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택일 (4) >
역시 식구들은 차지은을 거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도원은 졸지에 차지은, 식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됐다. 차지은은 여전히 싹싹했고 식구들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들은 밥을 먹고 케이크와 촛불을 불었다. 샴페인도 땄지만 이도원은 입에 대지 않고 파티를 즐긴 후 차지은을 집까지 바라다 주었다. 빌라 앞에서 내린 차지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오빠.”
“즐거웠어.”
이도원이 대답하자 잠깐 어물쩍대던 차지은도 밝게 외쳤다.
“저도 즐거웠어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들어가.”
그가 차를 돌려 출발하자 차지은은 머리를 흔들었다.
“후. 뭘 기대했던 거냐.”
이도원이 차에서 내려 대뜸 고백하길 바랐던 차지은은 터덜터덜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이도원은 멀찍이 차를 세운 뒤 그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지켜보았다. 그는 전에 없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결정이 최선일까?’
그때 앞 차량에서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갑자기 불이 들어오자 눈이 부신 이도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늘게 눈을 뜬 순간, 놀랍게도 맞은편 차안 운전석에 김진우가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여기 있지?’
김진우는 불쾌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자 이도원이 창문을 열었다. 이내 창문 앞에 우뚝 멈춘 김진우가 물었다.
“어떤 관계지?”
이도원은 그 말을 듣고서야 상황파악이 끝났다.
‘그런 거였나? 내가 아니라, 차지은을 보러 왔어?’
생각이 미치자 궁금증이 생겼다.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일 리는 없었고, 그렇다고 김진우가 스토킹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여 이도원이 대답 대신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일순간 김진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러나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젠장.’
김진우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는 이도원이 한국을 떠난 이 년 간, 차지은과 드라마를 통해 만났다. 비록 가족드라마였지만 많은 분량을 함께 촬영해야 했다. 차지은은 지난 번 이도원 사건으로 김진우에 대한 감정이 상한 상태였지만, 김진우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날 때부터 어머니가 안 계신 출생환경이 비슷한 것부터 관심을 끌었다. 결국 김진우는 촬영기간 내내 점점 차지은에게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저놈과 그런 사이였던 건가?’
김진우는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무슨 일이든 사사건건 방해가 되는 이도원을 보며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그럼에도 더 따져 묻지 않은 건 자신만 우스워질 게 빤했기 때문이다. 참담한 기분으로 차를 빼는 김진우를 보며 이도원은 경각심이 들었다.
‘자꾸 교차점이 생기는군.’
그런 생각을 하는 틈에 김진우의 스포츠카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도원 역시 슬슬 움직였다. 오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매니저 이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기열 회장 미팅 건으로 전화를 달라는 문자를 이제 본 것이다.
-네, 형!
전화를 받은 이진빈이 미팅 시간을 보고했다.
-내일 오후 여섯 시,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스카이라운지입니다.
“알겠다. 늦었는데 얼른 자고.”
-옙, 형님.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운전을 했다.
식구들과 차지은이 함께한 자리는 이도원에게 영 불편했다. 양측 눈치를 모두 보아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자리를 만든 건 그가 미국에 가있는 시간 동안 차지은이 종종 집에 안부전화를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
다음 날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호텔, 스카이라운지.
삼성동 일대와 한강을 포함한 서울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고급레스토랑이었다. 호텔 전반적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서 분위기가 썩 근사했다. 또한 라이브 연주를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메리트였다. 이곳에서, 이도원은 차기 열 회장과 마주 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능숙하게 스테이크 코스를 주문한 차기열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결혼식에 와줘서 고맙네.”
“축하드립니다.”
간결하게 대답한 이도원이 덧붙였다.
“오늘 회장님을 뵙고자 한 건…….”
그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기열 회장이 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다.
“미리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네. 다만, 난 오늘 비즈니스를 하러 나온 게 아니야. 결혼을 축하해 준 데 대한 답례를 하고 싶었을 뿐.”
아예 투자 건에 대한 싹을 자르고 들어가려는 속셈이었다. 예상 외로 더 큰 반발이 나오자 도리어 당혹스러운 건 이도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단순히 백 프로덕션 인수 건 때 물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건 지난 일에 불과했고, 차기열 회장은 실리를 쫓는 기업인이었다. 그런데 용건을 들어보지도 않고 ‘결혼 축하 고맙다’며 말을 자르는 건 명백한 조롱밖에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자문한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제가 모르는 문제가 있나보군요.”
그 말에 차기열 회장이 모르쇠로 일관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겠나?”
이도원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냅킨을 만지작거렸다. 초조한 모습을 보임으로서 차기열 회장이 통쾌함을 느끼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도원은 배우였고 감정을 다루는데 능숙했다. 예상대로 미소를 띤 차기열 회장이 말을 이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어차피 자네 말을 듣는다고 해도, 이번 비즈니스는 결렬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서로 시간 낭비를 하는 셈이 아닌가? 아니, 얼굴을 붉힐 수도 있겠지.”
이도원의 입장에선 차기열 회장이 쓸데없이 오라 가라 한 상황이었다. 이로서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모욕을 주려 불렀다면, 확실한 놀림감이 되어주지.’
