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화 (1) >
벤치에서의 장면이 모두 끝나자 스태프들은 장비를 마을회관 안으로 옮겼다.
다음은 노인복지사업 의료지원을 나온 이도원이, 차지은이 듣는 거리에서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이도원은 이 대화를 통해 차지은을 향한 마음을 밝히게 된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지시에 따라 이도원과 ‘마을회관 할머니’ 역할의 단역 배우가 나란히 앉았다.
한편 차지은은 물리치료실과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회관 카페로 갔다.
마을회관 자체가 좁기 때문에 창문을 통해 서로를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였다.
카메라 한 대는 이도원을 미디엄 클로즈 업(MCU; 가슴 위를 잡는 샷)으로, 나머지 한 대는 좁은 카페 창문을 통해 보이는 차지은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 업(ECU; 일부분을 극대화 시켜 보여주는 샷)으로 잡았다.
마침내 준비가 끝나자 유태일 감독이 촬영시작을 알렸다.
“레디- 액션!”
‘할머니’ 역할의 단역 배우가 대사를 쳤다.
“그래서, 우리 물리치료사 선생님은 예쁜 애인 있나?”
이도원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없어요- 애인.”
차지은의 눈매가 반쯤 실망으로, 반쯤은 기쁨으로 들어찼다. 이도원이 자신을 가리켜 애인이라고 하지 않는 데 대한 실망과, 다른 애인이 없다는 데 대한 기쁨이었다.
물론 표정만으로 복합적인 감정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차지은은 투명해지기로 했다. 자신의 마음을 꾸밈 없이 드러내는 쪽을 선택했다. 이도원을 향한 차지은의 감정이 배역의 감정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영리한 판단이었다.
‘제법이야.’
모니터를 보던 유태일 감독이 입 꼬리를 올렸다.
우려하던 것과 달리 차지은은 훌륭히 소화해낸 것이다.
그때 할머니가 이도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왜 없어. 내가 하나 소개해 줄까?”
“아녜요.”
이제는 이도원의 차례였다. 그는 유들유들한 말투로 거절하며 대사를 이어나갔다.
“좋아하는 여잔 있어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할머니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도원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차지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 그녀와 눈을 마주친 이도원이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시선만은 떼지 않고 할머니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사랑이 점점 물드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풍덩 빠지기도 하더라고요.”
똑똑히 들은 차지은은 눈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감정에 솔직하기에는 부끄러운,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른 채 깔깔 웃은 할머니가 물었다.
“그 처자한테 말은 했고?”
이도원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차지은에게서 시선을 떼고 할머니의 발목을 풀어주며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학창시절부터 문제가 좀 있어요. 꼭 절 안 좋아할 것 같은 여자들만 졸졸 쫓아다니더라고요. 그래서 망설이고 있죠, 뭐.”
“뭔 고민이 그렇게 많아? 남자는 원래 죽을 때까지 철딱서니 없는 동물이야. 뭐든 저지르고 보는데, 선생님은 가만 보면 그런 공격성이 없어. 초식동물 같아-.”
“그래요?”
물은 이도원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음악을 듣더라도 꼭 이어폰을 꽂고 듣죠. 사랑도 그렇게 해요. 저는 그런 게 싫거든요. 그래서 조심스러워요.”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상처받을까봐 일부러 짝사랑을 즐기는 척, 혼자 폼 재고 있구먼?”
발목을 풀어주던 이도원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다시 차지은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머무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이도원을 훔쳐보고 있던 차지은이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모습이 벽에 가려 사라지기 무섭게 이도원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에이- 그래도 역시… 평균수명도 길어졌겠다, 철도 늦게 들어야 맞는 거겠죠? 오늘 저녁 아홉 시에 요 앞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기다릴 생각이에요. 얼마가 걸리든 올 때까지…….”
이도원과 차지은.
