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4) >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이상백은 전화로 먼저 회식을 시작하라며 알렸다. 공적으로 논의할 주제들은 날을 새도 해결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급선무로 상의할 일만 처리한 후 회식장소인 ‘바다소리’로 갔다.
연예기획사들이 밀집한 청담동 소재의 횟집 ‘바다소리’는 관계자들이나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였으며, 사전에 메뉴를 예약하고 후불로 계산하는 독특한 지불방식 덕분에 이름 난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먼저 도착한 백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과 현장 팀, 이도원의 식구들은 회사 측에서 예약한 요리가 나올 때마다 기대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그들이 고급스러운 밑반찬과 회에 곁들여 술도 한 잔 하고 있던 그때, 미닫이문이 열렸다. 동시에 안에 있던 사람들의 면면이 활짝 피었다.
“와! 얼마만이야!”
오준식이 연극 무대를 선 듯이 힘차게 외쳤다.
이도원의 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차지은도 반색을 했다.
“오빠… 아니, 대표님! 진짜 오랜만이에요.”
“호칭은 원래대로 하자. 갑자기 바꾸면 헛갈리고 어색하니까.”
이도원은 차지은과 포옹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은근슬쩍 안긴 차지은이 그의 어깨 너머로 박아현을 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 앙큼한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은 박아현이 중얼거렸다.
“인사법도 아메리칸 스타일이 됐어. 아주 건강해 보이네?”
“너희도 다들 건강해 보인다.”
차지은과 떨어져서 반가운 면면을 바라본 이도원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식구들과 포옹을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반가워요. 정말 보고싶었습니다.”
이도원이 운을 떼자 끼어들 틈이 노리던 심재빈이 호들갑을 떨었다.
“선배님! 돌아오셔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그 말을 신호로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됐다.
이도원은 자신이 없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 가장 기쁜 건 차지은이 영화 ‘바람’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고, 작년 <청룡영화제>에서는 ‘가족’이란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이었다. 뿐만아니라 오준식 역시 작년 <연말시상식>에서 드라마부문 베스트 조연상을 받았다고 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었네.’
이도원은 내심 웃었다. 대부분 미국에서 보고받은 이야기들이었지만 호재는 들어도 들어도 기쁜 법이다.
한편 기대되는 소식도 있었다. 이상백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이도원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아마 애들 실력 늘은 걸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미국에선 모니터링할 시간이 없었지?”
“예.”
“너한테 자극을 받아서인지 다들 단단히 독이 올랐어. 괜히 상을 휩쓴 게 아니야. 재빈이도 조금 더 배우면 꽤 좋은 반응을 얻을 것 같다.”
음식들이 비워지고 환영사가 끝나자 배우들은 연기나 활동에 대한 이야길 주고받았다.
그때 이도원의 눈에 박아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을 가면처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짙은 그림자가 깔려있었다. 이들 중 박아현만 묘하게 안 풀려왔으며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도원은 박아현이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이상백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현이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 조연을 좀 하다가 주연을 잡자고 말해놓은 상태다. 본인이 주연만 고집하고 악역은 망설이니까 작품 선택이 애매해. 조연으로 한 번 내려가면 주연으로 다시 올라오기 힘들다는 것을 본인도 아니까 그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서도……. 2부작이나 4부작 드라마 주연은 곧잘 잡는데 그 이상이 힘들다. 주연급 섭외요청 들어오는 건 죄다 악역이고.”
이상백의 설명을 들은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한 번 설득해 볼게요. 그건 그렇고…….”
이도원의 시선이 미닫이 문틈 새로 보이는 TV에 머물러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이상백이 물었다.
“김진우?”
이상백은 말을 이었다.
“요즘 최고다. 저 녀석 덕분에 레드 엔터 기가 많이 살았어.”
“잘 됐군요.”
이도원은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과거 두림예고 예술제 때 김진우의 연기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충격이었지. 얼마 전에도 그때가 오버랩 되는 경험을 했고.’
이도원은 미국에서도 자주 한국뉴스들을 챙겨보았는데, 그때마다 김진우에 관한 소식이 빠지지 않았다. 특히 연기에 대한 찬사가 유독 많자 김진우가 나온 드라마와 영화를 찾아서 봤던 것이다.
‘김진우는 천재다.’
이도원은 인정할 건 인정했다.
김진우는 무섭게 성장했다. 다만 이도원의 경험과 깊이를 쫓아오지 못했던 것뿐이다. 전에도 이도원이 지나치게 뛰어났을 뿐, 김진우가 부족했던 게 아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이도원을 응시한 이상백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 녀석, 요새 물올랐다. 네가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보다도 뛰어나. 독을 품은 게 우리 애들뿐이 아니란 의미지.”
이도원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그렸다.
“잘 컸네요.”
*
레드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로빈과 소속 배우 김진우는 ‘바다소리’에서 겸상을 하고 앉았다.
먼저 이로빈이 입을 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모두 반응이 좋다. 내 기분도 좋고.”
이로빈은 껄껄 웃으며 김진우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김진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모두 대표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로빈이 잔을 내밀었다.
“김 의원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만 없다면 지금의 상승가도를 유지할 수 있을 거야. 중국과 일본 시장에서 이미 이 정도 큰 이상 널 잃으면 회사도 손해다. 의원님께는 내가 잘 말해둘 테니까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일은 없도록 하자.”