이도원은 불쾌한 티를 내는 대신 모른 척 물었다.
“얼굴을 붉힐 리가 없지요. 항상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지난 번 인수…….”
차기열 회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잘랐다.
“아아. 그거 신경 쓰지 말라고. 설마 내가 그 건 때문에 이런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물론 아닙니다.”
이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요.”
“불편할 것 있나.”
차기열 회장은 입 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당당히 할리우드로 진출한 배우잖아? 자신감을 가져도 되네. 잔뜩 움츠러들었군.”
이도원은 상대의 동공 속에 숨은 멸시의 감정을 읽었다. 하지만 이도원은 자존심을 세우는 대신 이번 투자 건이 무위로 돌아간 원인을 파헤치기로 했다. 이미 차기열 회장에게 투자를 받는 일은 깨끗이 단념한 상태였다.
그때 코스요리가 나왔다.
웨이터가 사라지자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회장님께 찾아와서 투자를 부탁하려 하겠습니까? 기사만 예쁘게 나갔을 뿐 말만 할리우드 배우입니다. 정작 스크린 확보도 안돼서 휘청거리고 있는 걸요.”
하소연 비슷한 말투를 접한 차기열은 짐짓 혀를 차며 대답했다.
“허.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도전이라기에 기대가 컸는데 말이야. 하지만 너무 의기소침 하진 말게. 뭐가 됐든 한 번에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니까.”
이도원이 쪼르륵 와인을 따르며 진심이 우러나는 목소리로 수긍했다.
“지금껏 연기만 하다 보니 사업수완이 부족했던 탓이죠. 회장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이도원은 완벽한 저자세를 연기하고 있었다.
이미 숫하게 이런 대접을 받아왔던 차기열 회장은 거대한 빙산이 녹듯 점차 긴장을 풀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와인에 섞인 알코올도 한 몫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유능한 인재라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아직 자네의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으니만큼 큰 책임을 맡다보면 어려운 점이 많을 거야.”
차기열 회장이 이도원을 상대로 방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자본가들은 배우들을 광대로 알기 일쑤였다. 그건 차기열 회장도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차기열 회장은 이도원이 백 프로덕션 인수를 막은 건이나 루머에 대응한 것에 대하여 배후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이도원은 그 점을 역이용 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투자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으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칭얼대는 어조가 차기열 회장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적당히 취기까지 오른 그는 이전보다 성큼 풀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네,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이 대표가 상당히 벼르고 있더군.”
“이로빈 대표요.”
이도원은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물었다.
“하지만 이 대표의 말 한 마디에 회장님이 마음을 돌리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차기열 회장은 상체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자네도 잘 알아두라고.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배우들이며 가수들이 지금 중국과 일본에서 대거 활동하고 있어. 엄청난 매출이 뜨고 있단 말이야. 내게는 당연히 불확실한 미국 시장 보다 아시아 쪽이 탐날 수밖에 없다, 이 말이네. 이 참에 자네도 레드 엔터테인먼트로 영업장을 옮기는 게 어떻겠나?”
이도원은 그제야 상황파악이 좀 됐다. 차기열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로빈이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중국, 일본 진출사업에 대한 투자제안을 한 것이 분명했다. 수익이 확실한 사업이기에 투자자들이 몰렸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아시아와 동남아 시장 개척에 함께하는 걸 조건으로 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대한 투자자금을 돌리라고 요구했겠지. 그렇게 되면 레드 엔터테인먼트로서는 투자자금 확보 외에도 백 프로덕션의 자금줄을 막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로빈 대표는 내가 미국으로 뜬 뒤에도 계속 견제구를 넣고 있었던 거야.’
역시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기열 회장에게 물었다.
“그럼 백 프로덕션 지분도 천천히 레드 엔터테인먼트로 돌리고 계신 겁니까?”
그 말을 들은 차기열 회장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도원이 단번에 맥을 짚은 것이다. 다시 보니 이도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영리하군.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네.”
그리 말한 차기열 회장이 덧붙였다.
“레드 엔터테인먼트는 이미 초강수를 준비한 상태야. 배우와 가수 시장을 모두 틀어쥐고 있지. 연기자들 몇 명 데리고 영화 투자사업이나 찔끔거리는 백 프로덕션과는 규모 자체가 다르다는 뜻이네. 레드 엔터는 머지않아 자본을 이용한 대대적인 압박을 가할 테지.”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이도원은 태연했다.
“분명 위협이 되긴 할 겁니다. 백 프로덕션의 대주주인 차기열 회장님조차 지분을 매도하게끔 만들었으니까요. 또 지난 이 년 간 백 프로덕션의 매출은 레드 엔터에 비해 턱 없이 적은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이건 아셔야 할 겁니다.”
이도원이 차기열 회장을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 영화, 방송, 드라마 개런티를 일 년 간 정산하면 수백억에 이릅니다. 국내 기준으로,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김진우의 개런티 정확히 두 배죠.”
그는 말을 이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선택과 판단을 잘 하셔야 할 겁니다.”
< 양자택일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