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48화 (148/178)

< 양자택일 (3) >

누나 이다원의 예상과는 달리 차지은도 편안한 복장이었다. 마치 커플로 맞춘 듯 넉넉한 흰색 후드에 밝은 색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진회색의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더불어 모자와 선글라스는 여배우의 필수품이었다.

이도원은 청담동 빌라 앞에서 차지은을 태우고 헤이리 마을로 갔다. 강변북로와 자유로, 필승로를 거쳐 헤이리 마을로 들어서는 동안 이도원은 미국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목적지에는 의외로 차가 많았다. 대부분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었다.

“내려서 좀 걷고 싶어요.”

차지은이 대뜸 말했다. 도착한 후 헤이리 마을을 빙빙 돌며 드라이브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서 산책을 하는 건 어찌 보면 위험하고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이도원은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날 같은 기획사의 남녀 배우 단둘이 드라이브를 하고, 산책을 했다. 사진이라도 찍히는 날에는 완전히 꼼짝마라겠어.’

그럼에도 좀 더 조심스럽게 굴지 않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차지은이 당당한 마당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도원은 차를 대고 내렸다.

그러자 먼저 내린 차지은이 물어왔다.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제 부탁을 다 들어줘요? 제가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잖아요.”

이도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와는 달리 난 아직 내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 너에 대해 그런 쪽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내가 대표가 되고, 네가 소속 여배우가 된 순간 우리의 공적인 유대는 더 탄탄해진 셈이지. 반대로 사적인 관계를 맺기는 조심스러워졌어. 하지만 나한 테 네가 소중한 사람이란 건 변함이 없다. 그런데 왜 남들 눈치를 보느라 소중한 사람이 원하는 걸 막아야 돼?”

듣기 좋은 소리, 옳은 소리였지만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말이기도 했다. 많은 공인들이 남들 눈치를 보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다. 대외적인 평판이 공인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공인의 생리와 대조되는 의견을 들은 차지은은 한 마디로 정의했다.

“이상적이시네요.”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무리하는 건 나보단 너 아니야? 난 곤란하면 미국으로 도망가 버리면 되지만 넌 아니잖아.”

두 사람은 회사의 입지 자체도 달랐다. 뿐만 아니라 배우 간 교제는 남자보다 여자 쪽이 큰 타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도원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지만 차지은은 태연했다.

“전 스릴 있고 좋은데요? 오빠랑 루머가 터져도 뭐, 제 마음이 그런 거니까요.”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오케이. 그럼 됐네.”

완연한 겨울이었기에 두 사람은 따뜻한 쌀국수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베트남 음식점 ‘반미 싸이코’에 들어가자 깔끔한 인테리어와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도원은 문득 입시 뮤지컬 곡으로 선택했던 곡 <미스 사이공>이 떠올랐다. 꼭 그뿐 아니라 베트남전에 대한 연극, 뮤지컬, 소설은 한도 끝도 없었다. 역사적 격동기는 항상 예술의 소재가 된다.

“저 향신료 들어간 음식 못 먹는데.”

뜬금없는 차지은의 선언에 이도원은 난처하게 대답했다.

“미리 말하지 그랬어?”

“아녜요.”

고개를 흔든 차지은은 쌀국수 대신 샌드위치와 짜죠를 시켜 먹었다. 이도원은 그녀가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걸 알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연기에 역사에 대해 이야길 나누면서부터 불편한 마음이 해소되었다.

그때 메뉴를 내오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장부부 중 남편이 말했다.

“팬입니다.”

그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전 차지은 씨 팬이고, 아내는 이도원 씨 팬이에요.”

이도원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차지은 역시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인을 해주었다.

한편 벽에 걸려있는 유명감독, 작가들의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예술마을’이란 타이틀답게 다양한 예술인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작업을 하는 듯했다.

야외가 오픈된 인테리어였기 때문에 문 밖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밖을 바라보던 차지은이 불쑥 말했다.

“이런 곳에서 지내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이도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도 좋고.”

“그러니까요.”

차지은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오빠는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에요?”

이도원은 가볍게 대답했다.

“어리고 예쁘고 착한 여자.”

차지은이 풉 웃었다.

“모든 남자들의 이상형이네요.”

“농담이고…….”

이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을 이었다.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아도 잘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함께 있으면 기분 좋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

차지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괬다.

그녀를 보며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끝인데? 가장 찾기 힘들다고 생각해. 그런 확신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마음을 표현할 생각이고.”

“멋지네요.”

차지은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상대를 오래 보고 판단하는군요? 나도 탈락은 아닌 것 같은데, 제 생각이 틀린 거예요?”

그 질문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탈락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넌 왜 날 좋아하는데?”

이전까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던 이도원을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궁금증을 이끌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을 떠올리자 눈물이 핑 돈 차지은이 말했다.

“좋아하는 데 이유 있나요.”

얼버무렸지만 이도원은 녹록지 않았다.

“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 내 혈육이라는 이유겠지. 하물며 남녀 관계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좀 이상하잖아?”

