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46화 (146/178)

< 양자택일 (1) >

2024년 12월 22일 일요일.

결혼식은 으리으리한 차기열 회장의 저택에서 진행됐다.

이도원과 박아현은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과 함께 동석하지 않고 영화 <투사>의 제작 팀과 신부 윤지민 측의 하객으로 참석했다.

한편 이도원은 매니저 이진빈을 통해 차기열 회장의 측근에게 미팅내용을 전달하고 신혼여행 직후로 약속을 잡았다.

그때 오랜만에 만난 정성우가 곁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할리우드 진출 소식은 잘 들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허튼소리가 아니었어.”

“과찬이십니다.”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군 휴가를 나와 결혼식에 참석한 정성우는 머리카락을 바싹 자른 상태였지만 훤칠한 키에 정장을 갖추어 입은 모습이 여전히 멋들어졌다.

“선배님도 좋아 보이시네요.”

이도원의 말에 정성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현장이 그립다.”

그 순간 잔디밭 중앙에 위치한 사회자가 마이크를 대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귀빈 분들을 위해 맛난 음식과 흥미로운 공연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즐기시며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내 공연이 시작됐다. 인기곡의 반주가 흘러나오며 앨범을 낼 때마다 차트 1위를 독점하고 있는 가수 윤세라가 등장했다. 원래 박아현과 함께 2인조 걸 그룹 <레드오션>으로 활동했던 그녀는 이도원과도 광고촬영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면이었다. 성공적인 솔로 데뷔 이후 지금은 훌륭한 실력파 가수가 된 것이다.

‘다들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나아가고 있군.’

이도원은 노래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발라드 노래 한 곡이 그치자 흥겨운 멜로디가 나오며 객석에 있던 박아현이 무대로 나갔다. 윤세라와 박아현, 두 사람은 걸 그룹 <레드오션> 때 불렀던 인기곡을 부르며 깜짝 이벤트를 보여줬다.

그들을 지켜보던 정성우가 물었다.

“아현이가 백 엔터 소속이지?”

“예.”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우가 눈을 빛냈다.

“도원이, 네가 백 엔터 대표라고 들었다. 나도 좀 어떻게 안 될까?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지금은 붕 뜬 상태인데.”

정성우 정도면 인지도가 높은 편이었다. 분명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을 텐데 굳이 저자세로 부탁을 한다는 건 무언가 이상했다.

‘뭔가 있군.’

스치듯 생각한 이도원은 일단 떠보기로 했다.

“저희 쪽은 다른 곳들에 비해 계약조건 자체가 기성배우들에게 불리합니다.”

정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몇 대 몇 조건인지는 중요치 않아. 나도 그동안 활동했던 이력이 있는데 당장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비전 아니겠어? 백 엔터의 성장세나, 네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것만 봐도 그 정도 불리한 조건은 감안하고 선택할 메리트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들으며 이도원은 현 정세를 읽는 감각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을 떠나 서류로만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현재 연예계에서 백 엔터테인먼트의 인지도가 어떤지, 동료 배우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미처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도원은 대답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선배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담당 부서와 상의한 후 따로 기별을 드릴게요.”

그에 정성우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회사 규모를 떠나서, 난 백 엔터가 다른 곳들과 급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머리를 굴렸다.

‘선배의 말만으로 평판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국내에서 영향력이 생각보다 커진 것 같군.’

이후에도 이도원은 배우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실질적인 국내 연예계 정세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따로 피로연을 즐길 새도 없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유태일 감독을 만나기 위해 충무로의 한 호프집으로 갔다. 할리우드 영화 <아스라이(Dimly)>의 시나리오를 부탁하면서 약속했던 차기작 건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결혼식 끝나자마자 와서 그런지 차림이… 불편하겠군.”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의 정장을 훑으며 말했다.

이도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괜찮습니다. 차기작 시놉은 나왔나요?”

“아직.”

고개를 저은 유태일 감독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들어있지. 이번 영화는 블록버스터 급으로 크게 가려고 계획하고 있다. 전작들의 성공이 밑거름이 됐는지, 이미 거물들이 투자하려는 의사를 밝혀오고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물었다.

“이번 작품은 어떤 이야기예요?”

“음.”

유태일 감독은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큰 틀은 현대판 대도(大盜)에 대한 이야기다.”

“대도요? 홍길동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현실의 부조리를 뒤엎는 범죄자들의 이야기지.”

이도원은 흥미가 동했다.

“재밌겠군요.”

그가 관심을 보이자 유태일 감독은 내용을 설명했다.

“범죄자들은 저마다 세상으로부터 끔찍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야.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신 있는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주인공의 동료들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임에도 대조적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중 유일하게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던 주인공 역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지. 결국 대도들은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할 생각으로 일을 꾸민다.”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반면에 일에 미친 유능한 형사는 가정을 전혀 돌보지 못하고 있지. 백 점짜리 가장인 범죄자들과 달리, 가장으로서 실격이야. 삶의 목표는 오로지 범죄자들을 잡는 것뿐이다. 그가 주인공의 사건을 맡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나리오 내용을 들을 때부터 사로잡힌 이도원이 물었다.

