠지?”

그에 김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곧 <서커스> 오디션이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 제가 이도원 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이로빈이 노트북에 대고 물었다.

“회장님은 우리 김 배우의 의견을 어떻게 보십니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도원은 눈엣가시에요. 빨리 제거할수록 좋습니다.

차기열 회장의 대답을 들은 이로빈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김 배우와 얘기 좀 하고 다시 전화드리죠.”

-그렇게 해주십시오.

전화가 끊기자 김진우가 입을 열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이대로 이도원이 사라지면 놈은 전설로 남을 겁니다. 전 항상 승부를 못 낸 상태로 남겠죠.”

이로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둘 중 누가 연기를 잘하느냐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 우리가 하려는 건 경연대회가 아니야. 너희 둘 간의 우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뜻이다. 네 쓸데없는 경쟁심 때문에 이도원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김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서커스>에 이도원이 함께 참여하면 티켓 파워는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됩니다. 그럼 동시에 개봉하는 쟁쟁한 경쟁 작들을 손쉽게 누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서커스>에서 제가 더 좋은 연기를 보인다면 일본이나 중국에서 활동하느라 떨어졌던 인지도도 쇄신할 수 있을 겁니다.”

이로빈은 팔짱을 끼며 그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어 물었다.

“이도원이 이번 영화에 참여하면 마케팅 효과가 증폭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네가 과연 이도원의 배역에 잡아먹히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냐는 거야. <악마의 재능> 때를 잊지는 않았겠지?”

김진우의 눈가가 꿈틀댔다. <악마의 재능>은 그에게 치욕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연쇄살인범 역할이었던 이도원에 비해 형사 역할이었던 김진우의 캐릭터가 너무 약했다는 비평을 받았던 것이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대표님. 지금 레드 엔터에 매년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배우가 누구입니까?”

김진우가 자문자답하며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바로 접니다. 제가 배우로서 부탁을 드리는 건데, 이 정도는 제 뜻에 따라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언성이 높아지자 이로빈의 표정이 굳었다.

“기껏 돈 들여서 키워줬더니 뭐라고? 하-.”

이로빈이 김빠지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넌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미국으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인 놈을 한국에 앉혀놨더니, 뭐? 네 뜻에 따라? 미국으로 내보내라는 김 의원님을 설득한 사람이 나란 사실을 잊었나?”

김진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이로빈이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바닥을 쳐봐야 내가 누군지 알겠나? 너 하나 밟아놔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또 키우면 그만이야. 네가 명품이 될지, 쓰레기가 될지는 나한테 달렸다고! 알겠어?”

실내에 침묵이 돌았다. 이윽고 김진우의 반항적인 눈빛이 잦아들자 성질을 죽인 이로빈이 물었다.

“왜 자꾸 이렇게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려고 하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번 건은 네 말대로 해주마. 단, 확실히 처리하지 못한다면 미국으로 강제 추방될 거다. 네 배우 생명이 달린 일이니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김진우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로빈이 냉랭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나가봐.”

김진우가 방을 나가자, 이로빈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말했다.

“키우던 개가 자꾸 말을 안 듣습니다. 유태일 감독의 <서커스> 오디션에서 떨어트리고 조연으로 넣죠.”

-유태일 감독이 하겠다고 하면 나도 별수 없습니다. 워낙 외압에 강하고 고집도 센 감독이라서 말입니다.

“영화의 성패를 떠나 김진우는 슬슬 정리할 생각입니다. 들어간 투자금은 모두 회수해야 하니 플랜을 짜주십시오.”

-뭐로 보낼 겁니까? 도박? 마약? 여자? 스폰서? 강도는요?

“뭐든 관계없습니다. 강도는 재기불능으로요.”

-버리긴 아깝지 않습니까? 혼을 내주는 정도가 어떨지…….

“선생님.”

이로빈이 단호하게 고집했다.

“아깝다고 망설였다간 귀찮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기미가 보이고 있어요. 그전에, 그놈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아무도 믿지 않게 만들어놔야 뒤탈이 없습니다.”

