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화 (3) >
<바람>의 감독과 배우, 그리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다.
이도원네 식구들은 유태일 감독 차를 얻어 타고 인근 한정식 집으로 갔다.
차수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출발한 차지은은 약속 장소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먼저 모인 선발대 중에서 유태일 감독이 물꼬를 텄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번 영화를 연출한 유태일이라고 합니다.”
“도원이에게 많이 들었어요. 은인과 같은 분이시라고요. 영화 너무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하자 유태일 감독이 겸양했다.
“아닙니다, 어머님. 오히려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창밖으로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들어섰다.
가장 먼저 발견한 유태일 감독이 빙그레 웃으며 알려주었다.
“여배우가 도착했군요.”
그 말대로 자가용 보조석에는 차지은이 함께 타고 있었다.
옆에서 이다원이 속삭였다.
“영화 보니까 더 의심 가던데? 무슨 사이야?”
피식 웃은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자가용에서 내린 차지은이 가까워질수록, 이다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진짜 대박.”
심지어 어머니도 한 마디 거들었다.
“연예인이라 그런지 정말 예쁘다. 얼굴도 조막만하고…….”
이도원은 쓰게 웃었다.
<악마의 재능> 시사회에서 박아현을 봤을 때의 반응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하긴, 두 사람은 같은 여배우라도 느낌이 많이 달랐다. 박아현은 예쁜 일반인 느낌이고, 차지은은 아예 주위의 시선을 잡아끄는 미모였다.
‘차지은이 예쁘긴 예뻐.’
이도원이 실제로 만난 여배우들도 많지 않았지만, 그중 최고를 꼽으라면 윤지민과 차지은이었다. 두 여배우는 서로 다른 느낌이면서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지은이는 좀 청초하지.’
천진난만하고 꾸밈없는 느낌은 뭇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이도원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차지은과 차수희가 방안으로 안내되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차지은과 차수희가 인사를 했다.
차지은은 이도원의 식구들에게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선물을 건넸다.
“오는 동안 급히 사와서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어요…….”
이도원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얼굴이 새빨개졌다. 설마 차지은이 선물까지 준비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어머니와 이다원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선물을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차지은이다 보니 감격은 더 컸다.
“아이고, 고마워요. 온 국민이 다 아는 국민 여동생에게 이런 선물을 다 받아보고… 믿기지 않네.”
어머니가 말했고 이다원 역시 실감나지 않는 눈치였다.
“저도요. 하하.”
두 사람의 선물은 바비아나라는 꽃이었다. 약품처리 후 작게 포장된 시들지 않는 생화로 방이나 거실에 두면 방향제 역할을 하는 유용한 선물이었다.
차지은이 말을 이었다.
“바비아나라는 꽃이에요. 꽃말이 ‘단란한 가족’이라고 해서 꼭 선물하고 싶었어요.”
이도원은 어머니와 이다원의 표정을 보며 확신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집 사람들한테 점수 따는 건 끝났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홀라당 넘어간 표정으로 이다원에게 속삭였다.
“어쩜 저렇게 예쁘니? 인상도 좋고, 붙임성도 좋고.”
선물보다도 차지은의 첫인상이 한 몫 한 듯 했다.
차수희 역시 붙임성이 있는 스타일이었고, 분위기는 금 새 화기애애해졌다.
“영화 최고에요. 언니도 꼭 보세요!”
이다원이 차수희에게 말했다.
영화 <바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유태일 감독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요즘 쉬쉬하며 들려오는 소문이 있던데… 이번에 창립되는 백 엔터의 공동대표로 취임한다고?”
이도원은 살짝 당황했다.
유태일 감독은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이 폭탄발언이 돼버렸다. 아무도 모르고 있는 눈치에 유태일 감독이 난색을 표했다.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이도원이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문이 빠르네요. 벌써부터 정보가 돌고 있다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다들 죄송해요. 굳이 숨기려 한 건 아니고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말을 아꼈습니다. 회사에서 내정된 사항일 뿐, 지금도 본격적으로 진행된 건 아니에요. 곧 열리는 임시총회에서 결정되면 공표하려고 했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내부 정보였기에 충분히 이도원 혼자 까발리기 꺼림칙할 수도 있었다. 막말로 임시총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백지화될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차수희가 물어왔다.
