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2) >
뉴욕 퀸즈 써니사이드, 저녁 아홉시.
올 해로 스물네 살의 영국 여성 앤 로버츠는 룸메이트와 둘이 살고 있었다. 시급 15달러(약 1만 7천 원)을 받고 하루 여덟 시간 식당 일을 하며 시나리오를 들고 지하철로 삼십 분 거리 맨해튼의 영화 제작사를 돌아다니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앤 로버츠는 막다른 구석에 몰려있었다.
“주급이 840달러, 한 달 방값 700달러…….”
다행히 방값에 비해 식비나 교통비 등의 생활비는 크지 않았다. 근래 퀸즈의 방값 시세가 떨어지고 최저임금은 올랐기 때문에 정작 돈은 문제가 안됐다. 문제는 바로 불투명한 미래에 있었다.
‘이곳에 온지 벌써 반년인데 아무런 성과가 없어.’
앤 로버츠는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며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나리오를 보았다. 어려서부터 캠코더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꿈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재능에 자부심이 있었고, 연출에 대한 감각만큼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영국 최고의 영화학교 NFTS(The Natianal Film and Television School)에 진학해 교육을 받았고, 영화 촬영법(Cinematography)을 배운 뒤로는 실력에 물이 올랐다.
그런데…….
“내 시나리오가 그렇게 쓰레기란 말이지?”
시나리오를 내밀었을 땐 제작사들이 거들떠도 안 봤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룸메이트 캐서린 모레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찢기고 구겨진 시나리오와 대본으로 거실이 도배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앤. 이게 무슨 짓이야?”
캐서린 모레츠가 질색해 묻자 앤 로버츠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말했다.
“오늘은 내 시나리오가 뉴욕 시의 모든 영화 제작사들에게 열 번째 퇴짜를 맞은 날이야. 메일로 발송했던 것도 반 년째 퇴짜를 맞고 있지. 오늘 밤 뉴욕에서 나보다 절망적인 여자는 없을 거야.”
캐서린 모레츠는 쓰레기더미를 피해 식탁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신은 공평하다잖아? 네게 표현에 대한 감각을 준 대신 상상력을 앗아간 게 확실해.”
“상상력이 없다면 표현은 반쪽짜리 재능에 불과해.”
“우린 아직 젊잖아? 기회는 많아.”
우유에 시리얼을 듬뿍 부으며 캐서린 모레츠가 격려했다. 하지만 앤 로버츠의 표정은 여전히 꺼칠했다.
“난 패잔병처럼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난 영화를 찍으러 온 거라고!”
그때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앤 로버츠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기적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도원이라고 합니다. 로스엔젤레스의 웨스트마운틴 배급사의 영화 제작 건으로 연락드립니다. 앤 로버츠 씨 맞으신가요?
초콜릿 같은 음성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용이었다.
앤 로버츠는 서둘러 목청을 다듬고 대답했다.
“제가 앤 로버츠예요.”
잠시 조용하던 상대방이 말했다.
-LA로 좀 올 수 있을까요? 항공료는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
이도원은 능숙하게 지난 달 구입한 ‘2024년형 레인지로버 LWB’를 몰았다. 베이지 톤의 가죽으로 휘감은 내부인테리어와 부드럽고 편안한 승차감이 마음에 들었다.
일 년 전쯤 면허를 땄는데도 불구하고 운전할 일이 많다보니 금방 익숙해진 이도원은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는 바로 전날 버진아메리카항공을 통해 앤 로버츠에게 비즈니스 클래스를 예약해 준 상태였다.
이내 이도원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 시.
정반대에 위치한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의 사차가 세 시간인 걸 감안했을 때 앤 로버츠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앤 로버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앤 로버츠입니다! 지금 공항에 도착했어요.
“라운지를 통해 아일랜드(차량 승강장)로 나오시면 회색 레인지로버가 보이실 겁니다.”
찾기는 쉬웠다. 이도원이 타고 있는 레인지로버는 앞머리에 차량 로고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않아 앤 로버츠를 만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도원입니다.”
이도원은 차에서 내려 앤 모레츠의 짐을 싣고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를 태우고 운전석에 오른 이도원이 차량을 움직이며 말을 붙였다.
