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 (2) >
2024년 6월 23일, 대한민국 서울.
기자 김흥수는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도원과 관련한 특종을 여러 차례 보도했던 그는 승승장구하며 <씨네마24>의 수석기자(Senior Editor)자리까지 오른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특종에 눈앞에 있었다.
-이도원, 할리우드의 주연을 거머쥐다 낚시로 치면 대어(大漁)가 낚싯줄을 흔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기사 한 꼭지를 마무리하는 데만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하지만 곧바로 엔터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김흥수는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그동안 떨어진 체면을 되살릴 유일한 탈출구긴 한데.’
만약 이도원의 이번 영화가 도중에 엎어지거나 참패라도 하는 날에는 김흥수 역시 같이 추락할 터였다. 원고를 전송하는 순간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셈이다.
“이 녀석은 항상 사람을 간 떨리게 만든단 말이야.”
레드 엔터와 이도원의 기싸움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그 덕분에 <씨네마24>는 레드 엔터에게 적개심을 심어줬고 김진우와 관련된 특종을 단 한 건도 잡지 못했다.
그때 후배 기자인 고건수가 들어왔다.
“이야. 개인 사무실도 배정받으시고… 확실히 대우가 다르네요.”
김흥수가 눈길도 주지 않자 고건수는 머쓱한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얼굴이 잔뜩 굳으셨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입니까?”
그제야 시선을 넘긴 김흥수가 대답했다.
“고 기자. 내가 특급 정보를 하나 물었는데 말이야. 이게 약이 될지 독약이 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렇게 말한 김흥수는 모니터를 360도 돌렸다. 기사를 읽은 즉시 고건수가 흥미를 보이며 상체를 기울였다.
“이도원 데뷔만 해도 최고의 소스인데, 할리우드 진출이라니요? 선배, 경쟁사에서 김진우 취재하는 동안 이도원이 미국에서 연극판 전전하는 기사 싣다가 왕창 깨진 보람 있겠는데요?”
“분명히 드라마는 되겠는데…….”
김흥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탐탁지 않은 표정에 고건수가 물었다.
“근데 왜 망설이시는 겁니까?”
“이건 무조건 표지감이야. 다시 말해 괜히 영화 개봉이 불발나면 회사가 독박 쓴다. 화려하게 기사 냈다가, 요란하게 설레발친 꼴이 될 수 있다 이 말이다.”
“그럼 적당히 아사모사하게 이런 소문이 있더라, 흘리면 되잖아요?”
고건수가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김흥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동네 일간지냐? 물먹더라도 배팅하든가, 아니면 버리든가. 스타일 알면서 왜 이래?”
김흥수의 신념을 들은 고건수는 뚱한 반응을 보였다.
“선배. 그 스타일 덕분에 헛물켠 게 얼만데요. 솔직한 말로, 이도원 출국하고 김진우가 빵 뜨면서 특종도 모조리 경쟁사로 건너가지 않았습니까? 선배랑 십 년 가까이 일하면서 요즘처럼 예민한 모습은 못 봤습니다. 아래 애들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뭐?”
되물은 김흥수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이 새끼가 요새 머리 컸다고…….”
그때 고건수가 말을 잘랐다.
“선배가 변했단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이도원 인터뷰 따오셨을 것 아닙니까? 미국 순회공연이란 소재가 약했던 게 아니라, 선배가 아래 애들 시켰다가 일정 안 맞아서 물대 놓친 게 원인이란 말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관리직 맡으시면서 책상머리 벗어나신 적 없죠? 이도원 순회공연 때도 양키들 기사 고대로 가져오셨잖아요?”
고건수의 일침을 받은 김흥수는 책상 위의 서류더미를 집어던졌다.
“나가! 안 나가?”
난폭한 반응을 짐작한 고건수가 능숙하게 몸을 피하며 사무실 문간에서 덧붙였다.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셨던 분이 답답한 사무실 안에만 계시려니 당연히 탈이 나는 겁니다. 제 조언, 잘 생각해보세요.”
고건수는 날쌔게 빠져나간 후 방문을 닫았다.
한바탕 성질을 내고 홀로 남겨진 김흥수는 자리에서 벗어나 서류를 줍다가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가만히 생각하던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간다, 가. 이 새끼야…….”
*
2024년 7월 5일 금요일, 오전 8시.
김흥수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출장은 어쩌면 수석기자로서의 사활이 걸린 건이었다. 김흥수의 독단적인 보도로 인해 레드 엔터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 후부터 <씨네마24>의 활동 범위가 줄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덕 좀 보자.’
단단히 결심한 김흥수는 백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제공받은 이도원의 스케줄 표를 확인하며 움직였다. 그 결과 오후 두 시에는 이도원이 있는 촬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된 김흥수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현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촬영을 지켜보았다.
“액션!”
앤 로버츠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장로병원이었다. 이곳에서 ‘존 리’ 역할의 이도원은 ‘브루스’ 역할의 에릭 벡과 격한 감정 씬을 연기하고 있었다.
지시를 받은 에릭 벡이 연기를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그 사고에 대해서는 이미 다 잊었습니다. 더는 날 찾아오지 않아줬으면 좋겠군요.”
이도원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의료사고 당시의 정황이 기록된 문서요. 내 변호사는 당신을 몰락시킬 준비를 모두 끝냈소. 만약 내 제안을 거절한다면,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지워버린 가족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줄 생각이오.”
