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43화 (143/178)

< 촬영 (8) >

줄리아 패닝은 이도원의 조언을 밑거름 삼아 연기를 했다. 맡은 배역의 나이가 실제 나이와 비슷하고, 이미 대본을 완전히 숙지한 상태였기에 감정을 살리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이도원의 눈에는 부족해 보였다.

‘확실히 한계가 있다.’

앤 로버츠는 차례로 이도원과 클레이 포트만의 바스트 샷을 찍었다. 그중 연기력이 가장 도드라지는 건 단연 이도원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감정을 끌어내며 현장의 분위기를 달뜨게 만들었다.

앤 로버츠가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하며 말했다.

“만족스럽네요.”

여러 구도에서 촬영을 반복했지만 엔지는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이도원은 자신이 카메라에 나오지 않을 때도 최선을 다해 호흡을 맞춰주며 상대를 상황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열정이 있기에 좋은 장면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한편 차 안에서 그 현장을 지켜보던 숀 클랩튼은 손발이 저릿했다. 그는 가슴속에서 당장이라도 촬영장에 뛰어들고 싶은 의욕이 치밀었다.

숀 클랩튼은 보는 것만으로도 열망이 치솟게 만드는 이도원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선 감정으로 연기를 주고받을 땐 못 느꼈던 것들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자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질투심에 눈이 멀었던가?’

바라보던 숀 클랩튼이 중얼거렸다.

“완벽히 진 기분이군.”

그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곳.

이도원은 줄리아 패닝과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줄리아 패닝이 끊임없이 이도원에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한 감정들은 어떻게 접근해야 하죠?”

제법 고차원적인 질문을 받은 이도원이 되물었다.

“넌 연기가 뭐라고 생각하니?”

줄리아 패닝은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저한테 연기는 재밌고, 칭찬받을 수 있는 거예요.”

“왜 재밌는데?”

“그냥… 다양한 방법으로 감정표현을 하는 게 즐거워요.”

줄리아 패닝에게 가장 매혹적인 장난감은 감정이었다. 그만큼 쉽게 몰입하고, 감정을 갖고 놀 수 있다는 건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도원은 천재를 보는 게 처음이었다.

‘위험해.’

그는 생각했다.

줄리아 패닝 같은 스타일의 배우는 배역에 들어가긴 쉬워도, 빠져나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작품과 현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을 땐 지나친 감정이입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도원은 충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악마의 재능> 촬영 때 잠깐 과한 몰입을 하면서 미칠 뻔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넌 이제부터 배역에 들어가고 나오는 너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게 운동이든, 친구든, 낚시든 상관없어. 촬영 내내 널 잡아두었던 배역으로부터 자유롭게 돌아가야만 다양한 역할과 연기를 구사할 수 있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거야.”

이도원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줄리아 패닝이 물었다.

“배역에 몰입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오빠는 어떤 방법으로 배역에서 빠져나오는데요?”

그에 이도원이 대답했다.

“나는 책을 읽거나, 낚시를 가기도 해. 그게 ‘나’로 돌아오는 방법이지.”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배우 평생의 숙제였다. 배역으로부터 자의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평소부터 준비를 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하고, 심신 모두를 단련해야만 자의식을 지킬 수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중얼거린 줄리아 패닝이 연장선상에 있는 질문을 했다.

“그럼, 오빠가 생각하는 연기는 뭐예요?”

“먼저 작품과 인물을 이해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지. 그다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돼. 심신을 정교하게 다루면서 관객들과 소통하는 행위가 내가 생각하는 연기야.”

이도원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짜릿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화제가 연기라면 수다쟁이가 된다.

스스로를 돌아본 이도원이 실소하며 덧붙였다.

“넌 분명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능을 갖고 있어. 하지만 네가 가진 재능은 양날의 칼이다. 너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오히려 독이 될 거야. 네 재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 너 자신을 일인칭이 아닌, 삼인칭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돼. 그러려면 다양한 연기기술과 노하우들이 필요하다.”

줄리아 패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겨 물었다.

“그럼 오빠 같은 훌륭한 선생님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이도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난 동료배우일 뿐이야.”

줄리아 패닝이 씨익 웃었다.

“엄마가 그러시던데… 한국에서 에이전시를 갖고 계시다고요?”

이도원은 불쑥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줄리아 패닝이 말했다.

“트레이닝도 해준다고 들었어요. 저도 에이전시를 이용하면 언제든 코칭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줄리아 패닝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제안을 했지만, 사실 뭘 모르고 한 질문에 불과했다. 그녀는 미국과 다른 한국 에이전트의 시스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에이전트들 중에는 2, 3년 단위 계약이 있고 비슷한 구조의 회사들이 존재했지만, 보편적인 에이전트들은 건당으로 계약한다. 배우들이 떠나겠다고 하면 잡지 않으며, 배우들을 구속하는 어떤 조건도 없었다. 아티스트를 회사의 부속품이 아닌 회사 자체로 보기 때문이다.

‘계약시스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

이도원은 못 말리는 학구열을 보이는 줄리아 패닝을 타일렀다.

“생각처럼 쉬운 문제가 아니다. 좋은 선생님을 찾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다만, 난 지도자가 아니야. 동료배우로서 서로 조언을 할 뿐이다.”