두 배우의 호흡은 러브라인을 타면서부터 쭉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컷, 오케이. 배우들은 그대로 계세요. 추가 샷 좀 따겠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이번 장면도 무난하게 촬영이 끝났다.
유태일 감독은 건강이 안 좋은 안유성이 촬영할 장면을 앞으로 빼고자 했다.
조감독을 불러 지시를 내리려던 그때, 안유성이 말했다.
“내가 언제 촬영하든 난 두 사람이 촬영할 장면을 모두 볼 생각이네. 유 감독도 내가 생전에 이 영화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 못할 것 아닌가?”
직설적으로 말하는 안유성에게 유태일 감독은 어떤 대답도,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지시하던 내용을 철회하고, 계획대로 일정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이도원과 차지은이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만나는 장면이었다. 해당 씬은 이도원이 시한부 판정을 받고, 차지은에게 고백하려던 결심을 되돌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준비되면 갈게요.”
조감독이 말했다.
두 배우가 마주 선 모습을 모니터가 담아냈다.
‘그림 좋군.’
유태일 감독은 남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돌아가고 이도원과 차지은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유태일 감독의 신호가 떨어졌다.
“레디- 액션.”
이도원은 경직된 얼굴이었다. 그는 아름드리나무 앞을 왔다갔다 맴돌며 억지로 미소 짓고, 풀기를 반복해보았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내가 죽는다고?”
중얼거린 이도원이 걸음을 멈추고 불쑥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며 한숨을 내쉬고 쪼그려 앉았다. 땅을 내려다보며 힘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 모든 움직임은 콘티에 없는 이도원의 애드리브였다.
그때 땅에 그림자가 지더니 차지은이 다가왔다. 그녀는 등 뒤로 깍지를 낀 채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우려 애쓰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들뜬 말투를 차마 숨기지 못했다. 말끝이 살짝 떨렸고, 스태프들은 소름이 좍 돋았다.
반면 몰입해서 호흡을 주고받는 이도원에게는 감탄할 새가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이도원은 차지은을 보며 활짝 웃었다.
“왔어요?”
그가 묻자 차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란히 서서 걸었다.
카메라가 따라붙으며 천천히 걷는 두 배우를 촬영했다.
말없이 다섯 걸음 쯤 갔을 때 이도원이 멈추며 몸을 돌렸다.
“지은 씨.”
그 부름에 차지은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내가 오늘 할 얘기가 있었는데…….”
이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음성을 억눌렀다.
“날씨가 안 도와주네.”
기대가 만개했던 차지은의 표정이 시들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이도원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그쪽이 줄곧 제 언저리를 돌고 있다는 거, 진즉에 알고 있었어요. 난 바보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왜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차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동자로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그녀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외쳤다.
“장난하지 말아요! 비겁해…….”
실망으로 물든 목소리였다.
그 말만을 남긴 채 차지은이 카메라 밖으로 떠났다.
남아있던 이도원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망연히 바라보며 서있었다.
완연하게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침묵이 깃들었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유태일 감독이 컷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방금 씬까지, 대부분의 중요한 장면들을 모두 롱 테이크로 촬영했다.
물론 그 뒤에도 여러 구도에서 따로 촬영하며 소스를 확보했지만, 전례 없이 순탄한 촬영임에는 분명했다.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최고의 집중력을 유지했다.
“당장 필요 없는 장비들부터 옮기세요. 바로 다음 씬 들어갈 수 있게 세팅합시다.”
유태일 감독은 여세를 몰아 촬영에 임했다.
*
필요한 장면을 모두 확보한 촬영 팀은 마을회관 옆, 허름한 집안으로 이동했다.
먼저 와 있던 스태프들이 대부분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유태일 감독이 지시를 내렸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안유성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난공불락의 산을 넘듯이 벅찼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를 보는 사람들마저도 조마조마해지는 모습이었다.
‘저 몸으로 연기를 하실 수 있을까?’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뇌리를 스친 불안감이었다.
