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택일 (2) >
202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이도원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송파구에 위치한 본가로 갔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집 생각을 하면 마음속에 온기가 피어올랐다. 이런 기분은 타지 생활이 힘들 때마다 마음을 약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도원은 그 순간마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대신, 보란 듯이 금의환향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후.”
이도원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소리와 함께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이게 누구야!”
누나 이다원이 문을 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 눈을 게슴츠레 뜨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집 나간 동생 아니야?”
이도원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출발할 때 연락을 해두었기에 가족들은 이도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 마침 주방에서 밥 짓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는 미국에선 맡아볼 수 없었던 꿀 같은 향기였다.
‘얼마만이야.’
식탁에는 한식 위주의 근사한 저녁상이 차려져있었다. 그릇을 올려두던 어머니가 이도원을 보며 형언할 수 없이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 맞니?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어머니의 촉촉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도원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식구들 중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이다원이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상머리에 앉았다.
“그래도 두 사람, 꼬박꼬박 연락하고 지냈잖아요.”
그녀는 수저를 들며 입맛을 다셨다.
“이게 무슨 진수성찬이야? 라면 끓여먹던 어제와는 차원이 다르네.”
능청을 떠는 모습에 이도원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미국에서도 매일 한 통 씩 집에 전화를 걸어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반면 소식을 들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이 걱정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그래도 걱정이다. 타지에서 아프진 않을까, 외롭진 않을까. 네가 그런 표현에 좀 무뎌야지.”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고 동료들도 잘 챙겨줘요. 처음에나 적응하기 힘들었지, 지금은 완전히 적응해서 오히려 그쪽이 더 익숙할 정도라니까요?”
그때 이다원이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누구 괴롭히는 놈은 없고? TV 보니까, 미국에서 살다 온 연예인들도 인종차별로 고생했다던데.”
이도원은 잠깐 숀 클랩튼이 떠올랐다. 비록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쳤고, 나름 미운 정도 들었다. 영화촬영이 모두 끝난 지금은 가끔 생각날 만큼 감정이 완화된 상태였다. 스치듯 생각한 그가 대답했다.
“그것도 다 학창시절 얘기야. 지역마다 다르고, 사회생활하면서 특별한 문제는 없어. 은근한 차별은 있을지 몰라도 요즘 같은 때 대놓고 차별했다가는 큰일 나.”
이다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내 주위에 유학하는 애들만 봐도 잘 지낸다더라. 근데 넌 어쩜 가뭄에 콩 나듯 얼굴을 비추니?”
그녀가 나무라자 이도원은 할 말이 없었다.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한국에 들어왔을 때조차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순회공연을 했던 2년 동안은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었다.
“미안.”
이도원이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어머니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엄마.”
어머니는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다원을 보고 나무랐다.
“얘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이다원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모자는 한통속이라니까?”
이도원은 겉으로 표 내진 않았으나 속으로 이다원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만약 이다원이 없었다면 미국행을 결정하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갔더라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터였다. 이다원이 든든하게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이도원이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치는 게 가능한 것이다.
‘고마워, 누나.’
식구들과 식사를 마친 이도원은 어제도, 그제도 집에 있었던 것처럼 금방 적응했다. 어머니나 누나 역시 더는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평소처럼 행동했다. 따라서 세 식구는 언제나 함께 사는 것처럼 편하게 거실에 둘러앉아 과일을 깎아먹으며 TV를 보았다. 이런 단순한 일상이 이도원에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말하자면 힐링,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때 TV를 보던 이다원이 물었다.
“미국에서 찍는다는 영화, 개봉하긴 하는 거야?”
“아마도. 할리우드 진출 작이라는 것만으로도, 한국에는 무조건 개봉할 거야.”
“이야. 진짜 출세했네. 내 동생이 할리우드 배우라니… 난 믿기지가 않는다고.”
어머니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할리우드가 배우만 실감 안 나는 게 아니고, 난 아직도 우리 아들이 여기저기 나올 때마다 심장이 떨려. 영화관에서 볼 땐 물론이고, 길 가다 거리에 사진이 걸려있거나 TV에서 드라마 재방송을 해줘도…….”
이다원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너 없는 동안 매일 네가 나온 드라마나 영화 틀어놓고 계신다니까? 내가 다른 프로를 못 봐요.”
이도원은 민망하게 웃었다.
“저도 제 영화나 드라마는 한 번 이상 안 보는데… 이거 상당히 쑥스럽네요.”
어머니와 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방금 전 이도원의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정작 이도원은 진심이었다.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고요.’
이미 여러 번 작업을 해 본 그로서도 고질적인 부분이었다. 화면 속의 자신을 마주할 때 느끼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민망했다. 또 한편으로는 무사히 영화가 나왔다는 게 뿌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장면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이도원이 배우로서 짊어진 숙명이었다.
