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10) >
현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도원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붐 오퍼레이터가 마이크위치를 조절하고, 카메라의 전원이 꺼졌다. 그리고 이내 이도원의 독백이 시작됐다.
“신은 7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지만, 나는 7초 만에 나를 죽였습니다.”
중저음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섬기던 신을 저주하게 됐고 매 순간 숨을 쉬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어 이도원의 목소리 톤이 조금 격앙됐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던 내 마음 속에 피타의 꿈이 들어온 순간, 미샬이란 여인과 사랑을 속삭이게 된 순간 착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게 희망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마지막에 와서는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도원은 손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의미를 알아 챈 스태프가 카메라를 켜며 클로즈 업 샷으로 촬영했다.
‘이건?’
앤 로버츠는 화들짝 놀랐다. 이도원이 마치 현장을 모니터로 지켜보듯 정확한 판단과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저가 감독이야, 배우야?’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희열이 엄습했다. 단순히 연기만 잘하는 배우가 아닌, 현장을 넓게 볼 줄 아는 배우였다는 사실이 앤 로버츠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심지어 침대에 있던 줄리아 패닝은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반쯤 벌리고 매료된 표정으로 뒷모습을 바라봤다. 음성만 듣는데도 다른 스태프들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증거였다.
현장에 있는 모두의 표정이 일치하는 순간, 이도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훌쩍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얼굴에는 얼룩이 졌다. 감정을 한껏 끌어올린 그는 입을 막은 채 울먹이며 대사를 마무리했다.
“이제 나는 죽음을 통해 속죄할 것입니다.”
화면은 어두웠다. 따라서 이도원의 눈빛, 눈물로 얼룩진 부분만 희미하게 드러났다. 절제된 움직임 역시 적당히 가리어진 채 전달됐다. 그로인해 조성된 분위기가 절망에 대한 공감을 끌어올리고,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마침내 숨 죽였던 앤 로버츠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컷. 오케이!”
카메라를 잡았던 스태프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붐 오퍼레이터도 윙크를 날리며 덧붙였다.
“좋았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화면 밖으로 나갔다.
줄리아 패닝이 달라붙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가 다 울컥했어요!”
이번 씬은 영화 전반적으로 의미가 큰 한 장면이었다. 때문에 이도원은 집중해서 모니터링을 했다.
그를 보며 앤 로버츠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만족스러워?”
대답은 유태일 감독이 대신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도원의 곁으로 와서 말했다.
“내가졌다. 내레이션은 생략하지.”
동공에 모니터 불빛이 맺혔다. 그곳에는 이도원의 표정이 함께 찍혀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순간에 자연스럽게 입을 가리고 연기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못 말리겠군.”
*
이도원의 할리우드 주연데뷔작이 된 영화 <아스라이(Dimly)>의 제작완료일은 2024년 12월 31일로 잡혔다. 영화 편집과 마케팅이 진행되는 동안 이도원은 실시간으로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배급사 ‘웨스트마운틴’의 부사장 데니스 알렌의 전화였다.
“문제라니요?”
이도원이 묻자 데니스 알렌이 대답했다.
-스크린 확보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는 오로지 자본 싸움이에요. 투자가 더 필요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미 백 프로덕션, 백 엔터테인먼트 양측 자본을 모두 끌어온 마당이었다.
‘자금을 확보할 곳이 없다.’
큰 문제였다.
이도원이 먼저 물었다.
“현재 확보된 스크린이 몇 개입니까?”
-천 개가 채 안 됩니다.
끔찍한 대답이 돌아왔다.
4000개에 이르는 스크린 중 천 개라니. 이대로라면 흥행성적이 저조할 건 안 봐도 빤했다.
“제작사나 다른 투자자들의 투자를 끌어내는 건 힘든 겁니까?”
이도원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질문했지만 데니스 알렌의 대답은 참담했다.
-지금이 최대입니다. 경쟁작이 많지 않은 시즌에 스크린 확보가 안 되는 것도 비정상적이에요. 한국인 주연, 무명감독 연출이라는 점에서 조건을 터무니없이 부르는 것 같습니다.
이도원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사 측에 알아보고 연락드리죠.”
-그렇게 해주세요. 나도 힘을 써보겠습니다.
데니스 알렌이 말했지만, 예의상 취한 태도일 뿐이었다.
이도원은 통화를 끊고 바로 이상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저 도원입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데, 무슨 일이냐?
귀신이 따로 없었다. 그는 이도원을 누구보다 오랜 시간 봐왔기 때문에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내 이도원이 대답했다.
“투자금을 더 끌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수화기 뒤편에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답답해진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확보된 스크린 개수가 천 개 밖에 안 됩니다. 대표님도 잘 아시다시피 이대로 개봉하게 되면 그간의 노력이 소리 없이 묻히고 말 겁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 차분히 생각해 봐라.
이상백은 그를 타일렀다.
-비록 이번 영화 흥행이 저조하더라도 기회는 또 있다. 한국인 배우가 단독주연으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한 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해. 하지만 여기서 욕심을 부리고 무리하게 자금을 끌어오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뭐든 급하면 체하는 법이야.
