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3) >
간략한 미팅을 마친 이도원은 앤 로버츠를 웨스트할리우드의 ‘몬드리안 로스앤젤레스 호텔’에 내려준 뒤 자신의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앤 로버츠의 방은 배급사에서 예약해준 반면 이도원은 사비로 묵는 곳이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호텔에서 지내게 됐다.
‘어차피 내일이면 서울로 가겠지만.’
저녁 여섯 시 비행기였다.
이곳에 남은 일은 유태일 감독이 알아서 잘 처리해줄 터였다.
이도원은 속편한 생각을 하며 호텔 창가에 걸터앉아 고소한 옥수수차를 마셨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신인은 낮에 보았던 데니스 알렌이었다.
-오늘 그렇게 가버리고, 나나 유 감독 모두 서운했습니다!
특유의 친근한 목소리에 이도원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내일 바로 한국으로 출국해야하는 일정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건 그렇고… 섭외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원 씨를 주연으로 캐스팅해야겠어요. 난 도원 씨의 연기력을 믿고 도박을 하는 겁니다.
데니스 알렌이 애초에 말하던 내용을 뒤집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곤란했다. 미국에서 촬영하고 개봉하는 영화, 미국 시민들이 가장 먼저 볼 영화에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을 수는 없었다. 그건 실패로 직결되는 지름길과 같은 판단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이도원이 물었다.
“영화흥행에 악영향을 줄 겁니다.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반면 데니스 알렌은 진지했다.
-난 미국인 사업가입니다. 난 셈에 밝고 배타적인 사람이죠. 그런 나도 도원 씨의 이미지와 연기를 보고 매료돼서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최초는 있는 법이에요. 나는 내 판단을 믿습니다.
이도원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혔다. 데니스 알렌이 자신의 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는 건 희소식이었지만, 미국영화에 한국인 주연을 쓰겠다는 과감함까지 동조하기는 힘들었다.
그때 데니스 알렌이 강경하게 덧붙였다.
-할리우드에도 좋은 시나리오는 많습니다. 도원 씨가 주연을 맡지 않으면 내가 이 영화에 투자를 하는 목적이 사라집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를 발굴하겠다는 신념을 따라 제작사들을 설득해 준겁니다.
데니스 알렌이 없었다면 이번 계획은 무산됐을 터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고집한다면 더 이상 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이도원은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해 로스엔젤레스 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은 비빔밥과 쌈밥 중 택일을 하게 되는데, 이도원은 비빔밥을 선택해 먹으며 좌석 마다 장착된 AVOD시스템을 통해 영화를 보았다.
열세 시간의 장거리비행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들은 비행 도중 잠이 들었다.
이도원은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근 이 년 만에 귀국이네.’
그 사이 미국에 익숙해져서인지 해외여행을 떠나는 기분과 흡사했다.
연습실이나 무대 밖에서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던 미국생활. 처음에는 외롭고 미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그 생활이 편해졌다. 지난날을 돌이키던 이도원은 다음으로 한국에서 재회하게 될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눈앞에 선했다.
비행기는 예상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순항을 했다. 인천공항이 가까워옴에 따라 파스타로 아침식사를 마칠 때쯤 영종도 인근의 섬들이 보이면서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안전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램프로 진입한 이도원은 수속을 밟고 인천공항을 나섰다. 장시간 비행을 한데다 시차에 적응도 안 된 상태라 몸이 무거웠다.
이도원은 매니저 이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무려 일 년 반을 매니저와 떨어져 지냈다.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공연을 올렸을 때까지 함께하다 한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여보세요? 대표님, 도착하셨어요?
처음 만났을 때 군인 티를 다 벗지 못했던 이진빈은 이제 능글능글한 말투로 물었다.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건지,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 년 전과 많은 것들이 변해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응. 도착했어. 어디야?”
-12번 게이트 횡단보도 건너편에 계시면 그쪽으로 갈게요!
이도원은 머지않아 이진빈과 만날 수 있었다.
이진빈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그를 반겼다.
“정말 잘 오셨어요!”