*
크리스마스 날도 이도원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때문에 아침 일찍 화술훈련과 체력단련을 한 뒤 모처럼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때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오빠! 한국 들어왔다면서요? 뭐 해요?
그렇게 물은 차지은이 이모티콘을 연속적으로 날렸다.
쉬지 않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날인데!
이도원은 귀여운 달걀 모양의 이모티콘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막 움직이네.’
이모티콘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말까지 하고 있었다. 평소 문자를 잘 쓰지 않는 그로서는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바닥에서 빨래를 게며 소파 위에 누워있는 이도원의 얼굴을 힐끔거린 이다원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무슨 90년도에서 왔니? 이모티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왜 그래?”
이도원은 98년생이었다. 당연히 이모티콘 자체에는 익숙했다. 다만 이런 역동적인 이모티콘을 보긴 처음이었다. 이는 그가 SNS나 메신저 어플을 좀처럼 쓰지 않는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전화, 문자만 사용하던 습관이 미국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주의를 뺐기지 않으려면 알게 모르게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SNS나 메신저 어플 등은 멀리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다원이 보기에는 상당히 이상했다.
“아무리 아날로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시대에 흐름에 너무 뒤처지는 거 아니야? 하긴… 연예인은 아예 안 하는 게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다.”
이다원은 조소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할수록 다양한 악플까지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설득력 있는 소리 소문도 있었지만 근거 없는 비방들도 많았다. 때로는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고 편파적인 루머나 욕설로 도배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해본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안 하는 게 마음 편해. 또 자기 이야기라고 하면 궁금해서 보게 된다고.”
그는 대답하고는 차지은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 집에 누워있는데.
차지은이 다시 한 번 이모티콘을 날리더니 대답했다.
-나와요. 크리스마스잖아요?
이도원은 차지은과 크리스마스 날 거리를 활보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터였다. 수많은 인파, 파파라치들이 두 사람을 휩쓸 것이다.
-그냥 집에 있을래.
답장한 이도원은 휴대폰을 던져두고 TV를 보았다.
퐁당-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원이 설정해 둔 메신저 신호음이었다. 차지은이 꽤 한참 만에 읽고 회신한 것이다.
-헤이리 마을 어때요? 오빠 마음에 쏙 들 거예요. 한적하고 조용하고.
낚시터를 갔던 일을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하긴, 헤이리 마을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탁 트여있고 한적한데다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좋았다.
잠시 고민하던 이도원이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 집 주소 찍어서 보내.
차지은은 기다렸다는 듯 날름 주소를 보냈다.
칼 답장을 받은 이도원이 차지은에게 일러두었다.
-한 시간 후에 나와.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이다원이 물었다.
“데이트?”
그녀는 이도원이 차지은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걸 본 상태였다. 따라서 이도원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대답했다.
“응. 엄마 차 키 어디 있어?”
자신의 차를 타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건 ‘나 이도원입니다’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다원은 친히 차 키를 가져다주었다.
“엄마가 오늘 저녁에 외식할까 하던데… 내가 얘기할게. 아마 차지은이랑 데이트하러 나갔다고 하면 모든 게 용서될 듯.”
피식 웃은 이도원이 말했다.
“그때까지 와. 걱정 마십쇼.”
이도원은 청바지에 후드 티, 그 위로 패딩을 걸쳤다.
눈살을 찌푸린 이다원이 물었다.
“여자랑 데이트하러 가면서 차림이 그게 뭐니? 차지은은 분명 신경 엄청 쓰고 올 텐데.”
“옷은 누가 입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지. 암, 그렇고말고.”
이도원은 간만에 외모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말했다.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편해 보이는 스타일로 앞머리를 내린 후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말했다.
“다녀옵니다.”
이도원은 스니커즈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키 버튼을 눌러 어머니의 차를 확인한 이도원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지은과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설레는 건가?’
이도원은 낯선 느낌에 피식 웃었다.
안 보고 있을 땐 특별히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단둘이 볼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많이 외로웠나?”
간단히 치부한 이도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차지은이 살고 있는 청담동 빌라로 향했다. 결혼식 때 갔던 차기열 회장의 저택과는 달리 그녀는 본가에서 나와 따로 살고 있는 상황 같았다.
마침 차기열 회장이 떠오른 이도원이 이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
“메리 크리스마스. 휴일인데 미안하다. 저번에 말했던 차기열 회장과의 미팅, 언제야?”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신혼여행 갔다 와서 만나기로 했어요. 정확한 날짜는 그쪽에서 다시 일러주겠지만, 일단 27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배급사 일정에 맞추려면 31일까지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돼. 알고 있지?”
-예. 근데 차기열 회장이 응해줄까요?
이진빈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도원 역시 확신 없이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이번에 차기열 회장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영화는 4000개 중 1000개 스크린에서만 상영된다. 그건 국내로 치면 부산에서만 상영된다거나, 한 극장 브랜드에서만 독점상영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도원은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꼭 되게 만들어야지.”
< 양자택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