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7) >
2024년 6월 3일 월요일.
새벽 다섯 시에 칼같이 일어난 이도원은 각각 두 시간씩, 네 시간 동안 체력단련과 화술훈련을 하고 이진빈과 함께 ‘네러티브 제작사’에 위치한 리딩 룸으로 갔다.
제작사 관계자로 오디션에 참여했던 영화 프로듀서 제임스 페터젠이 그를 발견하고 말했다.
“일찍 왔군요.”
거의 한 시간 전에 도착한 이도원은 제임스 페터젠과 인사를 나눈 후 리딩 룸에 먼저 들어가서 대본 연습을 했다. 머지않아 리딩 시간 십 분 전까지 주연 줄리아 패닝과 조연인 조지 그랜트, 숀 클랩튼, 에릭 벡, 클로이 포트만이 참석했다.
조지 그랜트는 백발이 멋들어진 중년에서 노년 사이의 신사였다. 그는 바다처럼 푸른 눈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도원은 손을 맞잡고 흔들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타임 슬립 전에는 스크린을 통해서나 만나던 어마어마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맙소사, 그들과 작업하게 되다니!
너무나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이도원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그리며 일일이 정중하게 화답했다.
숀 클랩튼은 깡마른 체형에 갈색 눈동자, 눈 밑에 그림자가 진 강퍅한 인상의 사내였다. 까칠해 보이는 분위기대로 주로 악역을 맡았는데, 이번 배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나는 당신의 영상을 모조리 다 봤습니다.”
숀 클랩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도원은 몸 둘 바를 몰라 어색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에릭 벡이 숀 클랩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친구로, 그들이 우정은 유명했다. 반면 에릭 벡은 숀 클랩튼과 반대로 선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갈색 눈에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그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난 솔직히 클로이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내 여자죠.”
에릭 벡이 클로이 포트만이 다소곳이 앉은 쪽을 눈짓했다. 그를 힐긋 본 숀 클랩튼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넌 바로 퇴짜 맞을걸? 클로이는 콧대 높기로 유명하다고.”
클로이 포트만은 줄리아 페닝과 대본을 사이에 두고 미소 짓고 있었다.
이도원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미의 기준이 다른 것 같은데.’
그가 보기에 클로이 포트만은 눈에 띄는 미녀가 아니었다. 특이한 생김새와 육감적인 몸매를 가졌지만 그뿐이었다. 뭐, 흑발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매력적이긴 했다.
그때 감독 앤 로버츠가 리딩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발견한 배우들은 아쉬운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들이 모두 착석하자, 앤 로버츠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저를 오늘 처음 보겠지만 전 여러분들의 팬이에요. 한때 이 자리의 몇몇 분들을 보며 열광했던 소녀였죠.”
배우들이 곳곳에서 웃음을 터트리자 앤 로버츠가 말을 이었다.
“저를 다시 열광시켜주시길 바라요. 먼저 이쪽은 이번 영화의 주연인 이도원 씨, 그리고 줄리아 패닝입니다.”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줄리아 패닝이 똘똘하게 말했다.
“피타 로즈 역할입니다.”
이도원이 따라 말했다.
“존 리 역할의 이도원입니다.”
이어서 조연배우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배우들이 서로의 이름을 익히는 시간을 끝으로 모든 리딩 준비가 끝났다. 그에 앤 로버츠가 배우들을 보며 말했다.
“리딩을 시작하죠. 피타부터, 씬(#)3 봐주세요.”
영화는 피타 역할의 줄리아 패닝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널찍한 연습실에서 홀로 발레 연습을 하는 줄리아 패닝의 실루엣이 나오면, 나직한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나는 끔찍한 고통에 빠진 한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열두 살의 소녀가 말하는 밀도 높은 내레이션을 들으며 배우들은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놀랍기도, 대견하기도 한 것이다. 그 사이 줄리아 패닝의 독백이 끝나고 이도원의 차례가 왔다.
앤 로버츠가 씬 넘버를 알렸다.
“씬 5.”
화면 안에서나 보던 배우들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순간이다. 충분히 긴장될 만도 했지만, 이도원의 의식은 이미 이곳 리딩 룸을 떠나있었다. 그의 정신은 온전히 대본 속으로 스며들었다. 눈앞에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가 나타났고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는 천국과 같은 풍경 속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지옥이었다.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내리 깔리듯 동공 깊은 곳에 짙은 상실감이 맺혔다. 그러자 고통이 들이닥치며 이도원을 집어삼켰다. 형편없이 구겨진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이도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브루스 히들스턴 부탁합니다.”
이내 ‘브루스’ 역할의 에릭 벡이 전화를 받았다.
“브루스 히들스턴입니다. 누구시죠?”
“나요. 존 리.”
이도원의 음성이 무겁게 떨어졌다.
에릭 벡은 그 무게에 짓눌린 표정으로 신음을 뱉듯이 대답했다.
“당신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잘 알지 않습니까? 그건…….”
“난 지금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이도원이 매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잊었습니까? 내가 당신의 실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내 말을 따를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난감한 얼굴로 망설이던 에릭 벡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그전에, 그 아이를 브루클린 다이커 헤이츠 마을의 ‘헤이츠 병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당신도 다이커 헤이츠 마을에서 계획한 일을 저질러야 하고요.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이도원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용서받으면 안 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난 속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약속을 어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에릭 벡이 시선을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알겠소. 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얼마든 다른 방법으로 속죄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것으로 한 씬이 끝났다. 그 한 통화, 한 장면이 굉장히 긴박하게 느껴졌다. 내용에 대한 설명이나 대사가 불친절했음에도 두 배우는 섬세한 연기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팽팽한 분위기를 끌고 가면서 끊임없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왜 이런 시나리오를 썼는지 알겠어.’