이상백은 항상 대비책을 세우고 일을 진행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대로, 이도원은 올 인(All in)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도원이 이번 영화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표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가 실패하면 큰 적자를 보게 될 겁니다.”
이상백은 부정하지 않았지만 의견을 굽히지도 않았다.
-아직까지는 손실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비용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정도야. 네가 주장한 일이니만큼 분명 주주총회에서 대표직 해임에 대한 압력이 들어오겠지만… 내가 생각해 둔 대비책이 있다. 만약 백 엔터테인먼트 대표직에서 해임되더라도 그때 우리가 이야길 나눴던 미국 지사 창립을 추진하면서 지사장으로 발령 낼 생각이다. 어차피 사내에 그쪽 사정을 너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도 가장 크지. 기반이 쌓여있으니 주주들도 반대하지 않을 게야.
“이곳이 유배지가 될 수도 있겠군요.”
이도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 건은 무리해서라도 추진하고 싶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넌 지금껏 실패를 모르고 달려왔다.
이상백의 목소리가 다소 엄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성공만 할 수는 없어. 원래 보통 사람들은 성공 보다 실패를 많이 한다. 그리고 실패를 어머니 삼아 재기하고, 성공할 밑거름을 만들지. 완전히 파멸하지 않으려면 항상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회사가 현상유지는 돼야, 다시 발동 걸 원동력을 재충전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이번만큼은 내 말에 따르는 게 좋겠어. 우리는 할 만큼 했다. 다음은 하늘에 맡기자.
이렇게까지 설득하는 마당에 이도원도 더는 고집을 부를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20일 날 한국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래.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이도원은 이상백이 전화를 끊길 기다렸다가 수화기를 내렸다.
“후.”
나직이 한숨을 쉰 그는 메일함을 확인하다가 의외의 소식을 발견했다.
[차기열 & 윤지민의 결혼식 청첩장 전문입니다]
…백 프로덕션 및 엔터테인먼트 가족 분들께서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날개를 펴는 이들에게 꼭 축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도원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차기열이 회장은 백 프로덕션의 대주주 중 하나였다. 그래서 결혼식 청첩장도 보냈을 터였다. 한때 그는 백 프로덕션을 통째로 꿀꺽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일이 무위로 돌아간 이상, 지금은 적 보단 아군인 상황이었다.
‘백 프로덕션이 흥하면 차 회장도 득을 본다.’
턱을 쓸던 이도원은 재빨리 답신을 작성했다. 자판을 두들기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키스톤 월드라.”
혼잣말로 중얼거린 이도원이 인터넷에서 <키스톤 월드>에 대해 검색을 했다. 전부터 들었던 대로 세계굴지의 석탄회사였다. 굳이 말하자면 차기열은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 회장인 것이다. 그 외에도 주식협회 등, 본인 소유의 두어 개 사업체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이도원이 필요한 건 <키스톤 월드>가 미국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더니.’
잠깐 검색해 본 바로는 썩 만족스러운 자료들이 나왔다. 그 결과 차기열 회장을 설득할 수 있다면, 스크린 확보뿐 아니라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받아내려면, 상대가 필요한 것들을 알고 준비하는 게 먼저였다.
“기대해라.”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잠시 멈칫했던 이도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이도원은 귀국하자마자 백 프로덕션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서 이상백과 마주 앉아 인사를 주고받은 그가 입을 열었다.
“차기열 회장이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회사 소속 배우들과 임원들은 모두 초대를 받았다.”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이 씨익 웃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투자건, 이번 결혼식에서 결정이 날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물은 이상백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맞습니다.”
대답한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생각하시는 대로, 차기열 회장에게 투자를 권유해볼 생각입니다.”
이상백은 표정을 굳히며 혼잣말을 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
이윽고 그는 선뜻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차기열 회장이 순순히 응해주겠느냐?”
“영화가 성공만 한다면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할리우드 영화들에 투자할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기회죠.”
“몇 년 전까지 우리 회사를 인수하려 들었다. 네게 뒤통수를 맞고 K.O 당했지.”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진 않을 겁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이도원이 이어 말했다.
“차기열 회장은 우리 투자자입니다. 적 보단 아군에 가깝죠. 우리는 위험한 칼을 품은 채 칼자루를 쥐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언젠간 화를 입고 말 거예요. 그때가 오기 전에 유용하게 써먹어야 합니다. 이번 일이 성사되면 차기열 회장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효과도 같이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이도원은 언제나 대담하고 놀라운 말을 뱉어댔다. 이상백을 찾아올 때마다 항상 ‘상식 이상의 무엇’을 물고 왔다. 하루에 한 권 씩 꾸준히 책을 읽는 습관 때문인지 몰라도, 점점 더 넓은 견문을 갖고 멀리 내다보는 느낌을 주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상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감탄을 대신했다.
“난 널 알겠다가도, 도저히 모르겠다.”
< 촬영 (1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