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6) >
“제 이름은 피타예요. 당신은요?”
줄리아 패닝은 담 너머를 훔쳐보는 도둑고양이 같은 눈빛과 표정으로 물었다. 속마음을 둘러싼 두툼한 장벽과 경계심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도원은 앞에 놓인 대본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줄리아 패닝을 보았다. 그는 대본 안에서 이야기 속 인물 ‘존 리’가 되어 대사를 쳤다.
“존 리.”
이도원의 얼굴을 지배하는 슬픔이 드러났다. 동공 속은 감정 한 점 없이 텅 비어있었고, 입가에만 어색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이내 이도원이 약점을 들킨 사람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훔치고 다시 줄리아 패닝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피타. 왜 이런 곳에 있니?”
‘피타 로즈’역의 줄리아 패닝은 눈을 내리깔며 표정을 바꾸는 것만으로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더니, 이윽고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 혼자예요.”
이도원이 줄리아 패닝이 앉은 뒤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현관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난폭하게 다투는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그쪽을 응시하던 이도원은 줄리아 패닝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부모님은?”
줄리아 패닝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로 어깨를 살짝 떨었다. 그 사이 대본을 확인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연기를 했다. 대사와 표정 변화 모두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제 부모가 아니에요.”
줄리아 패닝이 눈을 들며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담담하게 마주 보는 눈동자 깊은 곳에 불안감이 일렁였다.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두려움을 숨기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이었다.
‘표현이 입체적이다.’
이도원은 감탄했다.
아이들은 보통 우는 연기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웃는 연기로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상황에 따른 섬세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했을 때 만약 줄리아 패닝이 현실에서도 고아거나 가정불화를 겪는 아이가 아니라면 타고난 재능이었다. 불과 열두 살의 아이가 쪽대본 하나로 그런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전달하기까지 막힘이 없다는 건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도원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상대역인 줄리아 패닝에게 집중하며 감정을 잡았다. 그가 일그러지는 표정을 간신히 붙잡고 미소를 만들며 물었다.
“네 부모님은 어디 가셨니?”
그 질문을 들은 줄리아 패닝의 눈이 순식간에 충혈되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맑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서럽게 울었다.
두 배우가 대사와 감정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몰입했던 제작사 관계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아, 피타. 한 장면만 더 해보자.”
심사자가 미공개 대본의 중간 부분을 건넸다.
이도원과 줄리아 패닝은 대본을 받아서 읽었다.
실내에는 약 십 분 정도의 침묵이 주어졌다. 그건 줄리아 패닝이 연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시계를 본 제작사 관계자가 물었다.
“준비됐니?”
줄리아 패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도원이 먼저 대사를 해줄 차례였다.
“피타. 난 나쁜 사람이다. 아주 지독하지.”
그 말에 줄리아 패닝은 슬픔을 모두 주체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린 이도원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줄리아 패닝의 눈가가 붉어졌다.
분명 정교하게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도원은 줄리아 패닝이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아닌, 불과 십 분의 연습시간 동안 대본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감하는 능력이 말할 수 없이 뛰어나. 오직 재능이나 경험으로만 발휘할 수 있는… 기술로 흉내 낼 수 없는 정교한 표현이야.’
그때 줄리아 패닝이 대사를 이어나갔다.
“내가 다섯 살 때 실수로 이층 난간에서 떨어진 적이 있대요. 그 바람에 팔에 상처가 났어요. 지금도 흉터로 남아있죠.”
줄리아 패닝은 가장 소중한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럽게 울며 말했다.
“그냥 그런 거예요. 존도 그래서 상처를 입은 거고요. 나도 그래요. 상처가 고통스럽다거나 보기 싫은 흉터가 생겼다고 모든 사람들이 죽으려 하진 않아요. 상처는 아물고 흉터는 익숙해질 테니까요.”
줄리아 패닝은 보는 이들의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호소력 짙게 울고 있었지만 대사는 또렷하게 전달됐다. 그런데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격한 호흡과 대사는 서로 상충되지 않고 잘 어우러졌다.
‘훌륭해.’
짧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도원은 즉시 상황에 몰입해 줄리아 패닝을 마주 보았다.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맥없는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고맙다. 피타.”
바람이 불면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무거웠다. 이도원은 감정을 고스란히 연기에 녹여 반영하며 줄리아 패닝과 같이 호연을 펼쳤다.
이내 줄리아 패닝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마지막 대사를 소리쳤다.
“아저씨는 비겁한 겁쟁이에요! 겁쟁이! 바보! 배신자!”
두 사람의 연기를 모두 감상한 관계자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줄리아 패닝을 보며 말했다.
“곧 피타의 회사로 결과를 보내주겠습니다.”
줄리아 패닝은 눈물을 닦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서 인사한 후 오디션 룸을 나갔다.
관계자가 고개를 돌리며 이도원과 앤 로버츠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앤 로버츠는 심사표를 한쪽으로 밀며 대답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겠네요. 줄리아 패닝이 피타예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단의 ‘No. 127 줄리아 패닝’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두 사람의 의견을 들은 관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이도원은 마주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
이도원은 캠코더로 오디션 장면을 촬영한 제작사에 ‘줄리아 패닝’ 복사 파일을 택배 발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백 엔터테인먼트로 보내 연기 트레이닝 자료로 쓸 생각이었다. 배우 외에도 투자사 대리인 신분인 그에게는 오디션에 응시한 배우들의 연기 장면을 활용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앤 로버츠와 함께 임대주택으로 돌아온 이도원은 사람들과 둘러앉은 후 유태일 감독에게 말했다.