“임시총회 때 순조롭게 통과만 되면 도원이가 지은이의 기획사 사장님이 될 수도 있는 거네?”
“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이도원이 순순히 대답하자 차수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 안 그래도 이번에 기획사랑 문제를 겪으면서 많이 힘들어 했거든.”
“언니도.”
차지은이 그녀를 말리며 고개를 움츠렸다. 부끄러운 표정 속에 기대감에 부푼 감정이 언뜻 비쳤다.
‘오빠가 백 엔터 대표로 취임할 수도 있다고?’
그녀는 동시에 이도원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 발걸음을 맞췄다고 생각하고 옆을 보면, 어느새 또 저 멀리까지 가있는 것이다.
이도원을 바라보는 느낌은 유태일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분야는 조금 달랐지만 업종이 같으니만큼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내가 섭외할 수 없는 위치까지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군.’
유태일 감독은 쓰게 웃었다. 그 자신도 고속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도원은 한층 더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반면 가족들의 생각은 같은 업계 사람들이 받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미리 말 좀 해주지.’
어머니나 이다원이 하는 생각은 똑같았다.
이도원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죄송해요.’
적어도 가족에게는 진즉 말을 했어야 됐다. 하지만 핑계를 대자면 하루하루 너무 바쁘고 일에 치여 지냈기 때문에 도무지 마주 앉아 진지하게 말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를 전화상으로 짧게 통보하기도 이상했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결국 남에게 소식을 듣게 만들었다.
눈치를 살피던 유태일 감독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물었다.
“그럼 지은이와 아현이 모두 백 엔터로 들어가게 되겠군. 백 프로덕션 소속인 심재빈도 요새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 같던데, 금방 회사가 크겠어.”
심재빈은 현재 웹 드라마를 마치고 자잘한 예능 프로나 광고 모델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를 떠올린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속배우들에게 좋은 보금자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덕션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 선택의 폭도 넓을 테고요.”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첨언해주었다.
“백 프로덕션은 지금까지 투자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이미 업계에서 큰 입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회사 규모에 비해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실제로 이번 영화 <바람>의 최대투자사도 백 프로덕션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가족들은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미리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던 이도원에게 느낀 서운함과는 별개로, 혹시 감당도 안되는 일을 벌이는 게 아닐까 가슴 한구석에 품었던 불안이 어느 정도 가시는 느낌이었다.
유태일 감독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한 이도원이 자리의 이들에게 말했다.
“아마 백 프로덕션 대표를 겸임하고 계신 이상백 대표님이 실질적인 관리를 하게 되실 거예요. 저는 명함만 대표지, 지금처럼 활동하게 될 거고요. 아마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을 겁니다.”
식구들을 어느 정도 안심시킨 이도원이 이번에는 차지은과 차수희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소속사에 있을 때보다 더 실질적인 회사의 역할을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철저한 검열로 배우에게 도움이 되는 작품 위주로 투자를 진행한 뒤 둘 씩, 혹은 셋 씩 백 엔터 배우들을 투입시켜서 눈치를 안 보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 겁니다.”
말하는 걸 보니 이미 세부적인 계획이 확립돼있다. 이 모든 계획에 대해 대표 취임 전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이도원의 아이디어라는 뜻도 된다.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나이도 어리고, 활동만 해왔던 녀석이 사업수완까지 있다고? 레드 엔터에서 루머를 터트렸을 때 발 빠르게 막은 것도 소문대로 본인 혼자 움직였다는 건가?’
쉬이 믿기 힘들었다.
한편 이도원은 자리 내내 어머니가 신경 쓰였다. 유태일 감독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한 번도 가족들과 상의한 적 없이 이도원 혼자 처리해왔던 것이다. 결과만 보았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어머니 입장에선 서운할 수 있었다. 이도원은 식사자리가 정리될 때쯤, 어머니에게 애교를 섞어 속삭였다.
“오늘은 집에 가서 잘게요.”