“배우 섭외 명단은 생각해 두셨습니까?”

빙그레 웃은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 때문에 널 보자고 했다. 먼저 널 주연으로 쓸 생각이야. 그리고 조연으로 오준식, 심재빈, 차지은, 박아현을 모조리 집어넣을 생각이다.”

백 엔터테인먼트 군단을 모두 기용하겠다는 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유태일 감독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 대신 백 프로덕션이나 엔터테인먼트에 투자를 받지 않을 생각이다. 그럼 말이 나올 건덕지도 없지. 굳이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을 모두 섭외하겠다는 건 그 배우들 중 대부분과 함께 작업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야. 애초에 시나리오를 구상할 때부터 섭외할 배우들을 내정하고 썼기 때문에 캐릭터 이미지도 꼭 맞는다.”

이도원은 침이 마르는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분명 말이 나올 겁니다. 한 기획사 배우들을 두어 명도 아니고 통째로 넣는다면 말이죠.”

유태일 감독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이건 단지 제안에 불과해. 투자자들이 같은 생각으로 반대한다면 점차 축소할 생각이다. 하지만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 모두가 팬덤을 형성하며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는 지금, 과연 투자들이 반대할까? 내가 보기에는 저절로 마케팅 파워가 생길 것 같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물었다.

“상대역은 누구죠?”

바로 ‘형사’ 역할을 할 배우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도원과 쫓고 쫓기는 역할을 하려면 그 못지않은 배우여야만 했다.

유태일 감독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원래 정성우의 전역 후 데뷔작으로 제안할까 생각했었는데, 김진우에게서 먼저 참여하고 싶다는 부탁이 들어왔다. 정성우나 김진우 모두 워낙 연기 잘하기로 소문나 있기 때문에 더 고민이야. 사실 이미지로만 보면 김진우가 제격인데, <악마의 재능> 때 비슷한 구도의 배역을 맡았던 이력이 있어서 또 쓰기 꺼려진단 말이지. 어쨌든 둘 중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이 ‘형사’ 역을 맡고, 나머지 한 사람은 주인공의 동료로 들어가게 될 것 같다.”

어차피 이도원처럼 젊은 연기자들 중 연기력으로 쟁쟁한 배우를 꼽으라면 정성우나 김진우뿐이었다. 여기까진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김진우가 먼저 섭외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니.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계속 비교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게 영 불쾌했나보군.’

이도원이 유태일 감독에게 물었다.

“김진우는 저와 다시 합을 맞추고 싶은가 보군요.”

“안 그래도 네가 출연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태도를 바꾸더라. 중국, 일본 팬미팅 일정으로 바쁜 몸이, 스케줄을 모조리 취소하는 상황도 불사하겠다는 듯 달려들더라고.”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감독님은 이미 반쯤 정성우 선배님으로 내정하신 것 같은데요?”

“음.”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재능> 아류로 만들었단 얘길 듣고 싶진 않으니까. 사실 오디션을 보는 것도 일종의 성의 표시일 뿐이야. 물론 두 사람의 격차가 크다면 다시 생각해봐야겠지만… 정성우도 잘하는 배우니까 그럴 일은 없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이도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대답을 들은 유태일 감독이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말했다.

“주인공이 언어장애인인데다, 절반은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그러니 움직임이 중요할 수밖에 없지. 오늘부터는 마임 연습을 해야 될 거야.”

이도원은 순간 귀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타임 슬립 전 언어장애인이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마임 연기를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가슴 철렁한 기분이 들었다.

“언어장애인이요?”

이도원의 상태를 모르는 유태일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표현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넌 해보기도 전에 두려워할 위인이 아니잖아.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왜 하얗게 질렸나?”

“혹시…….”

끝을 흐린 이도원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그 영화, 제목이 뭡니까?”

유태일 감독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보기에 이도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서커스>다.”

이도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 그대로였다. <서커스>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작품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때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모든 게 변했다.’

무려 십 년 이상이 앞당겨졌다.

‘그래서 굳이 <대도 홍길동>의 마임 공연을 직접 보고 섭외했던 거였어. 현대판 대도에 언어장애를 가진 역할이었으니까.’

이도원은 잇새로 헛웃음을 뱉었다.

기가 막힌 듯 웃는 그를 보며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도원은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핏기 없는 얼굴 위로 한줄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문제는요.”

유태일 감독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든 말든 이도원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마임 연기는 자신 있습니다.”

“뭐, 워낙 노력파이니 알아서 잘 하겠다만… 지금까지와는 좀 다를 거다.”

못내 걱정이 된 유태일 감독이 덧붙였다.

“널 포함해서 많은 배우들이 마임공연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몸짓만으로 감정을 전달하기란 익숙하지 않을 거야.”

이도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 양자택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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