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41화 (141/178)

< 촬영 (6) >

이도원은 반복되는 촬영과 개인훈련으로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주로 줄리아 패닝과 연기호흡을 맞추며 여러 번 놀랐다. 열두 살 소녀의 재능이 번번이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인물에 완전히 녹아있어.’

줄리아 패닝이란 백지 위에 ‘피타’라는 캐릭터를 그린 느낌이었다. 대본 속 인물이 현실로 걸어 나온 듯 보였다. 이도원이 줄리아 패닝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면, 줄리아 패닝도 이도원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저도 오빠 같은 분위기를 갖고 싶어요.”

이도원은 존재감 하나만으로 화면을 꽉 채우는 배우였다. 그의 눈빛은 블랙홀처럼 보는 이들의 시선을 빨아들였고, 탄탄하게 정제된 음성이 때때로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때로는 중후하게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 또한 창의적인 발상과 세심한 움직임은 전달력에 힘을 실었다. 그를 보며, 줄리아 패닝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녀는 솜이 물을 빨아들일 듯 이도원의 장점들을 흡수했다.

오늘의 첫 장면은 클로이 포트만이 줄리아 패닝의 재능을 발견하는 장면이었다. 이미 어려서 무용을 배운 적이 있고, 프리프로덕션(pre production, 영화 제작준비 단계) 때부터 별도로 준비를 해왔던 줄리아 패닝은 능숙하게 무용 동작들을 해냈다. 영화 내용상 천재적인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장면을 누구보다 멋지게 소화하고 있었다.

줄리아 패닝의 무용 안무를 모두 담은 카메라가 그녀를 지켜보는 이도원과 클로이 포트만을 찍었다. 이내 이도원이 팔짱을 낀 채 놀란 표정으로 서있는 클로이 포트만에게 말했다.

“직접 보면 당신도 매혹될 거라고 했잖아요.”

지금 막 꿈에서 깬 듯, 놀란 기색을 지우며 표정을 고친 클로이 포트만이 물었다.

“아직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서 어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 재능으로 학교에 입학하면 충분히 저보다 훌륭한 지도자에게 무용을 배울 수 있을 텐데요? 까막눈이 아닌 이상은 두 손 들고 환영할 거예요. 장학생이 될 수도 있겠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줄리아 패닝을 바라보던 이도원의 눈빛이 짙게 물들었다. 그 감정의 정체는 안타까움이었다.

한편 클로이 포트만은 감탄했다.

‘눈빛만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시선 하나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도원의 연기력은 촬영일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문제가 있습니다.”

클로이 포트만이 이도원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줄리아 패닝이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클로이 포트만이 줄리아 패닝에게 달려갔다.

“피타, 괜찮니?”

가슴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라앉힌 줄리아 패닝이 힘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이도원이 줄리아 패닝에게 말했다.

“답답하지? 잠시 복도에서 바람 좀 쐬고 와라.”

고개를 끄덕인 줄리아 패닝이 널찍한 연습실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클로이 포트만이 이도원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추궁하는 눈빛을 받으며 이도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피타는 심부전증을 앓고 있습니다. 문제는 최근 심기능이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는 겁니다. 지금은 심장 근육 대부분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죠.”

충격적인 사실에 놀란 클로이 포트만이 말했다.

“그럼 무용이 문제가 아니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도원은 괴로운 표정을 숨기려 애쓰며 대답했다.

“특별한 치료법 없이 심장이식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이식받을 심장은 있지만, 문제는 피타의 꿈이 무용수라는 겁니다. 피타는 꿈을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당신도 불행한 사고로 은퇴를 했으니 그 심정을 잘 알고 있겠죠. 당신이라면 피타에게 안 된다는 말 대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의 표정을 유심히 뜯어보던 클로이 포트만이 물었다.

“당신은 피타와 무슨 관계죠?”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이도원의 눈빛과 표정은 더 이상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아이의 부모를 해친 살인자입니다.”

그는 덧붙여 설명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피타를 도와주겠습니까?”

앤 로버츠는 모니터 속으로 빠져들었다. 롱 테이크로 진행된 촬영과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다. 배우들은 시나리오를 온전히 현실로 구현해냈고, 이 장소의 모든 스태프들이 연기가 실제상황인 양 몰입해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앤 로버츠의 뒤늦은 사인이 떨어졌다.

“컷. 오케이.”

그때서야 모든 이들이 현실로 돌아왔다. 꿈을 꾸다 막 일어나서 현실감이 돌아오기까지의 혼미한 시간과 흡사한 기분이었다.

“훌륭해요.”

앤 로버츠의 말을 들은 클로이 포트만이 이도원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당신은 멋진 배우예요. 숀이 봤어야 하는데.”

숀 클랩튼은 지난번 실수로 모든 배우와 스태프에게 신망을 잃은 상태였다. 한순간의 판단으로 인해 현장에서 소외된 것이다. 다들 숀 클랩튼을 비난했지만 이도원은 굳이 그 대열에 끼고 싶지 않았다.

‘고집 세고 질투 많고 욱하긴 해도, 연기력만큼은 괜찮은 배우인데.’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마녀사냥과 흡사했다. 숀 클랩튼이 등장하는 장면의 촬영이 시작되면 전반적인 현장 분위기에 악영향을 주게 될 터였다. 그런 판단을 내린 이도원은 앤 로버츠에게 다가가 말했다.

“숀과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감독님. 다른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세요.”

앤 로버츠는 난색을 표했다.

“일부 스태프들은 같이 작업을 못하겠다고, 숀의 퇴출을 바라고 있어요.”

그중에는 이도원과 같은 동양인도, 인종평등을 주장하는 현지 스태프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번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도원이 말했다.