“얼굴 좋아졌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도원의 말처럼 이진빈은 살도 좀 붙고 혈색도 좋아졌다.
백미러로 힐끔 거울을 본 이진빈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잘 지냈죠. 그동안 준식이 형 매니저로 배정 받아서 일했어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식이도 잘 지내지?”
“그럼요. 요즘 몸 만든다고 정신없어요. 하필이면 상의탈의 하는 드라마에 들어가는 바람에… 오늘도 트레이닝센터 갔어요.”
이도원이 기억하는 오준식은 탄탄한 몸이 아니었다. 반면 드라마에 단 한 순간 노출이 있더라도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었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오준식이 끙끙대며 트레이닝을 받고 있을 모습을 상상한 이도원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생 꽤나 하겠군.”
“대표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소극장 돌아다니면서 순회공연 했지.”
“오오. 반응은요?”
“그냥 뭐.”
이도원은 어물쩍 대답했다. 그러나 이진빈은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에이. 팬 카페랑 유투브에도 계속 영상 올라오고, SNS에도 뜨던데요? 과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 이건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고… 한국을 알리는 배우, 최고의 타이틀을 마다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 진짜 배우, 잘됐으며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에요.
미국에서도 꽤 화제가 됐다고 들었어요.”
꽤 자세한 설명에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서요.”
이진빈은 백 엔터테인먼트로 차를 몰았다.
그에 이도원이 물었다.
“대표님. 백 프로덕션에 안 계시고 엔터에 계셔?”
“예. 왔다 갔다 하시는데 엔터에 계시는 시간이 더 많으세요. 프로덕션은 대부분 전략기획실 실장님이 관리하시고요.”
이진빈의 대답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백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이도원은 차에서 내려 곧장 대표실로 갔다.
‘인테리어도 번듯해졌군.’
이도원이 막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백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백 프로덕션 못지않게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도원은 처음 보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대표실 앞 데스크를 통해 안에 기별을 하고 들어갔다.
이상백이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책상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도원을 발견하더니 잠깐 침묵했다.
“저 왔습니다.”
이도원이 소파에 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이상백은 말문을 열었다.
“잘 왔다.”
이상백이 짧게 반기며 이도원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그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악수나 하자.”
“네.”
두 사람은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후-.”
길게 한숨을 뱉은 이상백이 몸을 편히 기대며 미소를 띠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래, 그동안 아픈 데 없이 잘 지냈고?”
“그럼요. 미국은 병원비가 비싸다보니까 잘 아프지도 않더라고요.”
이도원이 능청을 떨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나갔나보네요. 바쁜가 봐요.”
“네 녀석처럼 팔자 좋은 배우가 어딨냐?”
핀잔을 준 이상백이 덧붙였다.
“곧 다들 들어올 게다.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이거든.”
이도원의 환영회였지만 이상백은 마치 원래 회식날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래요? 저 가족들도 봐야하는데.”
“어머님이랑 누나도 초대했다.”
이상백의 말에 이도원이 씩 웃었다.
“그럼 아무 문제없겠네요.”
이내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물었다.
“일 얘기나 얼른 끝내자. 진행서류를 받아서 대충 알고는 있다만… 어디까지 진행된 거냐?”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이도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배급사, 제작사, 감독 섭외까지 끝났습니다. 좋은 시나리오도 있고요. 이미 스태프 팀과 배우 캐스팅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영화 투자 결정을 해주십시오.”
“네가 귀국하기 전, 이틀 새 내부회의를 여러 번 했다. 회사 주주들과 실무진 모두 양보를 했어. 그 결과 네가 요청한 사항 중에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게 있다. 어떤 것부터 듣겠냐?”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이 기쁘네요. 안 되는 것부터 듣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입을 열었다.
“백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배우들을 중 하나를 참여시키겠다고 했는데 그건 불가하다. 현재 잘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을 불투명한 도전에 포함시킬 순 없다는 게 투자자 측 의견이다. 네 움직임까진 막을 수 없지만 회사 매출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조건이지.”
