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5) >
2024년 2월 12일 로스앤젤레스는 서울의 10월 날씨와 비슷했다. 낮에는 봄철, 밤에는 가을철 날씨로 다소 폭넓은 일교차를 보였다.
매니저 이진빈,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을 동반하고 미국으로 들어온 이도원은 ‘LA유니버셜스튜디오’로 갔다. ‘LA유니버셜스튜디오’는 <쥬라기 공원>이 살아 숨 쉬고 <터미네이터>의 불타는 도시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할리우드 영화관과 산을 깎아지른 듯한 로프트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유태일 감독이 약속 장소로 정한 곳이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곳에서 보자고 했는지 알겠군. 못 말린다니까.’
정말이지 자나 깨나 영화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도원은 당일로 관람하는 사람들을 위한 패스트레인 티켓(FastLane Ticket; 줄을 설 필요 없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다. 전화로 연락을 하고 ‘디스피커블 미(Dispicable Me)’의 캐릭터들이 있는 그루랩카페로 갔다.
카페에서 만난 유태일 감독은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이 있는 메뉴를 주문하고, 이도원은 타코스를 주문했다.
마침내 자리에 앉자 박시한 후드에 넉넉한 청바지, 선글라스와 스냅백을 쓴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네 덕분에 피를 토했다.”
이도원은 슬쩍 웃으며 말을 돌렸다.
“스타일이 바뀌셨네요. 힙합퍼 스타일로.”
구렁이 담 넘듯이 화제를 전환하는 그를 보며 인상을 찡그린 유태일 감독이 조금 각진 백팩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더 이상 수정은 없다.”
유태일 감독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이도원은 실실 웃으며 시나리오를 읽었다.
시나리오의 내용은 색달랐다.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영위하던 한인 부자가 어느 날 차 사고로 아내와 아이들을 잃는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사고를 낸 그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채 속죄할 생각으로 당시 사고로 인해 죽은 이들의 유족을 찾는다. 가족을 잃은 고통을 겪는 유족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주고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다. 그 과정이 놀랍도록 잘 쓰여 있었다.
이도원은 홀린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단숨에 다 읽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겠지만, 실패하더라도 시나리오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그 찬사를 들은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또 뭘 부탁하려고 난데없는 칭찬을 해?”
이도원은 볼펜을 꺼내 시나리오에 동그라미를 치고 다시 넘기며 말했다.
“여기 이 아역배우, 분량을 좀 늘려주십시오. 원톱 말고 투톱으로요.”
유태일 감독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그 부분을 보았다.
“넌 주연을 둘로 쓰라고 했지만 내 시나리오는 애초부터 주연 하나를 조연들이 지탱해주는 구조야. 시나리오란 게 말한다고 뚝딱 써지는 게 아니다. 네 말대로 하려면 내가 미국인 꼬마아이의 심리를 이해해야 쓸 수 있단 뜻이지. 한국 초딩들도 이해를 못하겠는데, 어떻게 외국 초딩을 이해하겠나?”
이도원이 풋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애들이 금발의 미녀보단 이해하기 쉽잖아요.”
푹 한숨을 내쉰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원하는 대로 수정을 해보겠지만 난 자신 없다. 이 역할로 올 아역과 앤 로버츠가 얼마나 잘 해주냐에 달렸어.”
이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앤 로버츠의 시나리오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 아역 캐스팅이 중요해지겠군요. 아역을 믿고 가보죠.”
“아직 뽑지도 않은 아역을 믿자? 역시 고집스럽군.”
고개를 내저은 유태일 감독이 시나리오를 다시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때? 잘 할 수 있겠나?”
미국의 영화판에 적응할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이도원은 태연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죠. 그저 최선을 다할 뿐. 그나마 이번 배역은 참고할 수 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경험?”
유태일 감독이 묻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우연히 했던 경험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처음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할 당시, 이도원은 에스페란토라는 국제 언어로 된 ‘SERVA(Service)’에 초대받았던 적이 있었다. 친교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목적을 가진 이 모임은 외국인 여행객을 집에서 재워주며 소통하는 활동을 했다. 그들은 젊은 동양 배우가 계획한 소극장 순회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SERVA' LA지부에서 그를 초청하기 이르렀다.
