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3) >
김흥수는 약속시간인 열 시에 정확히 방문했다. 이도원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절로 긴장이 됐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는데 벌써 이 정도 배우로 성장했다니.’
열일곱 살에서 스물다섯 살이 되기까지 팔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 배우가 데뷔해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할리우드라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도원은 이정표를 보고 따라가듯 삶을 살았다.
‘사람 팔자가 천차만별이라지만 너무 드라마틱하잖아?’
말하자면 이도원은 한국 영화계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존재였다. 김흥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트레이닝을 마친 이도원이 거실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기자님.”
이도원은 밝게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모습에서 젊은 나이에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특별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편안한 태도를 보며 김흥수는 손을 맞잡았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할리우드에서 주연을 잡으셨단 소식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도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운이 따라줬죠.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자 김흥수가 카메라를 꺼내며 물었다.
“잠깐 사진촬영을 해도 되겠습니까?”
이도원은 이미 유성연에게 스타일링을 받은 상태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화보 촬영도 아닌데 더 떨리네요.”
말한 이도원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등은 곧게, 어깨는 넓게 폈고, 턱을 살짝 당겼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앵글에 담기며 부드러운 분위기가 우러났다.
“아주 좋습니다.”
김흥수는 이래저래 주문할 필요도 없이 셔터를 눌렀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화보가 됐다.
‘자질구레한 촬영 장비 없이도 이런 사진이 나오다니…….’
여러 번 광고 촬영을 하며 깨우친 노하우인지 몰라도, 이도원은 프로의 면모를 가진 배우가 돼있었다. 김흥수는 사소한 것들에서 그간 이도원의 발전을 체감했다. 이내 사진촬영을 마친 김흥수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인터뷰로 들어가시죠.”
김흥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에 불과했다. 초조한 마음을 잘 아는지 이도원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시작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가 수첩을 펼치고 입을 열었다.
“지금 팬들이 도원 씨에게 가장 궁금해하는 건 미국에서의 근황입니다.”
예상 질문이 뻔했기 때문에 이도원은 이미 대답을 생각해 둔 상태였다.
“지난 이 년 간 극단을 설립하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했었습니다. 도중에 영화계 관계자들과 인연이 닿은 건 행운이었죠. 한국에서 유태일 감독님을 초청해 시나리오를 받고 영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김흥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배우가 왜 굳이 가시밭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습니다.”
이도원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현재보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건 우리 모두의 공통된 욕망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고, 그런 결심을 하는 데에는 안유성 선생님의 말씀이 동기가 됐습니다. ‘최고의 배우란 없다, 최고의 순간만 있을 뿐.’ 이 말씀이 지금껏 제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김흥수가 수첩에 옮겨 적으며 물었다.
“백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직을 겸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백 엔터의 배우들이 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상식 때도 여러 번 도원 씨의 이름을 언급했는데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십니까?”
그 질문에 미미하게 웃은 이도원이 말했다.
“백 프로덕션 이상백 대표님이 제 공석을 채워주고 계십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내용은 이메일로 주고받으며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영화에 대한 부담감도 크시겠습니다. 모국어 대신 외국어로 연기를 하는 것에 어려움도 있었을 테고요.”
이도원은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영어 특유의 억양 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현장에 적응했고, 현지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배려 속에 부담감을 덜고 촬영하는 중입니다.”
어느덧 이십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김흥수는 슬슬 막바지 질문을 시작했다.
“얼마 전 <연예가소식지>에서 아시아 전역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레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 김진우 씨를 취재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중에는 도원 씨의 미국행이 같은 배우로서 아쉽다는 김진우 씨의 심경이 나타나 있었죠. 팬들은 두 분의 관계를 친구다, 라이벌이다 추측하며 궁금해합니다. 아무래도 도원 씨와 레드 엔터 간의 사건이 있었던 데다, 도원 씨가 미국으로 떠난 후 김진우 씨가 급부상한 영향도 있습니다.”
이는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한 후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대하시는 것과는 달리, 동료 배우일 뿐 별 관계는 아닙니다.”
간단히 일축하는 그를 보며 김흥수는 속으로 고소한 생각을 했다.
‘김진우는 이도원이 미국에서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짐작도 못하고 있을 텐데, 한 방 먹겠어.’
그는 말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영화가 끝나는 대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재개할 예정입니다. 당분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활동할 계획이죠.”
*
김흥수와 인터뷰를 마친 이도원은 촬영 현장인 로스앤젤레스의 한 주택가로 갔다. 십 분 전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상대역인 ‘스탠’ 역의 숀 클랩튼과 ‘미샬’ 역의 클로이 포트만이 도착해 있었다. 이도원을 발견한 두 사람은 묘한 표정이었다.
“왔군.”
숀 클랩튼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클로이 포트만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에릭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데.”
“보면 알겠지.”
숀 클랩튼이 대답했다.
두 배우가 내면에 경계심을 품은 반면 앤 로버츠는 이도원을 반겨주었다.
“어제 잠을 푹 잔 얼굴이네요.”
“하하.”
이도원은 가볍게 웃으며 숀 클랩튼과 클로이 포트만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앤 로버츠가 속삭이듯 말했다.
“두 사람은 자긍심 높은 영국인이에요. 나도 같은 영국인이지만, 성향은 전혀 다르죠. 그들은 특히 동양인에게 배타적이니까요.”
“잘 됐네요.”
전혀 의외의 대답을 한 이도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숀이야 영화 내내 적대적이고, 클로이도 저를 경계하는 장면이니까요.”
“긍정적인 건지, 담이 큰 건지…….”
앤 로버츠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도원은 두 배우에게로 가서 인사를 나눴다. 두 배우 역시 이도원의 앞에선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반갑게 맞이했다.