“갑작스럽게 연락하고, 로스엔젤레스까지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로스엔젤레스에 오는 여섯 시간 동안 설레서 잠도 못 잤어요.”
앤 모레츠가 흥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도 못 참고 덧붙여 물었다.
“제 시나리오를 보신 건가요?”
“아닙니다.”
이도원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앤 로버츠 씨를 이곳에 초대한 건 연출을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에 앤 모레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출을요? 전 고등학교랑 대학 때 단편영화를 촬영한 경력뿐이에요. 웨스트마운틴이라면 헤비급 배급사인데, 그런 곳에서 제가 연출한 영화를 작업해준다고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연출하신 단편영화를 보고 결정된 사안입니다. 또한 현재 시나리오, 배급사, 제작사가 모두 결정된 상태입니다. 감독과 스태프, 배우만 캐스팅되면 바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죠.”
“왜 하필 저죠? 저 말고도 유능한 감독들이 널려 있잖아요.”
앤 로버츠의 궁금증은 당연했다. 그 정도 준비가 끝난 상태라면 검증된 감독과 스태프 팀을 데려와 제작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훌륭한 미국의 배급사, 제작사와 작업하게 됐다고 해도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아마 영화 제작비용의 삼십 퍼센트를 한국인이 부담하고, 한국 배우 몇몇을 주조연으로 쓰게 될 겁니다. 순혈 영화가 아닌 혼혈에 가까운 영화라는 거죠.”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적합한 표현력을 가진 감독들은 모두 제안을 거절하거나 턱 없이 높은 개런티를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만약 앤 로버츠 씨가 이번 제안을 수락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가 될 겁니다. 제작하는 입장에선 적은 비용으로 훌륭한 감독을 고용하게 될 테고, 앤 로버츠 씨는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겠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도원 씨는 배우 같은데요.”
앤 로버츠는 이도원의 분위기만 보고도 배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배급사나 제작사가 아닌 배우가 연락을 취해왔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 질문의 의도를 짐작한 이도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전부터 할리우드 진출을 꿈 꿨습니다. 이곳에서도 먹힐만한 경쟁력 있는 시나리오를 확보했고, 배급사와 제작사를 전전하며 서로 조건이 맞는 곳을 찾았습니다. 제가 내세운 조건은 좋은 시나리오와 높은 배율의 수익금, 영화 제작비의 삼십 퍼센트를 한국에서 부담하겠다는 제안이었죠.”
가만히 듣던 앤 로버츠가 물었다.
“너무 손해가 큰 비즈니스 아닌가요? 영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작비의 삼십 퍼센트면 적잖은 금액인데요.”
이도원은 슬그머니 웃으며 대답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투자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번 기회는 한국 영화나 배우들이 할리우드로 통하는 문을 여는 초석이 되어줄 겁니다. 만일 회사 측에서 투자하지 않는다면 제 사비로라도 투자할 생각입니다.”
“엄청난 자본가신가 보네요.”
앤 로버츠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자본가가 아니라서 파산할 겁니다.”
“전 재산을 건 도박이라! 멋진 모험인데요?”
“우리는 비슷한 구석이 있군요. 이런 모험을 즐기는 별종은 흔치 않은데 말이죠.”
이도원의 말을 들은 앤 로버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한테 하라고 하면 아마 못할 거예요. 전 그 정도로 담이 크지 않거든요. 얼간이 같은 모습을 보일까봐 태연한척하고 있지만, 지금도 충분히 놀라고 있는 중이고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두 사람이 탄 레인지로버는 배급사 웨스트마운틴 본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도원은 차를 주차한 뒤 앤 로버츠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도원은 로비에서 출입증을 발급받은 뒤 비즈니스 룸이 있는 건물 8층으로 올라갔다. 앤 로버츠가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이곳에 초대돼 올 줄은 몰랐어요. 지난주만 해도 식당에서 일하며 영국으로 돌아갈 걱정을 했었는데.”
보기 드문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젓는 그녀를 응시하던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더 놀라 일이 많을 겁니다.”