줄리아 패닝은 시무룩해졌다. 이도원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는 주옥같은 조언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촬영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다.

“…네.”

대답을 들은 이도원은 미미하게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특출난 재능을 가진 줄리아 패닝을 도울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줄리아 패닝의 도움을 물리친 이도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사각사각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이도원은 이상백에게 화상전화를 걸었다. 매번 전화통화만 했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머지않아 화면에 당황한 표정의 이상백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한참 찾았다. 어떻게 받는지…….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물었다.

“잘 지내시죠?”

-보고서로 보다시피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다.

대답한 이상백이 이어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도원은 고민 끝에 되물었다.

“패션계도, 가요계도 미국으로 진출합니다. 더 큰 시장을 노리는 거죠. 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들도 미국에 지사를 두고 세계적으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상백은 불안한 표정을 나타냈다.

-…이번에는 또 뭘 말하고 싶은 게냐?

시익 웃은 이도원이 본론을 꺼냈다.

“제가 미국에서 극단을 만들고, 아티스트 발굴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 에이전트들은 늘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나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있다는 거죠. 시장은 열려있는데 도전을 못한다는 겁니다.”

-확신 없는 곳에 투자하길 망설이고 있다, 개척자가 되길 꺼려해서 신천지를 외면하고 있다… 뭐, 이런 뜻이냐?

“그겁니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도 지사를 설립해서 먼저 영화계에 꿈을 가진 한인들을 움직이는 겁니다. 기회가 되면 현지의 배우들도 섭외할 수 있겠죠.”

이상백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네가 처음 길을 열었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터를 닦는 일은 차원이 달라. 한국의 많은 기획사들이 바보라서 도전을 하지 않았겠느냐? 너 외에도, 이미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어.

그러나 이도원은 완강하게 대답했다.

“한국인 최초로 할리우드 주연을 맡는 데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유태일 감독님의 시나리오까지 유통했죠. 회사 전체가 미국으로 진출하는 일은 우리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도 나도 시작할 겁니다.”

이도원이 덧붙여 말했다.

“물론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적어도 일 년은 걸리겠죠. 자리를 잡으려면 또 그로부터 오 년, 십 년 후를 바라봐야 할 거고요. 물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검토만 해주십시오.”

이상백이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일단 알겠다.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매출 대비, 이번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있을지부터 먼저 알아보자.”

마침내 반쯤 승낙이 떨어진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답한 이도원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한국과 미국은 일하는 스타일 자체가 달라요. 예를 들면 미국 노조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막강하죠. 법도 까다롭고요. 한국은 매니저가 연예인을 위해 엄마처럼 하나하나 다 해주지만, 이곳은 파트타임 컨설턴트 느낌으로 일합니다. 의견이 안 맞으면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같이 해결하죠. 그런 과정이 자연스럽고, 그런 과정들을 통해 목표치에 가까워갑니다. 우리보다 역사가 오래돼서 그런지 모든 방식이 합리적이에요. 좋은 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건 장단점이 있겠지만, 국내 시장은 다양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요. 대형 기획사들의 독점체제, 트렌드의 획일화로 인해 꽉 막힌 느낌도 강하죠.”

-단 한 명이 시장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한 이상백이 덧붙였다.

-하지만 시도하는 건 자유지. 네 뜻은 잘 알았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 패닝의 허무맹랑한 제안에서 시작된 고민이었지만 가능, 불가능의 구분선을 긋지 않고 생각해보니 충분히 도전해봄직한 일이었다. 만약 회사 측의 승인이 떨어진다면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업(大業)이 될 터였다.

‘흥분되는군.’

이도원의 표정을 읽은 이상백이 말했다.

-너무 기대하진 말고 있어. 난 네 편이라도, 알다시피 대표 독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이죠.”

그 말을 들은 이상백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하여튼 배포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나. 의견을 추진해보고 연락해주마. 한국은 언제 들어올 생각이냐?

“이번 영화 촬영도 막바지입니다. 다음 달 초에 한 번 들어가려고 생각 중이에요.”

-그래. 무리하진 말고.

“네, 알겠습니다. 건강하세요. 또 연락드릴게요.”

화상통화가 끝났다.

이도원은 잠시 앉아서 심호흡을 한 후 인터넷에 들어가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대한 서적들을 모조리 주문했다. 그다음은 개인훈련을 할 시간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혼자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할 일을 만드는 부지런한 천성 덕분이었다.

“스으으으으…….”

숨을 끝까지 몰아낸다는 생각으로 일정하게 날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숨을 아랫배까지 빨아들인다는 생각으로 들숨을 들이켰다. 가슴에 추적된 호흡을 아래로 내리며,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난 소리가 성대를 울렸다.

“나는 젊게 살고 있기 때문에 어디든지 가보고 싶으면 가보고, 구경하고 싶으면 구경하고, 쌈 말리고 싶으면 말리고 돌아다닐 뿐이지요. 다만 살아가면 그만 아니요.”

상황과 교묘하게 어울리는 희곡 <난파>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이도원은 굳이 희곡 책을 펼치지 않아도 머릿속에 수백 가지 독백을 가졌으며, 자다가 읊어도 목소리에 감정 선을 입힐 수 있을 정도였다.

‘난 도전이 두렵지 않다.’

이도원의 눈이 검은 별처럼 빛났다.

< 촬영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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