초대를 받은 이도원은 벨에어로 갔다. 벨에어는 미국 스타들의 보금자리기도 하며 비버리힐즈, 홈비힐즈와 함께 ‘플래티넘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부촌(富村)이었다. LA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동네 중 하나답게 출입 금지, 사유지 표시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철문을 지나 한참을 더 가서야 만날 수 있는 현관, 대리석 계단, 높은 천정, 복층 주방은 기본인 동네였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대저택을 방문한 이도원은 그 당시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집주인인 노신사와 밤을 새우고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때의 대화나 경험이 앞으로 좋은 소스가 되어줄 터였다.
이도원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요새 임대주택을 좀 알아보고 있습니다.”
유태일 감독이 감자튀김을 먹으며 물었다.
“아예 여기서 살려고?”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저 혼자가 아니잖아요. 식구 중에 여자도 있고,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자는 취지죠. 저희 극단 공연기획을 해주시는 신용운 선생님과 유 감독님도 초대할 생각입니다.”
유태일 감독이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호텔이 좋다. 드림 팀은 취향에 안 맞아.”
“제가 소통하기 불편해서 그래요. 시나리오도 그때그때 확인하는 편이 좋고요. 앤 로버츠 감독도 자주 와서 작업에 동참해줄 겁니다. 아무래도 미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국인 보다야 영국인이 익숙하겠죠. 저도 코칭을 좀 받아야 해요.”
“하긴… 많은 피드백이 필요하겠지. 연극이야 여러 번 했다지만 영화 쪽은 처음이니까.”
“맞습니다.”
“타인의 장점을 적절하게 수용하는 자만이 빠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넌 그런 의미에서 영리하고 좋은 배우야.”
칭찬한 유태일 감독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을 이었다.
“작업실을 마련해 준다는 조건이면 미국에서 머물 동안 신세를 지는 걸로 하지.”
“콜입니다.”
대답하며 씩 웃은 이도원이 말했다.
“전 이곳에서 신인이죠. 두근두근하고 막 그래요. 한국에서 영화 들어갈 때와는 또 다른 흥분입니다. 떨려 죽을 것 같은 기분, 아세요?”
*
이도원 일당은 ‘드림 팀은 싫다’는 유태일 감독의 말에 의해 자연스레 ‘드림 팀’이 되었다. 임대주택을 구하고, 그곳을 아지트 삼아 작품에 대한 논의와 작업을 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실력 있는 연출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유태일 감독, 연극배우이자 무대연출가인 신용운, 영리한 배우 이도원은 틈만 나면 모여서 시나리오나 연기에 대한 토론을 했다.
다만 문제는 모두 한국인 남성이다 보니 색채가 짙어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앤 로버츠는 제집 드나들 듯 이도원의 임대주택을 오갔다. 그 결과 시나리오 완본이 나오는 데까지 세 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아역 배우 캐스팅도 같이 진행됐다. 놀랍게도 배급사 부사장 데니스 알렌은 오디션 현장에 이도원을 불렀다. 명목은 ‘다른 나라 배우들의 연기에 적응하라’는 것이었다.
*
2024년 5월 15일 할리우드의 내러티브 제작사.
앤 로버츠, 이도원을 비롯한 제작사 관계자 두 사람은 사내 오디션 룸의 심사자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오디션 방식은 후보자들이 실제 대본을 토대로 심사자들 앞에 앉아 연기를 펼친다. 이도원이 마주 대사를 해주고, 그를 포함한 심사자들이 점수를 매기는 식이었다. 따라서 각 심사자 앞에는 동일한 오디션 심사표가 배부됐다.
심사표의 항목은 표정(Expression), 대사(Dialogue), 의견(Opinion) 세 가지로 정리되어 있었다.
제작사 관계자가 이도원과 앤 로버츠에게 설명했다.