비즈니스 룸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말이 현실이 됐다. 배급사 웨스트마운틴의 부사장과 전략기획실장,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유태일 감독까지 쟁쟁한 영화계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앤 로버츠는 그들의 신분을 모두 알진 못했지만 웨스트마운틴의 부사장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맙소사! 웨스트마운틴의 부사장이 직접 납셨다고?’
그녀의 놀람을 뒤로 하고 이도원이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이미 그들과 여러 번 미팅을 했는지 짧은 덕담을 나누며 앤 로버츠를 소개했다.
“이쪽은 앤 로버츠 감독입니다. 이번 영화의 사령탑으로 초빙한 분이죠.”
그에 비즈니스 룸 안의 인사들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웨스티마운틴의 부사장인 데니스 알렌입니다.”
불과 삼십 대 후반에 웨스트마운틴 사(社)의 부사장으로 취임한 데니스 알렌이 유쾌한 인사를 건넸다. 그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미국 남성의 이미지였다.
이어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저는 유태일입니다. 한국의 영화감독이죠. 이번 영화에서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한국 배우들과 소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앤 로버츠가 오해할까봐 서둘러 덧붙였다.
“아, 물론 연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앤 로버츠는 이도원이 소개한 것과 별도로 자신을 밝혔다.
“전 앤 로버츠에요. 영화 잡지에서나 보던 분들을 뵙게 되니까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네요. 제가 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비즈니스 룸 안의 사람들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장 먼저 웃음기를 거둔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 말을 신호로 데니스 알렌이 전략기획실장에게 눈짓했다. 전략기획실장은 서류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앤 로버츠 앞에 가져다 두었다.
이내 준비가 끝나자 계약서를 들춰보지 않아도 속 내용을 훤히 알고 있는 데니스 알렌이 제안 내용을 구두로 전달했다.
“계약서를 읽으면서 들으시면 됩니다. 우리는 대개 신인감독들에게 작품 당 50만 달러(약 6억 5천 원)를, 또 유명감독들에게는 8000만 달러(약 960억 원)까지 지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조연출에게는 주급으로 8천 달러, 즉 한 작품 당 12~16만 달러(약 1억 9천만 원) 가량을 지불하죠. 따라서 앤 로버츠 씨에게는 50만 달러(약 6억 5천만 원)를 책정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조건이 좋아졌다고 해도 신인감독이 대부분 한 작품에 2천만 원 전후의 연출료를 받고, 흥행 영화감독은 1억 원 선의 연출료를 받는다. 간혹 2억 이상 연출료를 받는 특급 감독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흥행수익에 대한 지분으로 더 많은 수익을 내는 형태였다. 구상에서 제작까지 영화 한 편에 많게는 몇 년의 노력이 들어가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태일 감독의 이번 시나리오가 20만 달러(약 2억 4천만 원)를 받았다. 유명 시나리오작가의 경우 많게는 300만 달러까지 (약 36억 원) 받고, 연출까지 맡았을 때 추가적으로 연출료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익이었다.
‘들을 때마다 충격적이군.’
이도원은 내심 생각했다. 그만큼 웨스트마운틴과 계약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물꼬만 트면 신천지인 것이다. 물론 배당금이 큰 만큼 투자금도 커진다. 때문에 아직 투자 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사히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속단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안이 벙벙하기는 앤 로버츠도 마찬가지였다.
‘데뷔작에 50만 달러를 주겠다고?’
그녀는 황당한 얼굴색을 지우며 물었다.
“그 금액이면 충분히 괜찮은 신인감독들을 영입하실 수 있을 텐데, 왜 저한테 기회를 주시는 거죠? 우리가 가족은 아니잖아요.”
앤 로버츠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데니스 알렌이 대답했다.
“몇몇 단편과 졸업 작품을 보고 결정한 금액입니다. 어중간한 감독을 쓸 바에는 재능 있는 신인을 쓰자는 취지죠. 우리 회사는 앤 로버츠 씨가 가진 재능에 대한 합리적인 금액을 여러 제작사에 전달했고, 타결을 본 것뿐입니다. 이건 마약거래가 아니니까 안심하고 진행하셔도 된다는 뜻이죠.”
< 할리우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