“아역배우가 결정됐습니다. 줄리아 패닝이란 열두 살짜리 배우입니다. 인물의 심리묘사 부분은 맡기셔도 될 것 같습니다. 훌륭했어요.”
유태일 감독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정도야?”
앤 로버츠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영국에 있을 때 현장 스태프로 잠깐 일을 했었는데, 그때 영화 촬영 현장에서 봤던 아역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고작 열두 살짜리 어린애가 어찌나 섹시하든지.”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들으셨죠?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신용운이 미소를 띠고 끼어들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여기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 시도된 적 없던 도전을 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순항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아직 정확한 일정은 안 나온 건가?”
“그럴 리 없죠!”
검지를 좌우로 흔든 앤 로버츠가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파일 안에 들어있던 일정표를 한 사람씩 배부하며 말로도 설명했다.
“6월 3일 대본 리딩이 있고, 6월 23일 날 크랭크 인에 들어갈 거예요. 물론 추가적으로 섭외되는 배우들의 스케줄에 문제가 없다면 말이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화면에 올라와 있는 배우 프로필을 보았다.
“영화보다 드라마 위주로 활동했던 배우들이 많군요. 차라리 극단 배우 중 잘하는 친구들로 조단역 섭외를 진행하는 건 어떨까요?”
신용운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다. 잘되면 좋겠지만 다들 브로드웨이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다 제작사 쪽도 반기진 않을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대답했다.
“브로드웨이로 갈지 할리우드를 갈지, 선택권은 단원들에게 줄 생각입니다. 제작사 반대는 오디션을 통해 붙이면 무마할 수 있습니다.”
유태일 감독 역시 이도원을 거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차라리 조단역 출연료를 줄이고 티켓파워를 기대할 수 있는 헤비급 조연을 한둘을 넣는 편이 낫습니다.”
“문제는 누가 우리 영화에 선뜻 참여해주냐는 건데… 일단 시나리오나 보내보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도원 일행은 제작사 측에서 보내온 자료를 보고 예산에 맞는 명단을 뽑아서 다시 넘겼다. 그리고 의외로 배우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제작사의 특출난 능력 덕분인지, 시나리오의 높은 완성도 덕분인지, 아니면 둘 모두인지 모르겠으나 조연으로 조지 그랜트, 숀 클랩튼, 에릭 벡, 클로이 포트만이 참여하게 됐다. 모두 막강한 티켓 파워를 가진 조연들이었다.
오늘도 역시 이도원의 집에 머물며 제작사에서 보내온 출연료 정산표를 보던 앤 로버츠는 고개를 저었다.
‘주연보다 조연 개런티가 두 배 이상 높게 책정됐어.’
영화에 투자한 노력의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호화스러운 조연 캐스팅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때 이도원이 주방에서 커피와 레몬차를 내왔다. 커피는 앤 로버츠, 레몬차는 자신의 몫이었다. 그를 발견한 앤 로버츠가 다급하게 화면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이도원이 모니터를 본 후였다.
“괜찮습니다.”
이도원이 씩 웃으며 앤 로버츠의 옆에 앉았다.
레몬차를 후루룩 들이켜며 이도원이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어요. 어차피 가끔씩 있는 일 아닙니까? 이런 조연들이면 제가 밀리는 게 당연하죠.”
그건 그랬다.
앤 로버츠는 모니터에서 물러나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 고마워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아마 촬영이 시작되면 어려운 점이 많을 거예요. 무엇이든 저와 공유해주길 바라요. 감독과 배우 사이의 벽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제가 배운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점이에요.”
“당연하죠. 우린 촬영 기간 동안만큼은 친한 친구나, 때로는 가족보다도 더 가까워져야 하는 사이니까요.”
이도원이 맞장구를 치자 앤 로버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놓고 차별하진 않겠지만 은근한 텃새를 부릴 수도 있어요. 이번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 중 한국인은 도원 씨뿐이에요. 외롭고 힘들겠죠.”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미 극단을 하면서 여러 번 겪어봤어요. 이곳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보다도 더 먼저 허물어야 될 벽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요. 그게 문화의 차이든 생김새의 차이든, 개의치 않을 생각입니다.”
앤 로버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걱정할 입장은 아니죠. 도원 씨는 웨스트마운틴의 사장님을 설득하고 제작사들까지 사로잡아 이런 놀라운 일을 벌였는데요. 영혼까지 공유해야 하는 감독과 배우로서 이야기지만…….”
끝을 흐리며 입을 달싹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초조해서 그래요. 이번 영화가 최고의 데뷔작이 될지 최악의 데뷔작이 될지, 내 인생이 걸렸으니까요. 거기다 나는 이름 없는 신인감독에 여성이죠. 그런데 어떤 감독도 선뜻 맡지 않았을 정도로 부담이 큰 작품을 연출하게 됐어요.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네요.”
이도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감독님을 LA로 초대한 건 그 용기 때문이니까요.”
< 할리우드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