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36화 (136/178)

< 촬영 (1) >

이도원이 영어 대사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발음보다 뉘앙스였다. 영어와 한국어 악센트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런 느낌, 이런 감정이니까 이런 톤으로 해야지’ 하다가도, 그대로 했을 때 자칫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연극과 영화는 대사도, 대사 톤 자체도 달랐기 때문이다. 즉 이도원의 연기력이 자꾸 막히는 부분은 바로 인토네이션(intonation; 억양)이었다.

그 결과 이도원은 리딩 내내 헤매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관찰하며 조금씩 배워나갔다.

‘앤 로버츠의 도움이 필요하겠어.’

이도원은 리딩을 마친 뒤 다짐했다. 앞으로 함께할 배우들 앞에서 처음 실력을 선보이는 순간이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나마 본격적인 촬영이 아니었기에 이도원은 실망하기보다 과제 하나를 얻은 기분으로 리딩 룸을 나섰다.

*

이도원과 앤 로버츠는 그날부로 대본을 사이에 두고 수도 없이 연습을 했다. 지금까지 동양인이 진출했던 영화들처럼 액션이 주가 되는 역할도 아닐뿐더러 영화 전체의 80퍼센트를 잡아먹는 많은 분량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만큼 대사도 많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이도원의 연기가 흐트러지는 순간 영화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도원은 앤 로버츠에게 거듭 요청했다.

“최대한 가혹한 지적을 해주세요. 크랭크 인 전까지 완벽해져야 합니다.”

다행히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부분은 수많은 흥행작을 탄생시킨 ‘네러티브 제작사’의 영화프로듀서 제임스 피터젠이 담당했기 때문에 앤 로버츠는 이도원을 코칭할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 보이스 트레이닝이 지속됐고 마침내 6월 23일 크링크 인 당일이 되었다.

이도원과 앤 로버츠는 같은 차에 동승해 산타모니카 해변에 위치한 촬영장으로 갔다. 운전은 이진빈이 맡았고, 이동하는 동안 유성연이 현지의 유명 디자이너들과 만나며 배운 스타일링을 해주었다. 코디를 받는 동안에도 이도원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

바다가 보이는 현장에 도착한 앤 로버츠는 당황했다. 이도원의 트레일러 크기가 주연배우임에도 가장 작았던 것이다. 이도원의 매니저인 이진빈과 스타일리스트 유성연 역시 표정이 굳었지만 정작 이도원 본인은 담담했다.

“들어가죠.”

툭 던진 이도원은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분장을 하고 촬영 준비를 마쳤다. 한편 그와 흩어진 앤 로버츠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콘티를 확인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촬영이 시작됐다.

해당 장면은 변호사 ‘조 밀러’ 역할의 조지 그랜트와 ‘존 리’ 역할의 이도원이 대화를 나누는 씬이었다.

스태프들이 위치하고 앤 로버츠가 지시했다.

“배우들 준비해주세요.”

조지 그랜트가 앵글에 담긴 모래사장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

이도원은 레쉬가드를 입은 채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그는 바닷물이 무릎 위를 적시는 곳에 위치한 상태로, 망설이지 않고 머리끝까지 몸을 담갔다 일어났다. 다만 로스앤젤레스의 6월은 한국으로 치면 늦봄의 기후를 보였기 때문에 입수할 경우 다소 추울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준비를 마치자 앤 로버츠가 확성기에 대고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이도원의 귓가로 등 뒤에서 넘어오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그는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을 체감하며 자연스럽게 얼굴 표정을 굳혔다.

‘몸이 좋군.’

조지 그랜트는 내심 감탄했다. 몸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모르는 배우는 없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이도원은 인정해줄 만한 비율의 몸을 갖고 있었다.

한편 이도원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해온 결과물이었다. 전부터 꾸준히 해왔던 노력이 지금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따로 몸 만들 시간을 갖지 않고 보이스 트레이닝에 집중할 수 있었다.

조지 그랜트에게 다가간 이도원은 서핑보드를 벤치에 기대놓고 곁에 앉았다.

이도원은 등을 굽히고 두 팔을 허벅지 댄 채 앞으로 쏠린 자세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 제 부탁은 생각해 봤습니까?”

전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워진 억양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이도원은 밤낮없이 노력했다. 대본을 수차례 외웠고 마디마디 코칭을 받았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다.

조지 그랜트는 무언가 미세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마주 대사를 쳤다.

“존. 아내와 뱃속의 아이 일은 유감이네. 하지만 자네의 탓이 아니야.”

멋스럽게 주름진 노신사의 인상과 깊은 눈빛에서 진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따스한 목소리도 이도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진 못했다. 이도원은 바다 끝에 자신의 목표가 있는 것처럼 단호한 시선을 보내며 다시 물었다.

“제 부탁을 들어줄 수 있습니까?”

절대 바꿀 수 없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결단을 내리면 해내고야 마는 ‘존 리’의 모습이 음성과 눈빛만으로도 전달되었다. 그제야 조지 그랜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딩 땐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군…….’

리딩 때도 이도원이 몰입을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억양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몰입도 역시 비약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런 내면의 생각과는 별도로, 몸에 익은 연기를 펼치며 잠시 망설이던 조지 그랜트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생명의 은인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겠나?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선택 같아서 하는 말이네.”

이도원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극단적인 선택이요? 극단적이라고 했습니까?”

