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39화 (139/178)

< 촬영 (4) >

이도원은 시경 제복을 입고 같은 연기를 펼쳤다. 그 아이디어로 인해 시나리오는 한층 설득력을 얻었다.

‘번뜩이는 센스까지.’

앤 로버츠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다음 장면은 ‘미샬’역의 클로이 포트만과 들어가는 씬이었다. 그녀는 검은색 후드 집업과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레깅스만 입을 경우 힙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 한국에서는 다소 민망한 시선을 받겠지만 미국에선 자연스러운 패션이었다. 올 블랙의 의상과 눈부신 금발 아래 희고 작은 얼굴, 푸르도록 시린 눈동자가 잘 어울렸다.

한편 이도원은 시경 제복을 벗고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앤 로버츠는 두 배우와 콘티를 놓고 상의했다.

“미샬이 조깅하고 있는데 존 리가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장면이에요. 대본 외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클로이 포트만은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반면 이도원은 생각해 두었던 아이디어를 말했다.

“미샬은 현재 주립 어린이 무용단을 이끌고 있지만, 한때 국립무용단에서 최고의 무용수로 이름을 날렸던 유명인사에요. 비운의 사고로 부상을 입고 은퇴했지만 아직도 간헐적으로 TV에 출연하고 있죠. 도원 역시 TV를 보고 미샬의 존재를 알게 된 거고요.

나름 유명인사인데 너무 쉬운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클로이 포트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해요. 사건을 하나 걸치면 좋을 것 같아요.”

앤 로버츠는 펜을 물더니 흔쾌히 대답했다.

“곧 시나리오작가로 참여한 유태일 감독님이 도착하실 거예요. 한번 같이 상의해 보죠.”

그 말대로 머지않아 유태일 감독이 자가용을 끌고 촬영 현장으로 들어섰다. 앤 로버츠는 방금 전 배우들과 논의한 부분을 유태일 감독에게 전했다.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유태일 감독은 두 배우에게 즉석에서 주문했다.

“파파라치를 하나 끼워 넣을 겁니다. 미샬이 곤란해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등장한 존 리가 나서서 대응하는 걸로 하죠.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명인사들이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부분이니까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앤 로버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카메오로 출연해주시죠.”

“예?”

유태일 감독이 묻자 앤 로버츠가 짓궂게 말했다.

“파파라치 역할로 들어갈 배우가 없어요.”

그 말에 유태일 감독이 지지 않고 반격했다.

“파파라치까지 한국인으로 등장하면 주인공의 이미지가 떨어집니다. 감독님께서 들어가시죠. 연출자가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경우는 빈번하잖아요?”

상황을 지켜보던 이도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거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그렇게 하시죠.”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앤 로버츠가 중얼거리며 클로이 포트만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정작 클로이 포트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외면했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은데요?”

결국 ‘파파라치’ 역할로 앤 로버츠가 정해졌다. 따라서 이 한 장면만은 유태일 감독이 조연출과 함께 연출을 하기로 논의가 끝났다.

이도원으로서는 오랜만에 유태일 감독과 영화 촬영을 하는 기분이 나서 반갑기도 했다.

마침내 유태일 감독이 능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유태일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연출할 때처럼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편안한 말투로 말하자 이도원과 클로이 포트만, 앤 로버츠가 자리로 위치했다. 이어서 각각 세 대의 카메라가 붙고, 나머지 두 대는 전체 구도를 촬영할 준비를 했다. 넉넉한 촬영 환경을 보며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국내와는 제작 환경 자체가 달라. 저예산 영화인데도 사유지도 아닌 도로를 통제하고, 카메라도 다섯 대나 들어간다니… 블록버스터 영화일 땐 시 전체에 몇 백 대의 카메라를 장착하고 촬영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어.’

제작 예산이 적힌 표를 봤을 때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만 직접 현장에 와서 보니 부럽기도 하고, 국내의 열악한 환경에서 그만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유태일 감독은 모니터에 집중하고 입을 열었다.

“카메라 롤.”

카메라 다섯 대가 일제히 가동했다. 주위의 스태프들은 앤 로버츠가 보라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스틸컷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뛰어든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밝은 분위기 속에서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레디, 액션.”

대로변 상점 모서리에 숨은 앤 로버츠 감독은 카메라로 조깅을 하고 있는 클로이 포트만을 겨냥했다. 파파라치 역할의 앤 로버츠를 발견한 이도원은 클로이 포트만에게 접근해 나란히 달리며 말을 붙였다.

“실례지만 방금 집에서 나온 것 아니죠?”

정확히 말하면 ‘미샬’ 역할의 클로이 포트만은 남자친구의 집에서 나온 길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추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누구시죠?”

이도원은 웃음을 매달았다. 웃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띤 이도원이 상가 모서리 쪽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클로이 포트만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말고,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서둘러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녀가 눈치채자 카메라를 들고 있던 앤 로버츠는 집요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내리더니, 얼굴이 보이는 구도로 자리를 옮겼다.

이도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클로이 포트만에게 속삭였다.

“아마 이 주변에 있을 겁니다. 제가 파파라치에 대해 좀 아는데, 밥벌이가 걸린 일이니만큼 끈질기죠.”

클로이 포트만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이도원은 검지를 쭉 펴 보이며 뒷주머니에서 비닐봉투를 꺼냈다.

“이걸 뒤집어쓰시죠. 제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제가 누구인가보다, 사방이 훤히 노출된 이 상황을 어떻게 탈출할지가 관건인 것 같군요.”

클로이 포트만이 머리에 비닐봉투를 뒤집어썼다.