앤 로버츠는 두 배우의 연기를 보며 새삼 시나리오 작가인 유태일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일 수 있는 시나리오를 썼다. 반대로 말하면 배우들의 연기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작품을 쓴 것이다.
한편 에릭 벡은 갈색 눈을 반짝였다. 짧게 호흡을 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이도원과 대사를 주고받으며 전율을 느꼈다. 마음속 깊이 한국 배우를 경시하던 선입견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법이야.’
아직 판단을 끝내긴 섣불렀지만 이도원이 좋은 연기를 보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에릭 벡은 감탄하기 보다, 관찰하듯이 불편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 속에 내포된 의도를 읽은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할지언정,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군.’
비단 에릭 벡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배우들 역시 이도원을 경계하며 평가하고 있었다.
그 같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이도원은 분노하기보다 흥분했다. 어차피 미국을 처음 왔을 때부터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을 뒤집는 일을 즐겨왔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배우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낀 앤 로버츠는 침이 말랐다. 아직은 배우들 간의 신경전이 표면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었지만, 작은 균열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국적과 인종에 따른 차별은 그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보는 이가 다 초조한 판에, 정작 이도원은 태연했다.
‘담도 크지.’
나직이 감탄한 앤 로버츠가 말했다.
“다음 씬 6.”
이번에도 이도원이었다. 그는 전 장면에 이어서 시작했다. 전화를 끊고 고개를 숙인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지 그랜트가 전화를 받았다.
“…존.”
존 리의 변호사, 가족과 같은 인물인 ‘조 밀러’ 역할의 그는 안타까운 표정과 무거운 목소리로 이도원을 불렀다.
이도원은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그 아이는 찾으셨습니까?”
그는 입술을 매만지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초조한 심리가 태도는 물론 눈빛에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지 그랜트는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찾았네. 브롱스에 있다더군.”
브롱스는 뉴욕 멘하탄의 북동쪽 할렘강 경계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빈민가로도 유명한 곳이었기에, 이도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브롱스 어디죠?”
“사우스 브롱스에 있다더군.”
뉴욕이 과거에 비해 전체적으로 안정됐다고 해도 사우스 브롱스는 아직까지 질이 좋지 않은 동네였다. 그 사실에 분노한 듯 이도원은 책상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쿵쾅거리는 소음을 수화기 너머로 들은 조지 그랜트가 걱정스럽게 불렀다.
“존?”
거친 숨을 몰아쉰 이도원이 말했다.
“아이를 브루클린의 다이커 헤이츠로 데려가야 합니다.”
“아이의 부모가 승낙하지 않을 거야.”
“부모가 아닙니다.”
이도원은 단칼에 잘랐다.
“아이는 양부모로 알고 있지만, 아이에게 남겨진 유산을 노리고 달려든 자들일 겁니다. 병원에서 본 적이 있어요.”
“진정하게, 존.”
조지 그랜트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도원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잊지 마세요, 조. 나는 그 아이에게 속죄해야만 합니다. 그 아이의 인생이 망가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 아이에게 벌어진 불행은 모두 나 때문입니다.”
이도원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그는 못 박아 당부했다.
“방법을 찾아주세요. 저랑 약속한 일을 잊지 마십시오. 굳게 마음먹으세요. 그 아이에게 속죄하지 않는다면 제 인생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조지 그랜트가 대답을 피하며 말했다.
“그 아이는 자네의 아내도, 뱃속에 있던 아이도 아니야. 그 아이는…….”
“조!”
이도원이 언성을 높여 그의 말을 잘랐다. 이어서 그가 거친 호흡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를 도와주기로 했던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흔들리지 마세요.”
전화를 끊는 데까지, 또 한 씬이 끝났다.
참던 숨을 내쉰 앤 로버츠가 말했다.
“잠시 쉬고 하죠.”
배우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의 연기를 본 후 배우들 사이에서는 여러 색깔의 시선들이 교차했다.
줄리아 패닝은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조지 그랜트는 눈이 마주치자 감탄한 듯 진지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반면 에릭 벡과 숀 클랩튼, 클로이 포트만은 무언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과연 그렇게까지 후한 평가를 줄 만한가 불만 섞인 반응이었다.
주변의 시선을 느낀 이도원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동양인 치고 제법이다, 이건데.’
이도원을 인정하는 배우들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배우들도 그 생각은 같았다.
잠깐이지만 호흡을 주고받아 본 이도원은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의 모든 배우들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각자의 연기 색깔이 확실해. 나도 어느새 교만해졌던 건가? 이런 반응이 시시하고 서운할 정도로…….’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할 당시에도 칭찬을 받았고,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때 앤 로버츠가 물었다.
“도원. 어때요?”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같이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네요.”
이도원이 보고 있는 배우들은 몇 년 후 대부분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는 스타가 된다. 따라서 현재의 연기력도 수준급이었다. 이런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는 앤 로버츠는 능청스러운 농담을 ‘더 넓은 세계로 나선 소감’ 정도로 치부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들도 놀랐을 거예요. 자신감을 가져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내심 걱정도 됐다.
어찌 됐든 이도원은 홀로 동양인인 것이다.
한편 이도원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걱정을 걷어냈다.
“물론이죠. 막 재밌어지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