“퇴출은 안 됩니다. 먼저 숀과 풀고, 현 상황을 완만하게 풀 수 있도록 설득해보겠습니다.”

당사자가 그렇게까지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데, 감독인 앤 로버츠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저도 퇴출을 요구한 스태프들을 설득해 볼게요.”

*

숀 클랩튼에 대한 문제를 뒤로하고 촬영이 계속됐다.

이번 장면은 이도원이 자기 손으로 911에 신고를 한 뒤 자살하는 장면이었다. 장기이식을 하려면 사망한 직후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즉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시간과의 싸움에서 진다면 쓸모없어지는 것이다.

비좁은 모텔 안, 이도원은 떨리는 손으로 911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안내원이 전화를 받았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연기였으므로 당연히 수화기 뒤에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집중한 이도원의 귓가에는 똑똑히 전해졌다.

-선생님. 성함을 말씀해주십시오.

“존 리. 존 리 입니다.”

이도원은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덧붙였다.

“제가 죽었습니다.”

이도원이 전화를 끊고 자신이 입은 흰 티 위에 유성매직으로 ‘제 심장을 피타 로즈에게 기증합니다!’라고 쓴 뒤 얼음을 가득 담아둔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추위와 공포로 덜덜 떨며 두려운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여러 감정이 담긴 호흡을 흘렸다.

위로부터 카메라가 이도원의 모습을 똑똑히 담았다.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었지만 강렬한 연기였다.

‘과연 자살이란 판단이 옳았을까?’

앤 로버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그녀가 시나리오를 썼다면 이도원의 배역인 ‘존 리’를 살리고 해피엔딩으로 끝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 작업을 담당한 유태일 감독은 주인공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엔딩을 정했다.

‘말 나올 여지가 많겠어.’

이는 흥행의 저해요소였다. 하지만 그녀가 엔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컷, 오케이.”

결국 앤 로버츠는 사인을 내렸다.

한편 얼음물에 들어가 엔딩 촬영을 마친 이도원은 담요로 몸을 녹였다. 그의 트레이너 안에서 난로에 기름을 채운 매니저 이진빈이 물었다.

“형. 숀 클랩튼이란 그 백인 놈. 꼴좋던데… 정말 용서하실 거예요?”

“용서하는 게 아니야.”

이도원은 추위로 목소리를 떨며 대답했다.

“촬영을 위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이진빈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놈만 없으면 현장 분위기가 더 좋아질 거예요.”

이도원은 대답 없이 창문을 통해 트레이너 밖을 보았다.

숀 클랩튼의 고급 외제차가 촬영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진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 새낀 왜 촬영도 없는 날까지 와서…….”

“진빈아.”

이름을 불러서 말을 자른 이도원이 미소지었다.

“내가 지금 상황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사과를 받으려 하면 상대방은 겉으로는 사과를 해도, 속으로는 분명 욕을 하겠지. 사과란 상대방의 진심을 끌어내야 돼. 그러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

“사과받을 것 없이 퇴출시키면 되잖아요?”

“그럼 숀 클랩튼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되는 셈이지. 잘못한 건 숀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봐야 하지?”

되물은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나는 숀의 진심을 끌어낼 생각이다. 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야.”

몸을 대충 다 녹인 이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트레일러 밖으로 나갔다.

숀 클랩튼이 앤 로버츠에게 따지고 있었다.

“신인감독 주제에 날 퇴출할 겁니까?”

그는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앤 로버츠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현장의 배우나 스태프들의 표정도 잔뜩 굳어있었다.

이도원은 망설이지 않고 숀 클랩튼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숀.”

“놔!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뭉개버리기 전에.”

이도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숀 클랩튼이 검지로 이도원의 얼굴을 가리키며 쏘아붙였다.

“네가 잘난 것 같지?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며 교묘하게 내 실수를 이용하더군. 치사한 동양인 새끼.”

숀 클랩튼은 대놓고 면박을 주기에 이르렀다. 그는 굉장히 무례한 일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이미 갈 데까지 갔다는 듯 거침없었다.

이도원은 같이 흥분하지 않고 빤히 그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나랑 둘이 얘기하지.”

그는 앤 로버츠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이도원은 바로 클로이 포트만, 줄리아 패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촬영 스케줄에 영향을 미치게 되겠지만 앤 로버츠는 그 요청을 승낙했다.

“알겠어요. 삼십 분 간 식사시간을 갖고, 다시 촬영하도록 하죠. 두 분은 따로 말씀 나누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자리를 옮겼다.

다들 현장을 떠나자 이도원이 숀 클랩튼에게 물었다.

“실수였나?”

“뭐?”

숀 클랩튼이 되묻자 이도원이 말했다.

“정말 실수였는지 물었다.”

그에 숀 클랩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내 행동을 고의로 몰고 가는 마당에, 그게 중요한가?”

이도원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건 알아. 마음 같아선 후려치고 싶었겠지. 하지만 네가 배우인 이상, 그 행동을 실행으로 옮길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서 묻는 거야.”

숀 클랩튼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실수였다.”

“통쾌했겠군.”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게 사과하려 들지 않았던 거고?”

숀 클랩튼이 대답하지 않자 이도원은 이어 물었다.

“그래서, 나 같은 동양인과 작업할 바에는 차라리 이번 영화에서 빠지고 싶나?”

이도원의 질문은 노골적이었다.

그에 숀 클랩튼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날 조롱하는 거냐?”

“아니.”

이도원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네가 이번 영화에서 빠지지 않으려면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네 행동은 오해를 키우고 있어. 믿든 말든, 난 너의 퇴출을 원치 않는다. 굳이 나랑 감정을 풀 필요는 없어. 나와 함께 오해를 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라. 내가 돕지.”

< 촬영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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