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27화 (127/178)

< 조화 (2) >

영화 <바람>의 촬영을 모두 끝낸 안유성은 5주 동안 병원에서 지낸 뒤 7월 25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바람> 작업에 참여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모두 모여 함께 문상을 갔다.

영정사진 앞에 선 이도원은 사진 속 유쾌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안유성을 바라보았다. 늦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발자국을 새긴 사람이었다. 존경하는 배우, 진짜 배우라고 한다면, 이도원은 언제나 망설임 없이 안유성을 떠올릴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향을 피웠다.

차지은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세 사람은 다른 스태프들 보다 앞서 조의를 표하고 빈소를 나왔다. 세 사람 모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식탁에 마주앉아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유태일 감독이었다.

“많은 배우들을 만난 건 아니지만, 안 선생님은 내가 본 최고의 배우셨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잊지 못할 거예요.”

“영화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겠지. 안 선생님이 보여주신 투혼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 쉴 거야.”

유태일 감독의 말을 들은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영화에 초대해주셔서.”

차지은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두 사람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선생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끝까지 함께하셨으니까…….”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침묵 끝에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번 영화의 모든 행사일정은 취소됐다.”

본격적으로 영화가 상영될 쯤에는 이도원과 차지은이 브로드웨이로 떠나게 될 터였다. 안유성까지 없으니 무대인사 같은 이벤트는 무의미했다. 더욱이 행사를 다닐 분위기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수긍하자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함께 작업한 모두가 안 선생님의 흔적을 기리겠지만, 특히 주연배우 두 사람은 그 분의 모습을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안 선생님이 유작으로 이번 영화를 선택하신 데에는 작품 보다 두 사람의 존재가 크니까. 그러니 너희가 연기하는 장면에서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셨지.”

“명심하겠습니다.”

이도원이 대답했고 차지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독님……. 아직도 선생님이 웃으시는 모습이 눈에 선해요.”

말하면서 울컥한 차지은이 눈시울을 붉혔다.

이도원은 말없이 술잔을 채웠다.

약수 물처럼 떨어지는 술을 빤히 보던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난 운전해야 돼서 입만 대지. 바라다 줄 테니까 두 사람은 마셔도 돼.”

자리의 누구도 과음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도원과 차지은은 적당히 잔을 나누며 마셨다.

술잔이 두 번 정도 돌았을 때 차지은이 물었다.

“안 선생님이 저희에 대해 따로 하신 말씀은 없으셨어요?”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아.”

그때 불쑥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지. 내가 재능 있는 후배들을 위해 이번 작품을 선택하신 건지 물은 적이 있다. 안 선생님께서 연기의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연기 자체는 누구도 가르칠 수 없다며 한 명의 배우로서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이라고 하셨지. 원래 연기자란 궁금한 건 못 참는다고. 좋은 작품을 좋은 배우와 함께 작업하고 싶은 열정은 누구도 못 말린다고 하셨어.”

그 말을 들은 이도원과 차지은 느끼는 바가 컸다. 그들이 기억하는 안유성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언제나 어린아이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쏟아 부었고, 늙지 않는 열정으로 임했다.

두 사람을 빤히 보던 유태일 감독이 제안했다.

“VIP시사회 일정은 잡혀있다. 그때 가서 영화 한 번 봐. VIP시사회 때 아니면 꼭 영화 시작할 때쯤 맞춰서 들어가야 하고, 편하게 영화도 못 보잖아.”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꼭 볼게요.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셋이 같이 보시죠. <우리의 심장> 때 부국제에서 봤던 것처럼요.”

“맞아요.”

차지은도 동조했다.

유태일 감독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

장례식이 끝나는 날에 맞춰서 영화 <바람>의 시사회가 시작됐다. 흥행보증수표 안유성의 유작이라는 사실부터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스캔들이 터졌던 이도원, 차지은이 실명 그대로 출연한 멜로라는 점도 몫 했다.

그 결과 영화 <바람>은 개봉하기도 전에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예매관객 백 만 관객을 넘은 것이다. 한국영화 역사상 전례 없는 성과를 본 각종 매체들은 영화 <바람>에 대해 불을 켜고 보도했다. 연출, 배우 모두 대박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흥행보증수표들인데 그 뒷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였으니 보도할 소스는 차고 넘쳤다. 언론을 등에 업자 특별한 영화홍보 없이도 영화계 전체가 들썩였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큰 별이 지다… 대배우 ‘안유성’이 남긴 발자국>

<영화 ‘바람’ 예매율, 한국영화의 종전 기록 갈아치우다>

<이도원, 차지은, 안유성, 그리고 유태일 감독… 전무후무한 영화 ‘바람’>

<배우 안유성의 유작 ‘바람’ VIP시사회, 드디어 베일을 벗는다>

<영화 ‘바람’ 무대인사 전면 취소… 영화홍보 전무한 상태로 ‘예매율 1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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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원은 태블릿 화면을 껐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영화관 후문으로 들어갔다. 이미 안에는 차지은과 유태일 감독이 검은 정장 차림으로 도착해 있었다.

이윽고 유태일 감독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자.”

세 사람은 상영관 뒤쪽 객석에 나란히 앉았다.

이어서 가족이나 지인들, 소수의 관객들이 입장했다.

