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9) >
이도원은 이진빈에게 전해 받은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내일부터 촬영이 재개될 예정이었다.
“원래 오늘도 촬영이 있지 않았어?”
“예, 형. 근데 조정이 됐어요.”
“왜?”
이도원이 이유를 묻자 이진빈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는데… 숀 클랩튼이 자신의 촬영 분을 오늘 몰아서 찍으면 안 되겠냐고 요청했더라고요. 근데 이게, 아무래도 형을 배려한 것 같단 말이죠.”
이도원은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촬영 스케줄은 현지 배우들의 일정을 우선으로 짜여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이도원보다 몸값도 높을뿐더러 바쁜 스케줄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합리적인 대우였지만, 문제는 현지 배우들을 챙기는 데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도원은 매일 풀타임 촬영과 철야촬영을 번갈아가며 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숀 클랩튼의 요청은 이도원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는 것과 같았다.
그때 이진빈이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잘 됐어요. 형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그나마 엔지 없이 촬영해서 다행이지, 만약 형이 어설픈 배우였다면 죽어나갔을 거예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쉬지 않았다. 그는 몸에 무해하고 잠이 달아나는 천연 에너지음료를 한 보따리 들고 신용운의 방을 찾아갔다.
그에,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대학로에 올릴 공연을 기획하고 있던 신용운이 이도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스윽 이도원이 들고 있는 보따리로 향했다.
“하, 미국에 와서까지…….”
그 말과 함께 신용운은 만년필과 원고지를 치우고 씨익 웃었다.
“한 번 볼까?”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이번 영화에 있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를 보며 신용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가에게 배울 수준은 한참 뛰어넘었군. 수 년 간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는 성실함과 쉼 없는 공연, 촬영 경험이 완전무결한 배우를 만들었다.’
내심 감탄한 신용운이 말했다.
“잘 봤다. 언제 봐도 훌륭한 연기지만- 좀 여유를 가지는 건 어떻겠냐? 얼마 전 유태일 감독이 널 일컬어 인간미가 없다고 하더구나. 매일 연습만 하는 연습벌레라고.”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전 반대로 생각합니다.”
“음?”
신용운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전 그런 점들이야말로 인간적이라고 봅니다. 한계에 도전하는 건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노력이니까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노력이라.”
신용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이도원은 이제 유능한 제자를 넘어서 몸소 깨달음을 주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이도원이 말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를 보며 앞만 보고 달린다고 했죠. 하지만 제게 연기는 숨을 쉬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수천, 수만 번 반복해도 질리지 않아요. 다른 점이 있다면, 연기는 할 때마다 새롭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신용운 역시 연출자이기 전에 연기자였다. 그는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나는 늘 나를 찾아온 제자들에게 말한다.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 기초적인 훈련을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은 연기를 할 자격이 없다고. 그리고 널 보면 그런 내 생각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 선생님.”
신용운은 한참 순회공연을 다니던 시절, 공연을 마치고도 새벽까지 연습하며 그를 놓아주지 않던 이도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도원 덕분에 혈변(血便)을 봤을 만큼 고생했던 기억이었다.
‘오늘도 잠자긴 틀렸군.’
모처럼의 휴식.
이도원은 그 시간을 활용해 신용운을 괴롭힐 생각이었다.
*
이도원은 전 날 새벽 네 시까지 연습을 하고도, 다음 날 오전 일곱 시에 눈을 떴다. 그는 잠이 부족한 것치고 놀랍도록 맑은 정신과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매일 하는 체력단련과 화술훈련에 돌입했다. 네 시간 동안 이어진 연습을 마무리할 즈음 이진빈에게 전화가 왔다.
-형. 차 대놨습니다.
“알겠다. 씻고 나갈게.”
이도원은 샤워를 했다. 오랜 시간 다져진 근육이 샤워기로부터 쏟아지는 물살을 튕겨냈다.
그는 늘씬하고 팽팽한 몸매 위로 청바지를 입고 흰색 티를 걸친 후 현관에서 단화를 신고 선글라스를 꼈다.
정원 밖 대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창문을 연 이진빈이 그를 발견하고 밝게 외쳤다.
“오늘도 멋지시네요!”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대본.”
이진빈은 헤드레스트 너머로 쪽 대본을 건넸다.
오늘 촬영장은 병원이었으며, ‘미샬’과 ‘피타’ 덕분에 희망적인 삶을 꿈꾸던 ‘존 리’가 ‘피타’의 상태를 듣고 원래의 자살계획을 진행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해당 씬에서는 감정이 크게 들어가는 독백연기가 필요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생각한 이도원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그는 길 위에 서있었다. 그 길 끝에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평원이 보였다. 망설이던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풍요로운 땅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주위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맑은 바다 같은 하늘이 잿빛으로 돌변했고 푸르른 평원은 바싹 마른 회색으로 물들었다. 이도원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던 햇살 대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죽음.’
이도원은 황량한 평원에 서서 죄악과 죽음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지켜보던 이진빈이 목소리를 돋우며 불렀다.
“형, 형!”
그제야 이도원이 눈을 번쩍 떴다.