심지어 유태일 감독은 그동안 촬영 장면들을 엎고 다시 찍을 생각까지 했다.
안유성의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자 안정을 취하길 권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안 선생님.’
상대역인 이도원은 안유성을 마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차마 그만두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속은 안타까움으로 타들어갔다.
정작 안유성은 카메라 앞에 서자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
“유 감독. 시작하지.”
거리가 가까운 이도원에게만 간신히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롤.”
이번 장면은 극중에서 안유성이 연기하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씬이었다.
이도원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고백을 실패한 다음 장면이기도 했다.
이어서 유태일 감독이 촬영 지시를 내렸다.
“레디- 액션.”
안유성이 먼저, 정신이 돌아온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대사를 쳤다.
“이제야… 네 짐을 좀 덜어줄 수 있겠구나.”
말도 제대로 못하던 안유성이 안정된 호흡으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똑똑히 전해지는 음성을 들은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대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안유성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눈치 챈 유태일 감독이 촬영을 멈췄다.
“컷.”
안유성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이도원의 팔목을 잡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아프니까 엔지를 내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은 접어두게. 자네… 표정이 굳어있어.”
안유성은 이 순간 마저도 상대를 배려하고 있었다.
이도원은 결국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훔쳤다.
울음을 참는 이도원을 본 안유성은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든 스태프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겨우 진정한 이도원이 말했다.
“…준비 됐습니다.”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이 있는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유태일 감독이 지시를 내렸다.
“준비 되는대로 가시면 됩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안유성이 연기를 시작했다.
“이제야… 네 짐을 좀 덜어줄 수 있겠구나.”
이도원은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목이 메였다. 이도원은 서두르지 않고 침묵 끝에 대답했다.
“할아버지. 이대로 떠나면 너무 하잖아. 지금까지 내가 했던 노력은 뭐가 돼요?”
대사를 치자마자 눈물이 터진 이도원이 팔로 눈을 가렸다.
팔 아래로 폭포수 같은 눈물이 낙하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한참이나 좁은 방안을 채웠다.
편집이 있었기에 씬이 늘어지는 건 괜찮았다.
중요한 건 촬영이란 생각이 안 들 만큼 이도원의 슬픔이 ‘진짜’라는 점이었다.
이도원이 펑펑 우는 가운데 안유성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전에도, 지금도…….”
중얼거린 안유성은 손을 뻗어 이도원의 목을 쓰다듬었다.
이도원은 이끌리듯 안유성의 손을 두손으로 잡아주었다.
“괜찮아, 할아버지. 괜찮아…….”
대사에 짙은 감정이 실렸다.
이도원의 감정은 연기와 현실의 구분선을 완전히 허물었다.
“할아버지. 무서워하지 말아요.”
이도원이 내보낸 감정이 안유성에게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더 이상 이도원은 혼자 호흡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웃은 안유성이 반응했다.
“사람은 사람에게 남는단다. 내가 네 아비와 어미를 모두 잃었을 때… 죽고 싶었어. 하지만… 널 보며 살았다. 그리고 살다보니… 먼저 간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 더구나……. 나 또한… 네 곁에 남을 게야…….”
안유성은 속삭이며 이도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도원은 안유성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눈앞이 비 내리는 날의 창문처럼 흐릿했기 때문이다.
“나, 할아버지에게 말 못한 것들이 많이 있거든? 꼭 말할게. 말하고 싶어… 제발 죽지 마…….”
안유성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점점 가늘어지는 호흡을 내뱉더니 숨을 멈췄다.
이도원은 안유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크게 오열했다.
도저히 얼굴을 들어 시신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떨었다.
마음껏 퍼지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스태프들이 서둘러 다가갔다.
안유성이 연기를 하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안유성이 눈을 떴다.
“아직 안 죽었네.”
안유성은 재치를 잃지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품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이도원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무거워, 이 사람아.”
이도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때묻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 조화 (1) > 끝