앤 로버츠는 고개를 흔들며 콘티를 확인했다. 이번 장면에선 ‘스탠’ 역할의 숀 클랩튼이 ‘존 리’ 역할의 이도원과 격하게 다툰다. 그리고 별도로 무용수인 ‘미샬’ 역할의 클로이 포트만과 만나는 장면을 촬영할 계획이었다.
마침내 스태프와 배우들이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앤 로버츠가 지시를 내렸다.
“촬영 들어갈게요.”
숀 클랩튼과 이도원이 먼저 들어갔다.
“잘 부탁합니다.”
언뜻 조소를 보인 숀 클랩튼이 말했다.
이도원은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저야말로.”
이윽고 앤 로버츠가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숀 클랩튼은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이 뭔데, 피타를 데려가겠다는 거요?”
눈을 부릅뜬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도원의 기를 죽이려는 듯 숀 클랩튼은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박을 것처럼 연기를 펼쳤다.
“경찰을 부르기 전에 꺼지쇼.”
숀 클랩튼의 연기는 이도원에게 앞을 가로막은 장벽이 되었다. 이 벽 너머에는 관객들이 있었다. 벽을 부수지 못하면 그의 존재감은 죽는다. 상대역의 기세에 눌리는 연기는 비교적 쉬웠지만, 상대역을 눌러야 하는 연기는 그야말로 연기를 통한 기싸움이었다.
‘숀 클랩튼이란 불을 끄기 위해선 맞불을 놓으면 안 돼. 차디찬 물이 되어야 한다.’
이도원은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경찰이라고 했소?”
그는 성큼성큼 숀 클랩튼의 코앞에 다가갔다. 이어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은 저 애의 부모가 아니야. 친척은 더더욱 아니지. 당신은 저 애의 행복을 망칠 권한이 없소. 더 쉽게 말해줄까? 지금, 이 쓰레기 더미에서 내가 저 애를 구해갈 거라는 뜻이오.”
이도원은 잘근잘근 씹듯이 말을 뱉었다.
숀 클랩튼은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고 느끼며 물었다.
“네놈이 무슨 권리로?”
이도원이 문서 한 장을 펼쳐서 바짝 디밀고 말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읽으시오. 당신이 저 안에 있는 아이에 관해 어떠한 권한도 없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요. 난 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저 아이가 원하는 무용을 가르칠 계획이오.”
숀 클랩튼이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난폭한 표현을 구사하며 대답했다.
“저런 병신에게 뭘 한다고? 이봐, 잘 들어. 쟤는 말도 못하고 운동도 못 해. 의사도 그렇게 말했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저 애를 위한 최선이란 소리야.”
이도원은 숀 클랩튼을 빤히 응시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던 이도원이 혀로 입가를 축이며 물었다.
“병신이라고?”
그는 조용한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병신이 되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닥치시오. 어쨌든 난 저 애를 데려가겠소. 당신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입양해 올 수도 있지만 난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지금부터 날 막는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 거요.”
숀 클랩튼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이도원은 체구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고 뿜을 수 없는 중압감이었다.
‘내가 기세에 밀렸어?’
이도원이 바짝 다가오자 그는 비켜섰다. 콘티에 나와 있는 동선이라서가 아니었다. 이도원의 연기는 상대방까지 대본 속에 잡아다 넣는 힘을 갖고 있었다. 호흡을 맞추다 보니 강제적으로 몰입이 된 것이다. 이어서 이도원이 문을 열었고,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앤 로버츠가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숀 클랩튼은 매우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트레일러로 돌아갔다.
‘내가 마늘냄새나 풍기는 원숭이 따위에게…….’
그 역시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같은 대사를 쳐도 이도원이 하면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숀 클랩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심리는 반발심으로 작용했다.
다리를 꼬고 대기하던 클로이 포트만은 숀 클랩튼에게 말했다.
“그렇게 무시하더니 완전히 물먹었네요.”
“닥쳐.”
숀 클랩튼은 거칠게 대답했다.
단숨에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보던 앤 로버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숀 클랩튼도 기 세기로 유명한 배우인데…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올까?’
이도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밀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답지 않게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를 보는 듯했다.
‘연기가 표면적으로 폭발하지 않는데도 상대방이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앤 로버츠가 보기에, 이도원은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배우였다.
한편 이도원은 대본을 보며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그가 맡은 ‘존 리’의 목적은 ‘스탠’으로부터 ‘피타 로즈’를 데려오는 것이다. 어떤 모습을 보여야만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타당해질까? ‘스탠’이라는 인물이 ‘피타 로즈’를 내놓지 않고 못 배길만큼 완전히 압도해야만 한다.
‘스탠은 범죄자의 성향을 가진 남자다. 폭력은 통하지 않아. 스탠은 법을 두려워하고, 난 법적으로 피타를 데려올 수 있는 준비를 끝낸 상태다. 하지만 법적으로 일을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없지.’
그렇다면 해답은 명확했다.
‘법을 이용해 스탠이 스스로 억지를 부린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만들어야 한다. 이깟 문서 한 장으로는 부족해.’
개연성을 따져본 이도원은 앤 로버츠에게 가서 말했다.
“감독님. 존 리는 어차피 뒤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타를 데려오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죠. 스탠이 피타를 양육하는 상황이 불합리하다는 내용이 증명된 문서도 있겠다, 경찰로 변장하고 접근하는 건 어떨까 합니다.”
앤 로버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의상 팀을 불렀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물었다.
“삼십 분 내로 도원에게 맞는 시경 제복을 한 벌 구해올 수 있습니까?”
< 촬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