김진우가 잔을 부딪치며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물론입니다.”
두 사람은 잔을 털어 넘겼다.
이로빈은 젓가락으로 회를 하나 집어물고 말했다.
“더 이상 콧구멍만한 한국시장은 문제가 아니야. 광고로 얼굴 좀 비춰주면서 삼 년, 길면 오 년에 한 작품 씩 꾸준히 활동만 해주면 된다. 너도 바깥 물 좀 먹어봤으니 한국이 얼마나 우물 안인지 알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김진우가 소매를 걷으며 두 손으로 잔을 채웠다.
입안의 내용물을 삼킨 이로빈이 예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도원이 떠난 이 년 간 네가 영화제 작품을 휩쓸었지?”
“그렇습니다만…….”
김진우는 눈꺼풀이 잠깐 떨었다.
그는 이도원이 미국으로 간 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며 각광받았다. 그 외에 주연으로 차지은이, 조연으로 오준식이 함께 부상했지만 김진우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다만 이도원과 적대적인 언론플레이를 펼쳤던 레드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가 연예계를 장악하자 일각에서 말이 나왔다. 호랑이가 떠난 굴에 여우가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이 김진우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이로빈은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미국으로 가버린 놈은 신경 끄도록 해. 쓸데없는 경쟁심리다. 소문을 들어보니 놈은 미국의 소극장이나 전전하며 무명 연극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더군. 그놈의 선택을 신봉하는 의견도 있지만 멍청한 소리야. 예술이니 뭐니 해가며 설쳐봐야 이게 안 되면 꼴값이란 뜻이다.”
이로빈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며 말을 이었다.
“인기가 곧 이거다. 인기란 거품처럼 수그러들기 마련이야. 지금 상황이 그 증거다. 아주 잠깐 놈은 한국 인기를 독점하다시피 했지. 하지만 틈을 보인 이 년 새에 네가 높이 올라가지 않았냐?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까지. 놈이 미국에서 헛물을 켜는 동안 넌 지금 아시아 전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장황한 말에도 김진우는 여전히 불편한 얼굴이었다.
‘눈엣 가시 같은 놈을 직접 밟고 싶었습니다. 과정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 직접 굴욕감을 안겨주고 싶었어요. 그놈은 나를 몇 번이나 굴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김진우는 속에서 치미는 말을 억지로 삼키며 술잔을 비웠다. 그의 입에서 속내와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로빈은 김진우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배우가 인생에 드라마가 있어야지. 극적인 사건이 없으면…….”
그때 말을 자르며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김진우의 매니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밖에 이도원이 왔습니다!”
“이도원?”
미간을 찌푸린 이로빈이 싸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미국에 있는 놈이 어떻게…….”
“들어왔나 보죠.”
뒤에서 김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을 털어 넘기고 말을 이었다.
“환영인사 대신, 계산은 제가 한다고 전해주세요.”
*
백 엔터테인먼트 일행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횟집 입구로 나왔다. 이도원은 이상백이 계산하려는 걸 제지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식이니 제가 낼게요.”
이도원이 막 나섰을 때였다.
종업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계산은 김진우 씨가 하고 가셨습니다.”
그에 이도원은 지갑을 열다 말고 종업원을 응시했다.
“배우 김진우요?”
“네.”
곁에서 그 말을 함께 들은 이상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녀석도 네가 보고 싶었나보구나. 보기와는 다르게 숫기가 없는 녀석인가? 얼굴도 안 보고 가버리네.”
이상백은 두 사람의 관계를 빤히 다 알면서 능청스레 말했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지갑을 도로 넣으며 대답했다.
“아쉽네요. 곧 다시 나가야되는 것만 아니면 답례를 했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차지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오빠 다시 미국으로 가요?”
“언제?”
박아현도 덧붙여 물었다.
이도원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일주일 뒤 출국이야.”
이것저것 한국에서 직접 처리해야하는 회사 일만 보고 가족들과 남은 시간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누나 이다원이 서운해 하며 물었다.
“그럴 거면 왜 왔어?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오가기 힘들 텐데.”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식구들 보러 왔지.”
어머니가 이다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얘는.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해라, 좀.”
“예이.”
이도원은 무심결에 길 건너 빌딩 옥상에 설치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김진우의 얼굴이 보란 듯이 나와 있었다. 잠깐 전광판을 쳐다보던 이도원은 이상백에게 물었다.
“김진우가 레드 엔터에 벌어주는 돈이 얼마죠?”
이상백은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
“한국은 너랑 비슷할 테고, 중국에선 천만 위안(약 18억)의 광고료와 회당 오백만 위안(약 9억)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광고를 열한 개나 하는 바람에 7억 6천만 엔(약 77억 3천만 원) 매출을 올렸다더구나.”
이도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 투자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기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김진우로 인해 레드 엔터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을 터였다. 한때 김진우 보다 높은 상품성을 구가하던 이도원이 갑자기 한국을 떴으니 백 프로덕션, 엔터테인먼트 투자자들은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주식협회 모임이라도 있는 날에는 레드 엔터의 지분을 상당량 가진 주주들에게 돈 벌었다는 자랑을 들으며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정황을 파악한 이도원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 투자자들을 잘 어르고 달래주세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