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42화 (142/178)

< 촬영 (7) >

이도원과 숀 클랩튼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레스토랑으로 갔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가운데 숀 클랩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이도원은 여유로운 태도로 자신의 앞에 냅킨을 올려두고 그 위에 식기를 정리한 후 대답했다.

“너의 실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실망한 상태다. 네가 현장에 나타나면 분위기 자체가 경직돼. 내가 그들의 오해를 일일이 풀어줄 수는 없지만 퇴출되는 일만은 막을 수 있다.”

숀 클랩튼이 입꼬리를 올리며 실소했다.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말을 못 알아듣는군.”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너의 편에 서겠다는 뜻이다. 그럼 자연스레 현장 분위기는 해소될 거야. 그 후에 좋은 연기로 모두를 납득시키는 건 네 몫이다.”

“넌 날 용서한 대인배로 남겠다?”

이도원은 숀 클랩튼의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넌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돼.”

그때 두 사람 앞으로 음식이 나왔다.

웨이트리스에게 팁을 건넨 이도원이 식기를 들며 말을 이었다.

“나가든지, 남든지.”

*

두 배우는 이후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갈등을 해소하지 못했다. 다만 숀 클랩튼은 남는 쪽을 선택했고, 촬영장으로 돌아온 이도원이 그 뜻을 앤 로버츠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녀가 물었다.

“제가 봤을 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데, 괜찮겠어요?”

앤 로버츠는 덧붙여 말했다.

“촬영을 하다 보면 때로는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제 판단에는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고요.”

반면 이도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숀 클랩튼이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인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시나리오 상 적임자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머릿속으로 문장을 정리한 이도원이 그녀를 설득했다.

“숀 클랩튼이 현장 전체 분위기를 저해했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단 둘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도요. 하지만 이미 섭외된 배우가 참여의사를 밝히고 있는 지금은,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앤 로버츠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스태프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결정을 도원 씨에게 맡기기로 합의를 봤어요. 우리는 도원 씨의 결정에 따를 겁니다.”

빙그레 웃은 이도원이 답했다.

“존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앤 로버츠는 잠시 쉬었던 촬영을 이어갔다. 그녀는 스태프들이 장비를 이동하고 세팅하는 동안 배우들과 콘티를 상의했다.

이번 장면은 이도원과 클로이 포트만, 줄리아 패닝이 함께 출연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씬이었다.

논의를 끝낸 앤 로버츠가 배우들에게 당부했다.

“클레이와 줄리아는 자연스럽게 촬영을 즐기면 돼요. 연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도원의 연기가 가장 난해해요. 마음속으로 계획했던 죽음이, 그 결심이 흔들려야 합니다. 절망뿐이고 죽고 싶었던 사람이 희망을 품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씬이에요.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가 돌고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수천, 수만 번의 연습이 만든 결과물을 쏟을 뿐이다. 어차피 준비한 이상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긴장과 부담도 그를 억누르진 못했다.

‘최선을 다한다.’

생각한 이도원이 앤 로버츠에게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자신감이 듬뿍 스며든 목소리를 듣고 활짝 웃은 앤 로버츠는 배우들에게 지시했다.

“그럼 촬영 시작하죠!”

한편 숀 클랩튼은 자신의 자가용 안에서 이도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는 방금 전 이도원과의 식사자리에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이도원을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록 가슴속 비뚠 고집이 혀를 굳게 만들었다 해도, 심경 변화가 없진 않았던 것이다.

‘어디 한 번 해봐라. 네가 동양인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봐주마.’

이번 야외촬영 장소는 아름다운 풍경이 자리한 국립공원이었다. 햇빛이 물결에 반사돼 반짝이는 호숫가, 주위를 둘러싼 풍성한 초목(草木)과 곳곳에 위치한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가 풍경과 보조출연자들의 모습을 먼저 담았다. 그중에는 단란한 세 식구가 돗자리를 깔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저 속에 고래도 살까요?”

허무맹랑한 질문에 부모가 웃음을 터트렸다.

카메라는 이같이 행복해 보이는 장면을 천천히 촬영했다. 이런 분위기를 몇 컷 더 확보한 후 메인 배우들이 들어갔다. 따라서 이도원과 클레이 포트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호숫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줄리아 패닝을 바라보았다.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할 준비가 끝나자 앤 로버츠가 말했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배우들 레디.”

그리고 신호가 떨어졌다.

“액션.”

그에 줄리아 패닝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이 포트만이 고개를 돌리며 대사를 쳤다.

“존. 그때 당신이 살인자라고 했잖아요? 피타의 부모님을 해쳤다고… 그 일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이도원의 동공이 어둡게 죽었다. 밝은 해살이 내리쬐는 양지에서, 오직 이도원이 있는 곳만 그림자가 진 듯했다. 그는 가슴속에 납덩이를 품은 사람처럼 답답한 한숨을 뱉고서 입을 열었다.

“어느 날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난 아내와 아이를 잃었고, 피타는 부모를 잃었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클레이 포트만의 눈빛이 안타까운 감정으로 젖었다.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어 이도원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이도원은 피타를 응시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클레이 포트만이 이도원의 절망적인 심정을 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죠. 무용수로 활약하고 드디어 나도 행복한 날을 보내게 되는구나 싶었던 순간… 그 사고가 일어났어요. 하루아침에 무용을 할 수 없게 된 거죠. 만약 내 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난 좀 더 쉽게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거예요. 존, 저애는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저애의 곁을 떠나는 것이 저애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될 거예요.”

이도원은 클레이 포트만에게 시선을 돌리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물었다.

“날 걱정하는 겁니까?”

“맞아요. 당신이 걱정돼요.”