차지은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오빤 참 똑똑한 것 같은데, 의외로 허당이에요. 얘기해보면 연애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같다니까요? 어려서부터 바빠서 연애 못 한 나도 아는 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그냥 좋다고 말하는 건 진짜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걸 일일이 생각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하나 하나 다 말해요? 역시 오빤 좀 계산적인 듯.”

이도원은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봐도 난 좀 계산적인 것 같다.”

“오빠,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죠?”

차지은이 불쑥 묻고는 덧붙여 설명했다.

“대개 그렇거든요. 계산적인 사람들의 특징이랄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도원은 미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람인 이상 인간관계에는 감정이 반영될 수밖에 없지. 근데 난 그런 요인들로 내 삶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아. 그래서 더 방어적인 걸 수도 있고.”

고개를 끄덕인 차지은이 말했다.

“그래도 많이 바뀌었네요. 이런 이야길 다 하고. 옛날에는 정말 로봇 보는 것 같았거든요. 막 그런 거 있잖아요. 감정이란 게 없는 냉혈한?”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이도원이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냉혈한? 아직도 내가 사람으로 보여?”

음산한 목소리에 차지은이 질색했다.

“그런 거 하지 마요. 지금이 밤도 아닌데.”

“그러네.”

이도원은 수저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차지은은 샌드위치를 야금야금 먹으며 얼굴만 한 빵 너머로 이도원을 훔쳐보았다.

이도원도 남자였다.

‘귀여워서 기절하겠네.’

그는 의도적으로 먹는 데 집중했다.

차지은의 작은 얼굴,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하면 곧바로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도원이 시선을 주지 않자 잇새로 치, 삐진 소리를 낸 그녀가 말했다.

“오빠. 너무 기다리게 하진 마요.”

이도원이 고개를 들자 차지은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신경이라도 좀 써주든가요.”

이도원은 수저를 놓고 경청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섭섭한 표정을 드러낸 차지은이 입을 열었다.

“미국에 가있는 동안 나한테 따로 연락한 적 없죠? 한국 와서도 먼저 연락한 적도 없죠. 나도 여자라고요. 여자 마음은 갈대라는데, 해바라기도 시들어요.”

이도원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하긴.’

차지은 정도면 주변에 남자들이 끊이질 않을 것이다. 너도나도 서로 잘해주겠다고 나설 테고 열과 성을 다하는 남자들이 이 열 종대로 연병장 두 바퀴가 넘을 텐데, 이도원만 바라보며 젊은 날의 종지부를 찍진 않을 터였다. 즉, 차지은을 잡으려면 언제까지 결정을 미룰 수만은 없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마침내 대답한 이도원은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차지은도 창밖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러게요. 어떻게 또, 딱 눈이 오냐.”

“하하.”

웃은 이도원이 물었다.

“나갈까? 눈 맞는 것 괜찮아?”

“좋아요.”

두 사람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가 함께 걸었다. 비록 후드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전에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둘 모두 바쁜 스케줄에 치이는 유명배우들이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감대가 생겨났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처럼 느끼는 여유로움에 신이 났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데이트더라도,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데이트인 것이다.

‘가끔 이런 것도… 좋네.’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차에 탔다.

차지은은 영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난 오빠랑 저녁까지 먹는 줄 알았는데.”

그에 이도원이 물었다.

“크리스마스인데, 가족들이랑 안 보내고?”

“그게… 사실 가족들과 보내기가 좀 그래요. 오빠도 알다시피 우리 가족은 저랑 언니, 큰오빠밖에 없잖아요. 큰오빠는 평소 크리스마스 때도 선물 받고 미팅하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신혼여행 가있고, 언니는 남자친구랑 데이트하러 갔어요.”

차수희가 언급되자 이도원은 기분이 묘했다. 타임 슬립 후 남모르게 마음을 품었던 첫 여자였던 것이다.

‘첫사랑이라기에는 민망하지만.’

그런데 이제는 동생인 차지은과 미묘한 관계가 돼있었다. 차지은과 차수희가 외형적으로 닮은 구석이 없으니 감정의 연관성은 없겠지만, 무언가 공교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거둔 이도원이 물었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

어머니와 누나 이다원은 차지은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물어본 건데 차지은은 잔뜩 망설이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가족끼리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제가 불청객으로 끼는 것 아니에요?”

애초에 불편했다면 묻지도 않았을 터였다. 오고 싶긴 한데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망설이는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물어볼게. 아마 대환영이겠지만.”

이도원은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차지은은 서울로 가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말을 붙이긴 하는데, 거의 잠꼬대 수준이었다. 그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만큼 부정확한 발음으로 졸면서 말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오빠’라는 말과, 꿈속 내용이란 것뿐이었다.

그러다 간간이 촬영현장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들려왔다. 꿈속에서도 일하는 차지은을 보며 이도원은 안쓰러웠다.

그는 노래 음향을 줄이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푹 자라.”

< 양자택일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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