“네. 그리고요?”
“실무진 측에서는 너를 제외한 한인배우 섭외 자체를 반대했다. 미국 영화계의 역사와 동향을 정밀하게 분석한 바로 한인의 출연은 최소화시키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다.”
일리 있는 의견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이제 되는 것들이다.”
이상백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회사 내 너의 위치와 현재 성장에 기여한 바를 인정해 이번 투자 건은 통과시키기로 했다. 단, 유태일 감독에게 어떤 시나리오를 받았는지 몰라도 블록버스터는 안 돼. 총무과에서 제안하는 가용한 금액 내로 영화 예산을 맞춰야 한다.”
그에 이도원이 흔쾌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유태일 감독님 시나리오답게 이번에도 저예산 영화예요.”
이상백은 실눈을 뜨고 당부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할 거야. 만약 이번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대표직 해임까지 생각해야 된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런 큰일을 벌였을 리가 없죠.”
이도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항이 추가됐습니다. 배급사에서 제가 주연을 맡길 원해요.”
“뭐?”
이상백이 크게 놀라며 덧붙였다.
“넌 조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잖아?”
“주연을 맡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답니다.”
“허허…….”
허탈한 웃음과 함께 이상백이 물었다.
“그쪽에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한국인 배우를 보고 제작과 배급, 투자까지 오케이 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주연이라니.”
“그게 좀 황당해요.”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처음에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습니다. 안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브로드웨이에서 연기에 대한 가치관이 새로 잡혔고, 순회공연을 하면서 답을 찾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신용운 선생님께 공연기획을 부탁하고 시작한 일이 큰 폭풍을 불러온 겁니다. 가족들과 동네 소극장 관람을 온 데니스 알렌 부사장의 눈에 든 거죠. 처음에는 자신이 배급하는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자세한 내막까지 보고를 받지 못했던 이상백은 절로 흥미가 동했다. 한 편의 재밌는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그가 물었다.
“그래서?”
“거절했죠.”
“아니, 왜?”
이상백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찼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승낙했다면 어떤 손해도 감수하지 않고 할리우드로 진출할 수 있지 않았나.
이도원은 그 생각을 부정했다.
“단순한 운으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할 거라면 왜 지금껏 국내에서 미국 진출을 못했을까? 고민을 해봤죠. 그리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영어로 연기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니라는 걸요. 함께하는 감독부터 문제가 됩니다.”
“무슨 문제?”
“일단 한국인을 주연으로 쓰자면 오케이 할 미국인 감독이 없죠. 그럼 데니스 알렌 부사장은 제게 조연 자리를 제안했을 겁니다. 그런다고 미국인 감독이 저를 조연으로 썼을까요?”
이상백은 이도원의 두뇌회전을 따라가려 애쓰며 들었다.
이도원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배급사 요청이니 거절할 수는 없고, 조연 타이틀을 붙인 단역으로 기용했을 겁니다. 거기가 상한선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제살 깎아먹는 일입니다. 당장 할리우드에 얼굴을 내비치면 좋겠죠. 하지만 이미 관객들에게는 ‘한국인 단역’이라는 뿌리 깊은 이미지가 심어질 겁니다. 그런 제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개봉하면 과연 흥행할까요? ‘단역’에 ‘한국인’ 배우인데요.”
이상백의 시선을 음미하며 이도원이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조연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인상적인 연기를 오랜 시간 동안 보여줄 수 있죠. 기대감을 심어줄 수 있을 거예요.”
“주연이 된 지금은? 더 유리해진 것 아니냐?”
“연기로 매료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주연이 되면 사람들은 선입견과 거부감을 가질 겁니다.”
“배급사에서 주연을 요청했다면서?”
“예.”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그래서 미국인과 한국인의 공동주연으로 갈 겁니다. 귀국하기 전 유태일 감독님께 시나리오 수정을 요청해뒀어요. 적대적이지 않고 멜로가 없는, 작품에 녹아들 수 있는 똑같은 비중의 주인공으로 말이죠.”
< 할리우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