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40화 (140/178)

< 촬영 (5) >

“찍혔습니까?”

뜻밖의 부상으로 어조는 경직돼 있었지만 내용은 똑똑히 전해졌다.

가장 먼저 상황파악을 한 것도, 한달음에 달려온 것도 유태일 감독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주었다.

“찍혔다.”

안도의 한숨을 쉰 이도원은 팔을 들어 피를 슥 닦았다. 그러자 셔츠의 손목 부분이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매니저 이진빈은 사고가 정지됐다. 처음 겪는 일인데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지혈 좀 해줘.”

그때야 정신을 차린 이진빈과 스태프 하나가 구급상자를 들고 달려 나와 이도원의 상처를 봐주었다.

“형! 괜찮아요?”

이진빈은 미국에서부터 이도원과 호칭을 정정한 상태였다. 그는 걱정이 가득한 물음을 던지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정작 이도원은 지혈하는 동안에도 얼굴에 입은 상처에 대해 분노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더 리얼하게 살릴 수 있겠어.’

그런 담담한 반응에 오히려 숀 클랩튼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스태프들은 그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고, 같은 영국인 배우인 클레이 포트만 조차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실수였다고!”

숀 클랩튼이 외쳤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모두가 방금 전 폭력사태가 고의란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원, 괜찮아요?”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앤 로버츠가 먼저 이도원을 챙겼다. 이도원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음으로 숀 클랩튼에게 갔다.

비록 끔찍한 사고지만, 로버츠는 그를 이해해야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감독이었고 모든 배우를 품어야만 했다.

“숀.”

앤 로버츠가 최대한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아마 숀 클랩튼도 욱해서 나온 실수였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드라마 여러 편을 작업하며 천재성을 입증한 배우였다. 이후 악역으로 인정받으며 화려한 삶을 살아왔다. 할리우드 개런티도 이도원 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시나리오나 섭외조건이 마음에 들어 출연을 결정한 숀 클랩튼은 무명의 동양인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을 테고, 과격한 연기로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고의로 상대 배우의 얼굴을 상하게 만든 건 너무 큰 실수였다.

생각을 정리한 앤 로버츠가 말했다.

“당신을 이해해요. 하지만 이건 용서받지 못할 행동입니다.”

숀 클랩튼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흔히 있는 사고잖아? 다들 왜 날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실수였다고 했잖아요!”

앤 로버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통제가 힘든데…….’

그녀는 교과서적으로 말했다.

“숀. 사고든 고의든 상대 배우에게 상해를 입힌 건 맞잖아요? 당신은 지금, 도원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요.”

감독이 전면에 나서자 숀 클랩튼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그는 분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이도원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주저앉아 있는 이도원에게 손을 내밀며 사과를 건넸다.

“미안합니다.”

이도원은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숀 클랩튼이 아닌, 계단 위 앤 로버츠에게 가있었다.

“감독님. 피가 마르기 전에 바로 다음 촬영으로 들어가죠.”

그 말에 현장의 몇몇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독하고 뜨거운 의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는 것처럼 지금 이도원의 머릿속은 오로지 촬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숀 클랩튼이 고의로 그랬든 실수로 그랬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촬영에 임하는 이도원의 각오를 엿본 앤 로버츠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알겠어요. 계속 촬영하죠!”

그녀가 대답했고 스태프들도 얼굴색을 고쳤다. 그렇게, 이도원은 사고로 인해 주춤할 수 있었던 현장 분위기를 달구며 전화위복으로 만들었다.

이런 굴러가는 상황에 가장 당황한 건 숀 클랩튼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해?’

자신의 멱살을 잡아도 모자란 상황에 저런 침착한 반응이라니. 기가 막혔다.

‘여우같은 놈.’

숀 클랩튼은 이도원이 이 상황을 이용해 자신에게 망신을 주고 동정표를 얻으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를 더 아니꼽게 만드는 건, 클로이 포트만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도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매료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는 상황에서도 촬영 생각밖에 없다니… 섬뜩하네.’

클로이 포트만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훌륭한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같은 배우로서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이어 그녀의 시선이 숀 클랩튼에게로 옮겨가며 차갑게 변했다.

‘못난 인간.’

클레이 포트만은 눈썹 위쪽이 찢어진 이도원의 상처를 바라보며,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처럼 표정을 찌푸리고 물었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이도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스태프들이 장비를 옮기는 사이 크게 놀란 줄리아 패닝을 달랬다.

“괜찮니?”

안 그래도 흰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던 줄리아 패닝은 억지로 괜찮은 척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할 사람이 뒤바뀐 것 같네요.”

뜻밖의 대답을 들은 이도원은 눈썹 위로 얼음주머니를 대고 피식 웃었다.

그때 그를 힐끔거리던 줄리아 패닝이 물었다.

“흉 지면 어떡해요?”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촬영 중 부상은 영광의 상처야.”

농담 섞인 대답을 한 귀로 흘린 줄리아 패닝은 떨어져 있는 숀 클랩튼을 쏘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쁜 사람이에요.”

이도원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한편 스태프들의 장비 세팅이 끝난 것을 확인한 앤 로버츠가 물어왔다.

“도원. 촬영할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이도원의 말을 들은 앤 로버츠는 배우들을 모아놓고 사고 이후 장면에 대한 상의를 했다.

“예정에 없던 씬 추가를 해야 돼요. ‘존 리’가 쓰러지자 깜짝 놀란 ‘피타’가 다가와 걱정하는 걸로 가죠. 그리고 ‘스탠’은 홧김에 저지른 일에 당황하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걸로요.”