이도원은 손가락으로 눈구멍을 내주며 말했다.

“이제 계속 조깅하시면 됩니다. 카메라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당신이란 걸 증명하진 못할 거예요.”

“제게 뭘 원하죠?”

클로이 포트만이 쉬이 떠나지 않고 묻자 이도원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이제 가시죠.”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클로이 포트만은 자리를 떠났다. 반면 이도원은 앤 로버츠가 자리를 옮긴 방향으로 스텝을 밟으며 춤을 췄다.

앤 로버츠가 카메라를 내리며 웃는 것을 신호로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뒤를 돌아본 클로이 포트만도 깔깔 웃었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컷. 오케이.”

그때까지도 웃음을 멈추지 못한 클로이 포트만이 아주 배꼽을 잡고 물었다.

“도원! 대체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도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극 중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춤 한 번 땡겼죠.”

현장 분위기를 단번에 환하게 만드는 건 능력이었다. 이도원이 맡은 ‘존 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적 고통을 안고 가는 인물이다. 따라서 모든 장면들이 무겁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이도원이 연기를 잘 할수록 ‘존 리’라는 인물은 관객들의 숨통을 옥죌 것이다.

그 와중에 이런 애드리브는 과하지 않고 적절했다. 무엇보다 ‘미샬’에게 유머러스한 매력을 어필하며 구해준다는 점에서 접근성에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고가 있기 전 ‘존 리’가 얼마나 밝은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려주며 캐릭터의 매력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 점을 놓치지 않은 유태일 감독은 생각했다.

‘도원이의 애드리브를 살리는 연출을 하려면…….’

생각한 유태일 감독이 카메라를 든 스태프에게 물었다.

“방금 미샬이 돌아보며 웃는 장면도 촬영했습니까?”

스태프가 카메라를 흔들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 말을 들은 순간 앤 로버츠와 유태일 감독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샬의 웃음소리를 걸고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시키면서 존 리에게 전화하는 장면으로 넘어가면 되겠네요.”

앤 로버츠의 말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던 이도원과 클로이 포트만은 이번 장면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계기가 됐다. 반면, 웃음기를 지운 숀 클랩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자국의 매력적인 여성이 동양인 수컷과 웃고 떠드는 모습 자체가 못마땅했다.

*

부족한 부분을 몇 컷 더 촬영했을 때 아역 줄리아 패닝이 도착했다. 그녀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내려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도원이 현장에서 가장 친해지고 싶은 건 줄리아 패닝이었다. 열두 살짜리 꼬마가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기특하고 귀여웠다.

이도원은 모처럼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오디션 때 연기 인상 깊었어.”

줄리아 패닝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때 앤 로버츠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스태프들 준비 끝났습니다! 배우들 준비해주세요.”

이도원과 줄리아 패닝이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숀 클랩튼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번에야말로 기를 죽여주지.’

남모를 결심을 한 채, 그는 이도원을 마주 보았다.

이도원은 동공 속에 일렁이는 적개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날 싫어하는군.’

그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 받아본 시선이었다. 배우들 중에는 욕심 많고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속마음을 감추는 데에도 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특출난 실력은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고, 열 중 다섯은 이런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서 이도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대의 쓸데없는 경쟁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유로운 반응에 숀 클랩튼은 속이 뒤집혔다.

‘날 무시해?’

그는 조롱을 당한 것 같은 굴욕감에 사로잡혔지만 겉으로 분노하진 않았다. 대신 작게 속삭였다.

“긴장해야 될 겁니다. 배려하지 않고 연기하겠소.”

이도원은 그를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처 배우들 사이의 기류를 읽지 못한 앤 로버츠가 촬영 지시를 내렸다.

“레디, 액션!”

‘존 리’ 역할의 이도원은 ‘피타’ 역할인 줄리아 패닝의 손을 잡고 현관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표정은 비장하게 보이기도,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때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온 ‘스탠’ 역할의 숀 클랩튼이 사냥용 총을 들이밀며 외쳤다.

“멈춰!”

이도원이 우뚝 멈추고는 쪼그려 앉으며 줄리아 패닝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총으로 위협하는 숀 클랩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줄리아 패닝에게 말했다.

“눈 감고 귀 막고, 잠시만 기다려라.”

줄리아 패닝은 그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천천히 일어난 이도원이 숀 클랩튼에게로 터벅터벅 다가가 총신을 잡더니, 총구를 이마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쏴보시오.”

숀 클랩튼이 눈가를 움찔 떨었다.

“뭐?”

“쏴보라고 했소.”

이도원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 머리통을 날려주시오. 그럼 저 애도 자연스럽게 당신으로부터 해방되겠지. 내 변호사가 저 애를 책임져 줄 거요. 당신 같은 쓰레기는 똑같은 쓰레기인 날 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돼. 그럼 이 세상이 깨끗해지겠지.”

“이 미친놈이?”

숀 클랩튼이 총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며 발악하듯 외쳤다. 그때 이도원이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방아쇠도 내가 당겨줄까?”

화들짝 놀란 숀 클랩튼은 한 걸음 물러서며 장총으로 이도원을 후려갈겼다.

퍽!

대본에 없던 장면이었다.

이도원은 이마를 맞고 계단 아래로 나가떨어졌다.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모두 벙 쩠다.

숀 클랩튼은 양손을 들며 짐짓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빗나가게 한다는 게 너무 몰입하다보니… 괜찮습니까?”

쓰러져있던 이도원은 상체를 일으켰다.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이도원이 얼굴을 들며 물었다.

< 촬영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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