이윽고 실내조명이 꺼지며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영화 <바람>은 어떤 환영사나 광고 한 편 없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골풍경이 나타나자 흘겨 쓴 필체로 ‘바람’이라는 제목이 스크린에 맺혔다.

화면은 배경이 되는 동네의 구석구석을 조명했고, 그때마다 배우들의 이름을 하나 씩 알려주었다.

마침내 이도원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학창시절, 나는 통학버스 차창에 기대어 항상 생각했다. 이대로 버스를 타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길. 눈을 감으면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다시 눈 뜨길 꿈꿨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이 담담하게 관객들을 어루만졌다.

영화는 이도원의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첫 장면부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안유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립고 먹먹한 감정이 든 이도원은 입술을 매만졌다.

차지은은 어깨를 가늘게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과 달리 유태일 감독은 담담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즐겁게 보십시오.’

유태일 감독이 속으로 되냈다.

머지않아 이도원과 차지은이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도원은 시골의 흔한 총각처럼 편안한 인상과 연기를 보여주었고, 차지은은 그야말로 예쁘고 청초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기막힌 촬영기법과 연출이 두 사람의 모습을 아름답게 꾸몄다.

관객들은 절로 스크린에 빠져들며 미소 지었다.

‘잔잔하게 시작된 영화는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이도원은 내심 다음 내용을 떠올렸다.

완성된 필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절로 기대가 됐다.

곧 이도원이 시한부 판정을 받는 바람에 차지은에 대한 마음을 감추는 장면이 나왔다.

벌써부터 객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원과 빼빼마른 안유성이 스크린에 나타났을 땐 전염이라도 된 듯 관객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연기를 보며 훌쩍거리던 소리가 흐느끼는 소리로 바뀌었다. 심지어 엉엉 우는 사람까지 있었다.

눈물바다로 변한 객석을 스크린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었다.

“저 못 보겠어요.”

차지은이 스크린을 보며 속삭였다. 그녀는 눈썹에 이슬 같은 눈물을 매단 채로 코가 빨개져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여성 관객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터였다.

‘화면에 내가 나오는데도 이렇게 뭉클하다니.’

이도원은 눈물이 핑 돌았다.

스크린에서는 어느 봄날의 꿈처럼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이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두 사람은 포옹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어떤 멜로보다 찐한 감정을 선사했다.

훌륭한 연출과 연기가 일으킨 마법이었다.

이도원이 말없이 세상을 떠나고, 차지은은 남겨졌다.

스크린은 사랑했던 날을 차곡차곡 간직하는 차지은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두 사람이 자주 갔던 마을회관 앞 벤치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차지은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난 당신이 말했던 인연을 믿습니다. 전생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면인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겁니다. 나는 우리의 추억이 이어질 때까지 이 사랑을 잠시 보관해두려 합니다.

영화가 끝났음에도 객석을 떠나는 관객은 없었다.

울음소리가 하나 둘 늘어가는 박수소리에 파묻혔다.

모두들 멍한 눈으로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사이 앤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갔다.

그리고 촬영장의 스틸 컷이 나왔다.

“이건…….”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차지은은 그만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유태일 감독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세 사람은 관객들이 모두 상영관을 빠져나갈 때까지 객석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관객들이 일어나며 말하는 소감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진짜 오랜만에 한국영화 보고 울었다.”

“와, 멜로 명작 오랜만에 봤네요.”

“지금도 멍해요.”

“나 이 영화 열 번 볼 듯.”

호평들이 두서없이 들려왔다.

슬며시 미소 지은 이도원이 말했다.

“엄마랑 누나가 좋아하겠네요.”

차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초대하셨었어요? 인사하시죠. 전 가족들이 못 온다고 해서 초대 못했거든요.”

그녀가 유태일 감독에게도 물었다.

“감독님은요?”

유태일 감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부모님은 일. 동생은 학원. 해서, 지인들만 초대했다.”

이도원은 괜스레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잖아도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두 사람이 조용히 있기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전 그럼 가족들에게 가볼게요.”

이도원이 마이를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뒤따라 일어난 차지은이 살짝 부은 눈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언니랑 저녁 먹기로 해서요. 일하느라 못 왔거든요.”

유태일 감독은 피식 웃으며 두 사람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도 오늘 왔던 투자자들이랑 약속 있다. 신경쓰지 말고 가봐.”

이도원과 차지은은 반쯤 고개를 갸웃하며 상영관을 나섰다. 유태일 감독에게 약속이 있다는 공지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경이 쓰이는지 차지은이 물었다.

“감독님, 저희 때문에 시간 비워두셨던 건 아니겠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중얼거린 이도원이 걸음을 멈췄다.

“다 불러서 저녁 먹을까?”

그가 묻자 차지은이 뜨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빠 식구들, 우리 언니, 감독님까지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직장동료 또는 친구의 어머니, 누나, 언니, 뭐 그런 관계 아니겠어? 더구나 난 차수희 원장님이랑 친분도 있고.”

곰곰이 생각하던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네요. 감독님한테 얘기하고 언니한테도 물어볼게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 화면을 켰다.

“나도 우리 집 사람들한테 기다리라고 전해 둘게.”

< 조화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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