‘존 리’ 역할의 이도원과 ‘피타’ 역할의 줄리아 패닝이 먼저 수긍하자 ‘스탠’ 역할의 숀 클랩튼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들의 동의를 구한 앤 로버츠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준비해주세요!”

카메라가 작동했다.

이도원과 숀 클랩튼, 줄리아 패닝은 얻어맞은 직후 위치로 가서 촬영을 이어갈 준비를 했다.

이내 모니터로 상황을 확인한 앤 로버츠가 말했다.

“레디, 액션!”

이윽고 연기가 시작됐다.

이도원은 눈꺼풀의 반창고를 떼고 방금 막 피를 흘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피로 물든 셔츠를 내려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실눈을 뜨며 이도원의 모습을 확인한 줄리아 패닝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아저씨!”

서둘러 달려온 줄리아 패닝은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에 당황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숀 클랩튼이 현관문 안으로 숨었다.

이도원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줄리아 패닝에게 말했다.

“괜찮다. 피타.”

이도원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기까지 촬영한 앤 로버츠가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숀 클랩튼을 제외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이도원의 어깨나 등을 두드리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찬사를 보냈다. 부상을 입고도 촬영에 임하는 동양인 배우의 태도가 그들 모두에게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숀 클랩튼이 있는 공간만 찬바람이 불뿐이었다.

‘젠장.’

숀 클랩튼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동료들의 신망을 잃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도원에 대한 주위의 평가만 올라갔다. 심지어 이도원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스태프들과 배우들마저도 그의 열정에 반한 것이다.

‘놈 좋을 일만 했군.’

이 순간에도 숀 클랩튼은 반성하고 있지 않았다.

*

해당 장면 촬영을 마친 이도원은 앤 로버츠 감독의 배려로 일찍 귀가했다. 오늘 촬영했어야 될 이도원의 씬들은 뒤로 미루며, 대신 다른 배우들 분량으로 대체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도원은 거울을 보며 반창고를 뗐다. 다행히 맞는 순간 고개를 돌려서 크게 찢어진 상처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도원은 새로 소독한 후 반창고를 갈고, 붓기가 가라앉도록 찜질을 하며 오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당시에는 촬영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모자란 놈.’

숀 클랩튼을 생각하며 피식 웃은 이도원은 ‘쯧’ 혀를 차고는 밀려있던 백 엔터테인먼트의 보고서들을 확인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네.’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백 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이 특별한 사건사고 없이 차근차근 작품 활동을 하며 주가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 웹 사이트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일은 이도원의 할리우드 진출 소식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김흥수 기자가 신호탄을 터트린 것이다.

[한국을 열광시킨 이도원, 할리우드 진출의 꿈을 꾸다]

배우 이도원이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건 지난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유태일 감독의 <우리의 심장>으로 데뷔한 그는 군 전역 후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를 시작으로 영화 <악마의 재능>, <투사>, <바람>까지 꾸준한 흥행가도를 달려왔다. 방송계와 영화계 모두에서 ‘흥행보증수표’로 부상한 이도원. 그는 데뷔 때부터 유태일 감독과 특별한 우정을 이어오며 무려 세 작품을 같이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한 이도원이 고국을 떠나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이 꿈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보자.

◆ 뮤지컬 <영웅>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다.

이도원은 드라마, 영화를 넘어 지난 2021년 뮤지컬 ‘영웅’과 만났다. 국내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고 2022년에는 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신인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 이후 뮤지컬 ‘영웅’의 브로드웨이 진출이 확정되었고, 이도원은 미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 동양의 배우, 새로운 도전을 하다.

뮤지컬 ‘영웅’으로 미국 브로드웨이를 뜨겁게 달군 중영극단 단원들. 하지만 이도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남아 현지 무명 연극배우들과 ‘백 유랑극단’을 결성하고, 50개 주를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추진했다. 유튜브나 SNS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며 이도원은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한다.

◆ 이도원, 할리우드를 쏘다.

이도원은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 ‘웨스트 마운틴’, 제작사 ‘네러티브’와 접촉하며 영화제작을 위한 본격적인 물밑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비밀리에 유태일 감독을 초빙하여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촉망받는 신예감독을 포섭했다. 과연 한국의 배우가 당차게 내민 도전장이 할리우드에도 통할지, 그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주목해보자.

<씨네마24 김흥수 기자= [email protected]>

기사를 모두 읽은 이도원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그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영화가 상영관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면 밝혀도 늦지 않는 것이다.

“역시… 약속은 칼같이 지키는군.”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김흥수 기자 입장에서야 기왕 기사를 실은 마당에, 당장이라도 특종을 터트리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잘 참아주었다. 기자와 오랜 신뢰관계를 유지해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도원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이상백의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을 다쳤다고?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매니저인 이진빈이 그새 보고를 했던 것이다.

“예. 심한 부상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배우한테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데… 촬영에도 지장을 줬겠지. 누구 짓이냐? 그쪽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이상백의 분노한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백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찰나에도 새삼 생각한 이도원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게 더 현장 분위기를 다운시킬 거예요.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냐? 진빈이 얘기 들어보니까 상대 배우가 고의로 저지른 실수라고 하던데.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도원은 간결하게 대답하고 덧붙여 물었다.

“저 믿으시죠?”

그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이상백이 답했다.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할 생각인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회사 대표로서 묻는 거다.

사실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도원의 관심사는 오로지 촬영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업자득이란 옛말이 있죠. 그렇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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