‘잠들었나?’
현실로 돌아온 이도원이 물었다.
“어디야?”
“다 왔습니다. 그나저나 악몽 꾸신 것 같던데…….”
이도원은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악몽이 아닌, 그가 연기할 ‘존 리’의 마음속을 들여다봤다고 해야 될 터였다.
“괜찮다.”
간결하게 대답한 이도원이 주차장에서 내렸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도원은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앤 로버츠에게로 갔다.
“도원! 잘 왔어요.”
앤 로버츠가 콘티를 넘겼다.
이도원이 콘티를 훑으며 물었다.
“어떻게 찍으실 거예요?”
앤 로버츠는 미리 해두었던 생각을 밝혔다.
“일단 풀 샷으로 ‘피타’와 ‘존 리’의 모습을 딸 거예요. 다음으로 각각 클로즈업을 잡고, 병실을 나와서 문을 닫은 ‘존 리’의 비장한 표정과 눈빛을 촬영할 생각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다시 물었다.
“독백은 내레이션으로 녹음하실 건가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걸 눈치챈 앤 로버츠가 물었다.
이도원은 대답하는 대신 눈으로 유태일 감독을 찾았다.
그 시선을 받은 유태일 감독이 다가와서 회의에 참여했다.
“내가 필요한 것 같은데.”
“네. 독백을 내레이션이 아니고, 전화통화 장면에서 대사화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이도원이 콘티를 짚으며 의견을 내자 앤 로버츠 역시 동조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내레이션보다는 대사처리를 하는 게 인물 심리가 더 역동적으로 표현될 것 같습니다.”
유태일 감독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 영화에서 유독 시나리오 수정 요청이 많이 들어왔고, 이미 여러 장면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견을 수용해왔지만 작가, 배우, 연출이 따로 놀다 보니 마찰이 없을 수는 없었다.
“정히 내레이션을 빼고 싶다면, 두 가지 모두 해보도록 하지. 내레이션 녹음도 들어가고, 대사처리도 해보는 거야. 둘 중에서 좋은 방법을 선택하면 되지 않겠나?”
이번에는 앤 로버츠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아시다시피 배급사 측에서 요구하는 제작기간이 촉박해요. 성공적인 마케팅을 하고, 적시에 상영하기 위해서는 제작기간에 맞추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두 사람은 영화촬영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대립각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난처한 건 이도원이었다.
‘잘못 생각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인데, 영화제작 자체가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팀워크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더구나 이번 영화는 제작인원 구성 또한 특이했다.
‘터져도 진작 터질 일이었어.’
그나마 앤 로버츠가 신인감독이었고, 유태일 감독 역시 현지인의 의견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두 사람 간에 충돌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이렇게 하죠.”
이도원이 두 사람을 중재하고 나섰다. 그는 주연배우 외에도 이번 영화의 투자자이자, 영화 제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이곳에서만큼은 입김이 셀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태일 감독과 앤 로버츠는 잠잠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일단 대사처리를 해보고, 유 감독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레이션 녹음까지 하는 걸로요.”
제안한 이도원은 앤 로버츠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신을 믿으라는 신호였다.
그를 본 유태일 감독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자. 연기력으로 장면을 살리겠다는 네 의도는 잘 알겠다만, 나는 배우의 연기력과 별개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적합한 연출방법을 선택하겠다.”
이도원과 앤 로버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모두 한 유태일 감독이 현장에서 한 걸음 떨어지자, 앤 로버츠가 지시를 내렸다.
“배우들 준비해주세요!”
이도원은 병실로 들어갔다. 이미 안에는 줄리아 패닝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카메라 위치를 확인한 이도원은 영리하게 스스로 촬영 각도를 찾아갔다.
그런 배려 덕분에 스태프들은 굳이 무거운 장비를 들었다 놨다 하지 않아도, 각자 자리 잡은 위치에서 최선의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앤 로버츠가 지시를 내렸다.
“레디, 액션.”
이도원은 비장한 표정으로 호흡기를 끼고 있는 줄리아 패닝을 내려다봤다. 어떤 대사도 없었지만 무거운 침묵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표현이 되었다.
‘표정 좋고.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어.’
모니터 너머로 현장을 지켜보던 앤 로버츠는 손에 땀을 쥐었다. 스태프들 역시 진지한 얼굴로 현장에 매료돼 있었다.
한편 이런 놀라운 중압감을 만들어 낸 이도원은 스스로에게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숨쉬기도 조심스러운 침묵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집중력으로 인해 어떤 때보다 뜨거운 반면, 가슴속은 절망적인 감정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게 허락되지 않은 축복을 탐하지 않겠습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마침내 입을 뗀 이도원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줄리아 패닝의 손을 잡지 못하고 툭 떨어트렸다.
“죄악으로 얼룩진 떼를 묻히지 않겠습니다.”
이도원은 등을 돌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간 그는 등 뒤로 문을 닫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있던 이도원은 큰 결단을 내린 비장한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윽고, 무뚝뚝한 음성이 복도를 울렸다.
“때가 됐습니다. 나와 한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 촬영 (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