이도원의 음성과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반면 눈빛 속에선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순간, 에릭 벡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교도관 같았다.
‘연기일 뿐인데, 무섭다.’
에릭 벡은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고를 받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수술을 멋대로 하면 난 어차피 옷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속죄할 기회마저 잃고 싶소?”
이도원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에릭 벡은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위축됐다.
이도원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멈추었다.
“우리는 어차피 죗값을 치르게 될 거요. 그전에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말을 마치고 가만히 에릭 벡을 응시하던 이도원이 손찌검을 했다. 눈 깜짝할 새 에릭 벡의 이마를 밀어버린 것이다. 콰직! 소리와 함께 에릭 벡의 뒤통수가 소품용 유리를 깼다.
“크…….”
에릭 벡이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그를 빤히 지켜보던 이도원이 몸을 돌려 진료실 문을 열고 말했다.
“다시 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연락하겠소.”
이도원은 폭력을 사용할 때조차 조용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 모습이 더욱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본에는 움직임과 대사만 나와 있었기에 모든 동선과 연기적인 발상은 이도원의 해석에 의한 것들이었다.
이 장면을 모니터를 통해 지켜본 앤 로버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그녀는 덧붙여 생각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훨훨 날아다니네.’
앤 로버츠가 보기에 이도원은 연기라는 도구를 적절하게 갖고 노는 배우였다. 이런 감흥은 오늘 처음 호흡을 맞춘 에릭 벡 역시 다르지 않았다.
‘멋진 배우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 에릭 벡은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에릭 벡의 홈그라운드인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다른 배우들과 이도원을 이방인 취급하기도 했다. 그랬던 에릭 벡의 편협한 생각이 연기라는 공감대를 통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좋은 연기였습니다.”
에릭 벡은 이도원에게 먼저 다가갔다.
한편 닥터 가운을 입은 의사들 틈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김흥수는 눈을 반짝였다.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고… 확실하게 말해주는군.’
김흥수는 로스앤젤레스까지 날아오며 고민을 했다. 이도원의 인터뷰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이도원의 연기를 직접 본 것은 탁월한 판단이었다.
‘관객들도 느낄 정도의 발전이야. 아무리 뛰어난 국내 배우들도 할리우드에 진출하면 연기가 어색해지거나 평범해진다. 배우가 언어의 장벽에 막혀서일 수도, 자막이라는 전달 과정을 거치기 때문일 수도 있지. 그런데 이도원은 연기력이 배가 됐어. 그걸 표정이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다.’
물론 당장 이도원과 인터뷰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자료조사도 필요할뿐더러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촬영 현장에 난입하는 건 배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봅시다.”
중얼거린 김흥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이어서 호텔을 예약하고, 백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인터뷰 요청을 진행했다.
*
스케줄을 소화하고 집으로 돌아온 이도원은 백 엔터테인먼트로부터 날아온 이메일을 확인했다. 대표직을 맡고 있는 그였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검토하는 것이 필수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김흥수 기자?’
이도원이 데뷔한 후부터 쭉 인연을 이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짓고 이메일을 열어보았다.
[‘씨네마24’ 김흥수 기자 인터뷰 요청 건]
그동안 대표님 미국 순회공연 때부터 지속적으로 기사를 보도해주었던 기자입니다. 더불어 <씨네마 24>는 백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과 관련해 호의적인 보도를 해온 매체기도 합니다. 김흥수 기자는 현재 ‘라마다 할리우드 다운타운’ 호텔에 투숙 중이며, 대표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 엔터테인먼트 기획홍보팀.
해당 이메일을 모두 읽은 이도원은 조금 난감했다.
‘인터뷰라.’
가장 먼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촬영하고 있는 영화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하겠다고 온 미국까지 날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더구나 빚도 있고.’
김흥수 기자는 이도원이 레드 엔터와 대립각을 세웠을 당시 루머를 무마시키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도원은 휴대폰을 들고 ‘라마다 할리우드 다운타운’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흥수 기자 부탁합니다.”
김흥수 기자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호텔 프런트에서 바로 연결을 해주었다.
“아, 도원 씨! 김흥수입니다.”
“반갑습니다. 기자님. 잘 지내고 계시죠?”
이도원은 한참 영어만 쓰느라 다소 어색해진 모국어를 꺼내며 대답했다.
김흥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원 씨 덕분에 미국으로 출장을 다 와보고, 아주 기분 좋습니다. 낮에는 현장도 갔었는데 방해가 될까 봐 그냥 돌아왔습니다.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 이렇게 반가울 때가 없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여기까지 저를 취재하러 오셨는데 당연히 응해야죠.”
이도원은 거두절미하고 김흥수가 듣고 싶어 할 대답을 먼저 해주었다. 어차피 기사를 내보낼 시점은 상의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 감격했는지, 잠시 침묵하던 김흥수가 말했다.
“어디 보자… 내일 열두 시에 촬영이 있으시죠? 괜찮으면 오전 아홉 시까지 찾아뵙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이도원도 수첩을 펼쳐들고 스케줄을 체크했다. 매일 아침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는 체력단련과 화술훈련을 했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한 시간 정도 인터뷰 시간을 늦춘다면, 아슬아슬하게 촬영 시간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열 시로 하죠.”
이도원은 굳이 부연 설명을 해가며 바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흥수 역시 이유를 묻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원 씨의 매니저분을 통해 연락드리고 열 시까지 찾아뵙겠습니다.”
< 촬영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