잠시 조용하던 의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전화를 끊은 이로빈은 노트북으로 이도원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이름 석 자만 쳐도 기사들이 줄줄이 떴다.

[유태일 감독 영화 <서커스>로 복귀… 화제작 ‘서커스’는 어떤 영화?]

[왕의 귀환, 진정한 한류스타 ‘이도원’ 복귀!]

[전국이 ‘도원 앓이’로 들썩… 이도원 몸값은?]

이로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김진우를 처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도원을 침몰시키는 건 이로빈에게도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도원은 빠른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난 부분이 없는 무결점의 생활을 해왔다. 뭐라도 있어야 잡고 끌어내릴 텐데, 잡을 건수가 없는 것이다.

“거슬려.”

이로빈이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

2025년 1월 1일, 이도원은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후 영화 <아스라이(Dimly)>의 무대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순수 제작비는 3000만 달러(약 363억 원)였으며 마케팅 홍보비까지 합하면 6000만 달러(약 726억 원) 가량 들었다.

한편 인지도가 높지 않은 동양인 원탑 주연이라 천 개 스크린에서만 개봉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영화 수익 예상치 사이트’들은 대부분 10위권 밖을 점쳤다.

그런데…….

“감격적이네요!”

앤 로버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과 달리 개봉관 당 수익이 3위를 차지한 것이다. 또한 개봉 첫 주 만에 1000만 달러(약 121억 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대로 성적을 유지한다면 손익분기점은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될 터였다.

“개봉관이 부족한 게 아쉬워요.”

줄리아 패닝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볼을 부풀리는 그녀를 보며 이도언은 피식 웃었다.

“영화를 만드는 데까지가 우리 몫이야.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지.”

클레이 포트만 역시 동의했다.

“확실히 흥행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죠.”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스크린 확보가 원활하지 않았던 건 제가 동양인이기 때문입니다.”

“도원의 잘못이 아니에요.”

클레이 포트만이 말했고 앤 로버츠도 동의했다.

“맞아요. 잘못된 편견이 있을 뿐이죠.”

그에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번 영화가 잘 나온 덕에, 다음 작품부터는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이도원의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주차가 넘어갈수록 영화 흥행 성적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영화에 관한 입소문은 좋게 퍼졌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상영관 수가 적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반면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도원과 줄리아 패닝, 그리고 신인감독 앤 로버츠였다. 앤 로버츠는 여성 신인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으며 유명 제작팀에서 조연출 제안이 들어왔다. 또한 이도원과 줄리아 패닝은 올해 주목받는 신인배우로서 잡지에 얼굴에 실리기도 했다. 해외 남자배우 부문, 아역배우 부문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이다.

오늘도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하고 호텔로 돌아온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전화하셨죠?”

수화기 너머에서 유태일 감독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랬지! 영화 개봉 축하한다.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곧 한국으로 갑니다.”

-영화가? 아니면 네가?

“둘 다요.”

이도원은 영화 <아스라이(Dimly)>와 함께 한국으로 상륙하게 됐다. 영화가 한국으로 넘어가면서 앤 로버츠 감독과 클레이 포트만, 줄리아 패닝의 내한 무대인사에 주연배우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유태일 감독은 놀리듯이 말했다.

-네가 가이드 역할을 해야겠군. 모국이니까.

“그래야죠. 안 그래도 쉴 때 관광할 곳 계획하느라 애먹고 있습니다.”

풋 웃은 유태일 감독이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와서 물었다.

-일정은 어때?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닙니다. 감독님이 보내신 메일 확인했어요.”

이도원이 대답했다.

이도원은 일행과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기로 했다. 유태일 감독의 <서커스> 형사 역 오디션 날짜가 1월 10일로 잡혔기 때문이다. 이도원은 이번 오디션에 심사자로 참여하게끔 얘기가 된 상태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바쁜 배우랑 작업하려니 신경 쓸 게 많군. 그럼 그때 자세한 이야기 나누자고.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에 김진우의 연기를 볼 기회가 온 것이다.

< 양자택일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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