“눈에 보이는 건 모조리 표정, 귀로 듣는 건 전부 대사,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을 의견란에 적으면 됩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사 관계자는 이도원에게 덧붙여 말했다.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도 오디션을 봅니다. 이도원 씨는 굉장히 예외적인 경우죠. 그래서 우리는 이번 기회에 이도원 씨의 연기력을 같이 평가하려 합니다. 최대한 현실감 있게 호흡을 맞춰주세요.”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내 한 명씩 아역들이 들어섰다.
그 자리에서 대본을 배부하고 연습할 시간을 준 뒤 리딩하는 과정을 통해 심사를 하기 때문에 즉흥적인 연기력이 주요했다. 또한 아역들의 성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에 남녀 구분 없이 꽤 많은 응시자가 몰렸다. 고만고만한 남녀 아역들의 연기를 보면서 이도원이 느낀 감정은 충격과 감탄이었다.
‘하나같이 한국의 유명 아역들 수준은 되는군.’
심지어 발성도 안정적이었다.
분명 긴장을 하지 않는 건 아닐 터였다. 똑같이 긴장한 상태에서 기교 없이 안정적인 발성을 보여준다는 건 기본적인 신체구조나 생활환경에서 차이가 난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도원은 입을 달싹여 소리를 내지 않고 영어 발음을 해본 후, 한국어 발음을 해보았다. 그는 혀와 입과 근육에 집중해 원인을 파악했다.
‘영어와 한국어의 발성은 서로 사용되는 근육이 다르다. 영어는 유성음과 무성음의 구분이 확실하고 구강의 운동범위가 한국어 보다 크다. 영어는 대부분 혀가 아래로 내려와 있다. 소리가 나오는 통로를 혀로 밀어 올려서 공명이 되는 것처럼 들리지.’
이도원은 발성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배우들이 훈련하는 화술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안면근육을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당연하겠군.’
더불어 서양인들은 표현 방식 자체에 몸짓이나 큰 표정 변화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래저래 연기를 하기에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셈이었다.
이도원이 틈틈이 이러한 분석을 하는 동안 어느새 순서는 마지막까지 왔다. 최종 한 명의 후보자를 남긴 채 이도원의 평가는 매우 후했다. 이도원이 보기에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아역들이 훌륭한 연기자의 재능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 아이들과 이곳 아이들의 차이점을 깨닫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점수를 정정할 기회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반면 앤 로버츠나 제작사 관계자들의 평점은 냉혹했다. 관계자 중 한 사람이 앤 로버츠를 보며 말했다.
“오디션을 여러 번 더 진행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존 아역들을 쓰지 않고 발굴하자니 만만치가 않군요.”
앤 로버츠 역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본 이도원은 슬그머니 심사표를 가려야 했다.
‘저들이 보기에 내 심사표는 기부천사 수준이겠어.’
그때 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예쁘장한 얼굴이 귀여우면서도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도발적인 매력을 가진 것이다.
‘좀 다른데?’
이도원은 이미지만 보고도 직감했다. 다른 심사자들도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지우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죠?”
심사자의 질문에 소녀는 본인의 실명 대신 극중 이름을 댔다.
“피타 로즈입니다.”
심사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알겠어요. 피타. 이제 여기, 이분을 상대로 대사를 하면 됩니다. 그럼 연기 한 번 해볼래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자 피타 로즈라고 밝힌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은 무심결에 후보자 명단을 보았다.
No. 127이라는 숫자 뒤에 적혀있는 이름은 ‘줄리아 패닝’이었다.
‘아!’
타임 슬립 전 익히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눈에 익었다. 지난 삶에서 줄리아 패닝은 이십대 중반 때부터 스타덤에 올랐기에 이도원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역 시절부터 연기를 했었다니…….’
이도원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심사자석을 마주 보고 의자에 앉은 줄리아 패닝은 긴장한 숨을 내쉬더니 대본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감정을 잡은 줄리아 패닝이 이도원과 눈을 맞췄다.
< 할리우드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