클레이 포트만은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목적 없이 살아가던 내 삶에 피타를 데리고 나타났어요. 그리고 목적을 만들어줬죠. 당신은 나와 피타에게 희망을 주었고,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줬어요.”

이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줄리아 패닝과 시선을 마주치며 웃어 보였다.

이내 줄리아 패닝이 달려와서 이도원과 클레이 포트만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호수가 얼마나 깊을까요?”

천진난만한 물음에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피타의 열 배 정도 될 거야.”

“그럼 고래도 살까요?”

대본에 없는 질문이었다.

줄리아 패닝이 연기하는 ‘피타’ 역할은 열두 살이다. 호수에 고래가 살지 않을까 착각할 나이는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애드리브를 치는 걸까?

‘설마.’

찰나의 순간 이도원은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느낌을 받았다. 줄리아 패닝은 부모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보조출연한 가족이 나누던 대화를 따라한 것이다. ‘고래가 사느냐’는 질문은 보조출연자들 중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던 내용이었다.

상황파악을 끝낸 이도원은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대답했다.

“피타.”

이도원이 줄리아 패닝을 불렀다.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연기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클레이 포트만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는 아직 상황파악을 못한 채 연기를 했다. 스태프들도 그대로 촬영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애드리브를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엔지 사인을 보내지 않는 걸 봐선 앤 로버츠만 줄리아 패닝의 애드리브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번 애드리브를 통해 놀라운 심리표현을 보여준 줄리아 패닝이 대본으로 돌아와 대사를 이어나갔다.

“미샬 선생님과 존이 사귀었으면 좋겠어요.”

줄리아 패닝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을 데려간 호숫가 진흙 위에 세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클레이 포트만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이도원도 실소했다.

진흙 위에 그려진 단란한 가족 세 사람은 바로 클레이 포트만, 이도원, 줄리아 패닝이었던 것이다.

이도원은 줄리아 패닝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자세를 낮추었다.

“미샬 선생님은 애인이 있어, 피타.”

줄리아 패닝이 입술을 뚱하게 내밀었다.

“선생님은 존이랑 잘 어울린다고요. 전 미샬 선생님과 존을 사랑해요.”

클레이 포트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존이 하는 걸 봐서 한 번 생각해 볼게, 피타. 그렇잖아도 애인이 요즘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있거든.”

세 사람이 웃음을 터트린 순간, 갑자기 숨이 막힌 듯 줄리아 패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줄리아 패닝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끅끅 댔다. 화들짝 놀란 이도원과 클레이 포트만이 자세를 낮추며 줄리아 패닝에게 말했다.

“피타! 천천히 숨 쉬어, 피타…….”

클레이 포트만이 발을 동동 구르자 이도원은 침착하게 말했다.

“911에 신고하세요. 피타. 천천히 호흡해보자.”

줄리아 패닝의 상태는 심각했다. 평소 같으면 이도원을 따라 호흡을 가라앉혔을 텐데, 이번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한참을 괴로워하던 줄리아 패닝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소름끼칠 만큼 사실적인 연기였다.

이도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표정으로, 서둘러 줄리아 패닝을 업고 외쳤다.

“병원으로 갑시다!”

이번 씬은 여기까지였다.

앤 로버츠가 사인을 보냈다.

“컷.”

그녀는 엔지, 오케이를 구분하지 않고 물었다.

“줄리아 괜찮아요?”

줄리아 패닝은 참던 숨을 터트리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너무 사실적인 연기에 잠깐 걱정했던 이도원과 클레이 포트만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잘 했다.”

이도원이 등을 두드리며 숨 쉬는 걸 도왔다.

클레이 포트만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정말 아픈가 걱정했네. 어쩜 그렇게 잘하니?”

칭찬을 들은 줄리아 패닝은 수줍게 웃었다.

이내 이도원이 물었다.

“아까 애드리브. 감정을 좀 더 넣어봐.”

스태프들과 클레이 포트만은 귀가 쫑긋해졌다. 아까 고래 애드리브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줄리아 패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요?”

그에 이도원이 되물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어떻니?”

“부모님을 잃었다면… 슬프겠죠.”

“아니, 부모님을 잃기 전에.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어떻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 봐. 기억에 남는 여행을 갔을 때, 매일 밤 네 볼에 키스해주실 땐 어때?”

“행복해요.”

“그게 연기를 하기 전 가져야 될 마음가짐이야. 그 행복을 선명하게 떠올리고 음미해 보는 게 먼저야. 그다음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떠올려 봐. 그럼 어떨 것 같아?”

“훨씬… 그리울 거예요.”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우면 어떻게 될까? 절망적이라면?”

“다시 행복해지고 싶을 거예요.”

줄리아 패닝은 야무지게 대답했다.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아. 행복을 되찾고 싶겠지. 넌 존 리와 미샬을 통해 부모님을 떠올렸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본거지. 그래서 투정을 부리고 억지를 부리는 거야.”

이도원은 줄리아 패닝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턱을 괴고 진지한 고민에 빠진 표정이 귀여웠다.

이윽고 이도원이 말했다.

“넌 순식간에 대본에 몰입하는 재능이 있지만 감정을 이해하려 하진 않고 있어. 그럼 흉내 내기에 불과하지. 네가 가진 감정들을 활용하면 저절로 세심한 연기가 나올 거야.”

이도원의 충고는 직설적이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줄리아 패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클레이 포트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겨우 열두 살짜리에게 그걸 설명하는 성인배우나, 그 말을 이해하는 괴물 같은 아역배우나… 둘 다 천재야.’

이렇게 보니 나이 차가 큰 남매 같기도 했다.

정작 이도원도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대견해.’

흡족한 미소를 띤 그는 가깝게 다가온 앤 로버츠 감독에게 요청했다.

“아까 피타의 애드리브 장면… 한 번 더 갈 수 있을까요?”

< 촬영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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