*
백 프로덕션에서 주주 임시총회가 열렸지만 이상백이 주주들에게 사전 동의를 구해놨던 터라 형식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백 엔터테인먼트의 위치가 백 프로덕션 바로 맞은 편 건물로 정해졌고, 건물 공사가 시작됐다. 따라서 소속 배우인 심재빈, 새로 들어온 차지은과 박아현은 당분간 백 프로덕션 건물로 출근을 하기로 했다.
반면 이도원은 명함을 받았다.
[대표이사 이도원]
이도원의 매니저도 바뀌었다.
오준식은 소속 배우로 들어오기 전 트레이닝 기간을 거치는 중이었다.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은 그 사실을 축하를 해주면서도 많이 아쉬워했다.
“으흥…….”
유성연은 지속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미간을 찌푸린 이도원이 영어 대본을 내리며 물었다.
“누나. 뭐가 문제예요?”
“준식이 보고 싶다.”
유성연은 혼잣말 하듯이 대답했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도원이 보기에 조금 과한 구석이 있었다. 휘휘 고개를 저은 이도원은 백미러를 통해 새로운 로드매니저를 보았다.
‘완전히 얼었군.’
신입 로드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딱딱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유성연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겠다 싶었다.
이도원이 그에게 불쑥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그에 신입 로드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진빈 입니다!”
“얼마 전에 제대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도원이 씩 웃었다.
이진빈은 곁눈질로 이도원을 보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말투만 봤을 땐 아직 군인 티를 다 벗지 못한 듯 보였다.
이도원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브로드웨이.’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끊임없이 영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보름 앞으로 다가온 브로드웨이 행(行). 시간이 정말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덧붙여 이도원이 이번 일정에 만전을 기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이번 브로드웨이 원정 공연이 앞으로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영화 <바람>이 일으킨 돌풍은 거세었고 잦아들 줄 몰랐다. 예매만 백만 관객을 돌파했고 개봉 이주도 안돼서 천만을 기록, 파죽지세로 신기록을 세워갔다. 이도원과 치지은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불어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일각에서는 안유성의 죽음과 주연배우들의 루머가 어느 정도 거품으로 적용했다는 평도 있었지만, 흥행가도는 멈출 줄 모르고 지속됐다. 아직까지 국내 신기록은 천만 선에서 머물고 있었지만 여러 연론 매체들은 이번에야 말로 그 기록을 갈아치울 거라고 전망하기에 이르렀다.
<新한류스타 이도원, 드라마 출연료 회당 1억 돌파>
<‘시간아 돌아와’ 중국 진출… 광고료 20억 제안 받은 이도원>
<이도원, 영화 ‘바람’ 이후 6억대 몸값… 현존 최고 탑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차지은 ‘바람’ 이후 개런티 수직상승… 억대 배우로 등극>
<차지은, 어마어마한 몸값 보니… ‘바람’ 이후 몸값 30배 폭등>
거기 몇몇 기사들이 더 추가됐다.
<이도원… 백 프로덕션 계열사 ‘백 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 취임>
<전무후무한 풍운아 ‘이도원’… 차지은, 박아현, 심재빈 라인업 갖춘 백 엔터테인먼트 대표 취임>
<백 프로덕션 주가 폭등… 엔터 주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다>
<이도원과 차지은, 충무로를 벗어나 세계로 나가다>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사는 스타의 ‘브로드웨이 진출기’>
<중영극단, 뮤지컬 ‘영웅’으로 브로드웨이 진출>
<이도원과 차지은이 소속된 중영극단은? 중영대 동문회 공연으로 시작된 바람, 브로드웨이로 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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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도, 언론도 호황을 맞았다. 이도원이 일으킨 작은 날개 짓이 거대한 태풍이 되어 나비효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연예계와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도원은 중영극단의 뮤지컬 <영웅>의 브로드웨이 진출을 위한 준비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많은 러브콜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더 위를 보고 있었다. 잇따른 고액 출연료와 특별한 조건들에 백 프로덕션 측에서는 아쉬운 마음을 삼켜야 했지만, 백 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인 이도원을 강제하진 못했다.
그 동안 <바람>은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제, 대종상영화제를 모두 석권하고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영화제로 진출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이도원은 백상예술대상에선 대상을, 청룡영화제와 대종상영화제에선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한반도에 열풍을 남긴 채 브로드웨이로 간 이도원과 <영웅>.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흘렀다.
< 조화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