다그쳐 물은 이도원의 동공이 지옥으로 물들었다. 그는 끔찍한 자책과 경멸을 간직한 채 대답했다.

“나는 살인자입니다, 조. 살인자라고요!”

이도원이 웃으며 되물었다.

“이래도 나더러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한순간에 내 가족을 죽이고, 누군가의 가족을 죽이고, 한 어린아이의 삶을 불행하게 바꾼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이도원은 이내 진정하려 애썼다. 그는 호흡은 억눌러서 언성을 낮추고, 불안정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내 가치는 속죄뿐이란 말입니다.”

조지 그랜트가 이도원의 어깨를 잡았다.

“사고였네.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자네에게 일어난 것뿐일세.”

스쿼시를 치듯 조지 그랜트가 때린 공이 이도원에게로 왔다. 위안이 담긴 공을 받은 이도원은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전혀 위안을 받지 못하고 꽉 막힌 태도를 고수하며 시선을 다시 바다로 돌렸다.

“약속해 주십시오. 제 부탁을 들어준다고.”

비록 이도원의 태도나 말은 조지 그랜트의 위안을 외면했지만 내면은 그렇지 못했다. 파도를 바라보는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미처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는 자리의 조지 그랜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겠네. 하지만… 아직 결심을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게.”

두 사람의 연기 호흡은 제법 좋았다. 스태프들의 흥미를 잡아끌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컷.”

씬을 자른 앤 로버츠가 물었다.

“방금, 어땠어요?”

두 배우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조지 그랜트에게 더 중점을 두었다. 조지 그랜트가 이번 팀에서 가장 인지도도 높고 경험도 많은 배우였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조지 그랜트는 이도원에게 물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도원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나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되짚어보았다. 그러자 이도원의 머릿속으로 대본으로 본 영화 전체의 밑그림이 그려지며, 방금 찍은 장면들만 색채(色彩)를 입힌 듯 선명하게 들어왔다. 찰나 동안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정리한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조 밀러’라는 인물이 좀 더 ‘존 리’의 과거를 파고드는 건 어떨까 합니다. ‘존 리’는 과거의 일로 가족들을 잃고 모든 희망을 잃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자살을 결심할 만했는지, 관객들이 이해하기에는 개연성이 조금 부족할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이 동조해주길 크게 기대하지 않고 내민 의견이었지만, 의외로 조지 그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배우의 의견을 들은 앤 로버츠는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촬영을 전개했다.

“편하게 애드리브로 연기해 보세요. 방금 전 장면은 오케이하고, 좋은 애드리브는 기존의 장면에 넣는 쪽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이도원은 눈을 반짝이며 카메라를 잡은 스태프의 손가락의 결혼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쑥 물었다.

“반지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순간 앤 로버츠도 같은 아이디어가 번뜩인 듯 말했다.

“그렇잖아도 소품 팀에서 준비한 결혼반지가 있어요. 서핑을 하고 나온 장면이라 제외했었는데… 디테일을 살릴 수 있겠네요.”

곧 소품 팀에서 미리 준비해 둔 ‘존 리’의 결혼반지를 가져왔다. 이도원은 결혼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대신 레쉬가드의 포켓 안에 넣었다.

앤 로버츠가 픽 웃으며 현장을 통솔했다.

“다시 갈게요.”

이내 그녀가 지시를 내렸다.

“액션.”

조지 그랜트가 대본 전체를 떠올리며 대사를 쳤다.

“자네는 애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했었지.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어. 두 사람을 오랜 시간 지켜봐왔기에 자네의 마음을 이해하네.”

“이해요?”

거칠게 물은 이도원은 눈을 번뜩이며 언성을 높였다.

“조는 날 이해할 수 없어요! 내게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모든 건 가족을 잃을 순간 사라졌으니까요. 이제 내게 남은 건 절망과 끔찍한 실수뿐입니다. 내가 후회와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속죄뿐이에요.”

그는 포켓을 열어 반지를 꺼낸 뒤 손가락에 끼우며 일어났다.

“조가 내게 은혜를 갚을 기회입니다. 나는 내 생애 마지막 부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내 부탁을 승낙한다면… 그 아이를 찾아서 알려주십시오.”

이도원이 벤치를 떠나는 데까지.

조지 그랜트는 복잡한 표정으로 파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침내 앤 로버츠가 컷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좋았습니다!”

빙그레 웃은 조지 그랜트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도원에게 별다른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유일한 배우였다. 그래서인지 이도원에 대한 평가 역시 직관적이었다.

“전보다 훨씬 늘었군요. 억양이 달라져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집중력도 좋아졌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에도 이처럼 뛰어난 배우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조지 그랜트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말처럼 이도원이 짧은 순간 보여준 집중력은 모두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더불어 애드리브로 승화된 연기센스도 적절했다.

앤 로버츠는 이도원에게 윙크를 보냈다.

이도원은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성공했네요.’

앤 로버츠는 보이스 트레이닝을 도우며 이도원의 노력을 가장 가까이서 봐왔던 사람이다. 그녀는 악착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때부터 이도원의 팬이 되어있었다. 해낼 것이라고 믿었고, 역시나 이도원은 리딩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쳤다.

이는 이도원 스스로도 흡족한 결과였다.

‘이제 다른 배우들과 제대로 보조를 맞출 수 있겠어.’

그전까지 최선의 연기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최선을 다해 카메라 앞에서 놀 수 있게 된 셈이었다.

< 촬영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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